시진핑은 다 장악했는가

[정대성의 중국 정치 번역기] 보시라이 축출후 시진핑이 간택된 이유 ‘후견인’ 장쩌민의 사망이 갖는 의미는 보수파 vs 개혁개방파 대결은 끝났나

장쩌민은 개혁개방의 주역이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을 최전선에서 지휘한 지휘관 출신이다. 그는 체제 안정보다 성장을 우선하는 과감한 전략을 추진했고, 중국의 자유화를 이끌었고, 개혁개방을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그는 심지어 공산당이 노동자·농민뿐 아니라 자산가·지식인의 이익까지 대변해야 한다는 ‘3개 대표 이론’으로 시장경제 도입의 이론적 토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행보를 보인 그가 지난해 11월30일 사망한 뒤, 해외 언론에서는 시진핑의 행보를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장쩌민의 대한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나아가 장쩌민의 사망으로 장쩌민의 계파인 ‘상하이방’이 소멸되고, 시진핑의 1인 독재가 공고화되었다는 분석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언론들의 분석은 중국 공산당의 정치 지형에 대한 몰이해로부터 비롯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중국 공산당내에 ‘태자당’, ‘상하이방’, ‘공청단’등의 “팩션(이익집단)”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분류는 표면적인 분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가 표면적으로 ‘국민의 힘’, ‘민주당’, ‘정의당’으로 갈라져있다 해서 보수-진보 아젠다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듯, 중국 공산당은 ‘상하이방’, ‘태자당’등과 같은 팩션의 존재와 소멸 여부에 관계없이 ‘개혁개방’과 ‘평등’의 두가지 아젠다가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나는 시진핑의 3선이 확정된 이후에도 이 두 아젠다가 중국의 여러 층위에서 적극적으로 충돌하는 상황을 보며, 중국의 정치 지형에 대한 올바른 지식의 확립이 시진핑 시대를 논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장쩌민의 죽음에 전후해 쓰는 이 글을 빌어 그가 가졌던 정치적 입지와 시진핑이 추대되었던 배경을 언급하며, 오늘날 시진핑 시대가 마주하는 딜레마를 설명하려 한다.

점점 세력을 키워가는 ‘건국자’의 잔재

중국 공산당에서 중국 건국자인 마오쩌뚱의 정신을 따르는 당내 보수파는 평등 지향적인 부류로, 현재 당 내부에서 경계의 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 보수파는 당의 기층조직, 특히 발전에서 소외된 내륙지방의 정부들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보수파의 대부인 천윈과 숙청된 보시라이가 대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몇몇 언론은 이 보수파를 ‘태자당’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태자당의 성향은 실제로는 매우 다양하다. 태자당이 보수파 그 자체로 보이는 이유는, 보수파가 천안문 사태 전후로 중국 공산당에서 철저히 배척받은 집단이 됐기 때문이다.

관료주의를 재건하려는 ‘개혁’과 기업가 같은 민간 부분의 육성을 주도하는 ‘개방’ 정책에 대해 수정을 요구하는 보수세력들은, 개혁개방 노선을 견지했던 중국 지도부와 평화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덩샤오핑의 ‘공칠과삼(公七過三)’은 말 그대로 더이상의 정치적 배제가 없다는 ‘선언’이었을 뿐, 실제 그는 마오의 잔재를 철저히 당에서 없애려고 노력했다. 특히 천안문 사태 이후 개혁개방을 반대하는 사람이 당의 고위직으로 진출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개혁개방 세력이 건국자의 잔재를 걷어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방이 낳은 빈부격차, 개혁이 낳은 관료주의의의 부작용은 청년과 내륙의 지방공무원,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건국자의 그림자를 키우는데 일조할 따름이었다.

세를 불려가던 중국 공산당의 보수파는 태자당을 자신의 대표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태자당에게도 반가운 일이었다. 덩샤오핑은 권력의 세습을 지양했지만 세대교체를 지향하는 지도자였다. 출신 성분이 가장 큰 무기였던 중국의 ‘태자들’은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보수파와 손을 잡았다.

태자당에게도 한 가지의 이점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마오의 위치를 격하하지 않았으며, 덩의 시대에도 마오쩌뚱주의는 당의 첫번째 사상이었고, 덩샤오핑 이론보다 우위에 있는 이념이었다. 또한 덩샤오핑은 ‘공칠과삼’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마오의 잔당이 중앙이나 요직에 앉는 것을 억누르면서도, 그들을 몰아내지 않고 껴안는 것을 선택했다. 당의 초창기 시절 사람들을 숙청한 ‘배신자’ 또는 ‘수정주의자’라는 프레임을 철저히 피하고자 했다.

덩샤오핑 아래에서 태자당이나 마오의 후계자들은 실질적인 발언권을 가지지 못하는 정무직에 있었지만, 태자당은 덩샤오핑의 정치적 보호 아래 확고한 위치를 가진 내부집단이 되었다. 그러니 당이 불가피하게 보호할 수밖에 없는 지위를 가진 태자당이 중국 공산당의 기층조직에서 세력을 불려가며 중앙정치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길 원하던 보수파를 대변하기로 한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개혁개방파의 분열과 상하이방의 등장

당내 보수파에 대해 반대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공산당이라기보다는 중국 관료집단의 후예에 가깝다. 현재 중국의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은 이 개혁개방파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크게 보면 후진타오와 장쩌민은 한 배를 탄 정치적 동지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분열은 총설계자인 덩사오핑이 세운 격대지정(隔代指定)의 원칙으로부터 출발했다. 격대지정은 한 지도자가 차기가 아닌 한 대를 넘어 지도자를 지정하는 것을 말한다. 장쩌민은 덩샤오핑의 유훈에 따라 불가피하게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넘겨줄 수 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권력을 순순히 후임자에게 넘겨줄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국가주석과 중국의 실세를 오랜 기간 지내며 쌓아온 인맥이 있었다.

그는 전임자인 덩샤오핑과의 약속대로 당주석과 국가주석직은 바로 이양했으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후임인 후진타오에게 바로 이양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측근들을 정권의 실세로 군림하게 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가 정권의 실세로 군림하는 순간 상하이방은 시작되었다. 장쩌민 사단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상하이방은 장쩌민이 없다면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는 팩션에 불과했다.

장쩌민과 보시라이의 ‘불편한 동맹’

후임자인 후진타오와 전임자인 장쩌민은 당내에서 견제하고 대립했다. 이것은 기존 중국공산당의 ‘평등주의’와 ‘권위주의’의 갈등이 아닌, ‘야인으로 돌아가라’는 후진타오의 개혁개방 세력과 ‘곱게는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장쩌민 세력의 대결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대의명분이 중요한 중국 정치 내에서 장쩌민의 권력 유지는 지속적인 지지를 얻기에 한계가 분명했다. 후진타오가 권력을 승계받는 것은 개혁개방의 총설계자인 덩샤오핑의 유훈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쩌민은 순순히 물러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내 보수파를 대변하고 있는 보시라이라는 야심가와 협력하는 것을 선택했다. 장쩌민은 견해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보시라이의 후견인이 되었다. 보시라이는 보수파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고 후진타오를 비롯한 당시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그는 충칭(重慶)에 북경 인민대회당에 버금가는 규모를 가진 인민대회당을 건축하기도 했다. 자신의 정치적 거점인 충칭에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동남부 해안도시들의 자유화 모델과 다른 모델인 ‘충칭 모델’을 내세우며 ‘정부 주도의 시장 경제’를 도입하려는 시도도 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대로 장쩌민의 후원 아래 승승장구하던 보시라이는 여러 스캔들 끝에 무기징역이라는 무거운 형벌과 함께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그를 둘러싼 정치적 환경은 당시 총리였던 원자바오가 그가 축출된 후 “문화대혁명 같은 비극이 다시 발생할 수 있다”라는 발언을 했던 배경이었다.

충칭 인민대회당
충칭 인민대회당

보시라이 축출 이후, 당 원로들의 입장에서 ‘태자당’의 시진핑은 가장 매력적인 후보였다. 그는 보수파가 동의할 수 있고, 장쩌민 세력과 개혁개방파의 우려도 해소시킬 수 있는 요소를 고루고루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덩샤오핑에 의해 사면되고, 마오의 지도에 도전하다가 하방된 시중쉰의 아들이기에 마오와는 융화될 수 없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 시중쉰처럼 개혁개방의 핵심 인물이면서도, 해안 지대와 내륙 지대의 공직을 두루 겸임하며 개혁개방의 문제를 볼 수 있었던 공무적 배경까지 있었다. 여러모로 중국의 차세대를 이끌어나갈 지도자의 후보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는 당의 내외부적인 문제를 통감하던 원로들의 지지를 골고루 받아 차기 주석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시진핑의 딜레마: 나는 시중쉰의 아들이다

후진타오 시대 말기, 눈덩이처럼 커진 첨단 테크 기업과 은행들, 부동산업자 등 당외 세력들이 당의 영도력을 무시하고, 지방정부와 결탁해 정부를 상대로 부정하게 이권을 챙겨가고 있었다. 이런 세태를 비판하던 세력이 점점 힘을 얻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중국 공산당이 큰 위기에 처해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진핑도 태자당의 일원으로서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개혁개방이 야기하는 여러 문제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했다.

시진핑이 두각을 나타낸 시절은 바로 이러한 시대였고, 이 시절의 시진핑은 겉으로는 보수파에 가까웠다. 그의 정치적 후견인(장쩌민)은 차치하고서라도, 그 스스로가 당내 민주와 법치에 기반한 당의 영도력을 강조하며 개혁개방이 야기하는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등을 문제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를 안고 중국의 새 지도자로 추대된 시진핑은 자신의 첫번째 임기 동안 당의 사회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자본을 앞세운 당내 이익집단들을 단호하게 처벌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많은 당 밖의 세력들과 신흥 부호들을 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개혁개방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가 ‘마오시절로의 회귀’를 바라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진핑은 서구 언론과 개혁개방파의 우려와 다르게 ‘시진핑 사상’을 ‘마오쩌뚱 사상’과 동일선상에 두며 마오 시절의 망령의 부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선택을 했다. 시진핑 사상은 신 시대의 첫번째 목적이자, 그의 영구집권의 정당성이 되었다.

심지어 시진핑은 ‘공동부유’를 외치며 개혁개방이 야기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덩샤오핑 시대의 ‘개혁 정신’을 강조하면서 관료중심과 법치중심의 정치를 강화하고 있기도 하다. 또 ‘학자는 고위직에 앉히지 않는다’는 마오의 유훈을 깨기까지 하며 사상가인 왕후닝등을 발탁하고 상무위원에 유임시켰다. 자신이 마오와 같은 개인적 카리스마를 가진 ‘사상가’가 아니라, 정무의 수장이라는 것을 각인시키기도 했다.

시진핑 시대를 보는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

그가 추대된 배경을 돌아보면, 시진핑 시대를 보는 첫번째 원칙은 ‘중도의 딜레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시진핑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지금 정치적으로 비우호적인 세력들에 둘러쌓여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개혁개방파는 그가 당의 사회영도력을 강화하고, 공익을 시장보다 우선하려는 태도를 경계하고 있다. 반면 보수파는 지금까지 보수파에게 강한 정당성을 주었던 당의 최고 이념인 마오쩌뚱주의의 ‘평등’ 원칙이 사실상 방치되어 버린 점과 그의 정치에서 가속화되는 당의 관료화, 법률화, 서열화를 경계하고 있다.

시진핑은 이 같이 정치적으로 비우호적인 세력들에 둘러쌓인 상황에서 권력의 최종 목적지를 자신에게 집중하고, 집권의 정당성을 절차가 아닌 자신의 사상과 헌신에 의해 정당화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시진핑은 “현대 중국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해결사”가 되어 반대파들의 정치적 도전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양쪽을 다 포용하는 중립을 위해, 더 큰 권력이나 권위를 추구하는 딜레마를 인식하는 것이 중국 정치 이해의 시작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쓴이

정대성 중국 북경대 대학원 석사과정

정대성 중국 북경대 대학원 석사과정생은 미국 고등학교 진학후 UC버클리를 졸업했고, 북경대학 사회과학학부 국제관계학원 석사과정에 수석입학해 현재 중국국가장학생으로 공부중이다. 현재는 비교정치(중국정치)와 국가행동(State behavior)를 전공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정치철학(세속주권론)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추후 연구를 위해 공부하고 있다. 취미는 서도랑 차도(茶道), 유교경전 성독(聲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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