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개혁, ‘시민의회’에 맡겨라
[장은주의 시민을 위한 정치철학] 선거법개정·개헌 따로 갈 수 없어 현 정치 구조에선 정치개혁 어려워 공론화위원회를 ‘시민의회’로 확대해 ‘공정한 심판관’이 합의도출 이끌어야
정치개혁, 이번엔 정말 될까?
진작부터 제기되어 오던 ‘정치개혁’이라는 과제가 마침내 정치권의 주요 아젠다로 떠올랐다. 연초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꾸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토로하더니, 민주당 이재명 대표도 이를 맞받아치기라도 하듯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을 제안했다. 국회의장은 또 국회의장 대로 벌써부터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의지를 천명했고 최근에는 ‘헌법개정 특위’에 대한 구상을 밝히는 등 정치개혁 논의와 절차를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여야 의원들 70여 명도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을 만들어 활동을 개시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고무적인 건 그동안 정치개혁 과제에 소극적이던 국민의힘 소속 많은 의원들도 논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드디어 많은 시민들이 그렇게 고대하던 정치개혁에 대한 기대가 정말로 실현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과제는 분명하다. 소선거구제가 낳은 거대 양당이 빚어내는 지금과 같은 극단적 정치양극화 현실을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는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만들어내고, ‘제왕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비대한 대통령의 권한을 줄이거나 없앤 제대로 된 민주적 권력 분립 체제를 정비하는 일이다. 그와 더불어 상대를 절멸시켜야 할 적으로만 보는 ‘전쟁 정치’의 습성도 없애야 한다. ‘정치 개혁’은 결국 우리 현행 정치 제도와 문화를 개혁하여 지금과 같이 대립과 증오만 난무하는 무능하고 혐오스런 정치를, 타협과 숙의를 통해 사회적 현안들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는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정치로 바꾸려는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정말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이번에도 이 정치개혁이라는 과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다. 무엇보다도 모든 주요 당사자들이 하나같이 정치개혁을 이야기하면서도 서로 다른 욕심과 기대를 숨기고 있을 것 같아서다. 윤 대통령은 내년 총선 승리를 염두에 두고 불쑥 중대선거구제 이야기를 꺼냈지 싶고, 이재명 대표는 국면전환을 위해 개헌을 들고 나왔다는 의심을 피하지 못한다. 국민의힘 안에서도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꺼려할 수 밖에 없는 많은 의원들이 있는 것 같고, 다당제를 도입해야 한다던 민주당의 의원들 중에도 비례대표제를 확대하거나 완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자고 하면 반대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이 ‘동상이몽’이 어떻게 조율되어 모두가 만족하고 동의할 수 있는 선거제도나 헌정 체제가 만들어질 수 있을지 쉽게 상상이 안 된다.
중은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다
사실 바로 이런 종류의 이견과 갈등을 조율하고 조정해 내는 게 제대로 된 의미의 ‘정치’의 요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개혁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의 정치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환경을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로 바꾸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그런 의미의 정치가 원천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는 환경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우리 정치권이 한 번도 제대로 해 보지 않은 그런 정치를 지금 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또 정치는 바로 이런 환경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인들의 역량(마키아벨리의 개념을 쓰자면 ‘비르투’)이 발휘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인들이 그런 비르투를 제대로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문제를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은 난감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냥 정치개혁만 외칠 것이 아니라 문제와 원인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개혁을 가로막아왔던 장애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인식하고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헌이든 선거법 개정이든 여야의 합의가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여야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근본적으로 상충한다.
국민의힘이든 민주당이든 소속 의원들도, 지역구 출신이냐 비례대표냐에 따라 또 지역구가 수도권이냐 영호남이냐에 따라, 선호하는 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도 그렇지만 많은 전문가들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추천하는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제대로 도입하자면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는 게 반드시 필요하지만, 유권자들은 외려 국회의 정원을 축소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 동안의 우리 정치권이 보여 온 모습에 대한 반작용이 빚은 ‘정치혐오’ 때문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손보자고 해도, 어떤 대안이 옳을지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훨씬 나은 민주주의 제도라고 보는 의회중심제(내각제)에 대해서는 역시 국민들의 거부감이 크고, 분권형 대통령제(이원집정부제)는 아직 생소하다.
어리둥절해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나는 어느 하나만이라도 쉽지 않을 선거제도 개혁과 개헌 문제가 함께 다루어져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그냥 한 가지 과제에만 집중하자는 식의 접근이나 정치개혁을 선거제도 개혁에만 한정하자는 식의 접근에는 반대한다. 예컨대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완전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었는데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정치개혁은 하지 않은 것만 못하게 될 수도 있어서다. 남미 등에서 대통령제와 결합된 다당제가 정치적 혼란만 가중시킨 사례가 여럿 있다. 다당제는 대통령제보다는 의회중심제(내각제)와 어울린다는 시각이 우세하고, 소선거구제에 기초한 양당제가 반드시 더 문제는 아니며 대통령제는 양당제하고만 어울린다는 인식도 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쉬운 것부터 해결하는 방식의 정치개혁이 반드시 바람직한 결과를 낳는다는 보장도 없으며 또 생각만큼 그렇게 쉽지도 않을 것이다. 정치개혁은 깊은 숙의와 국민적 동의 없이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
물론 그래도 어떻게든 한 가지 문제에만 집중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질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정치개혁에 나서겠다는 국회의원들의 진정성을 무턱대고 의심해서가 아니다. ‘중은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다’고 했다. 정치개혁은 국회의원들에게 자기 이해관계가 얽힌 일이라 모두가 ‘제 논에 물대기’만을 고집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합의안 마련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며 설사 국회가 가까스로 합의안을 도출낸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가 바람직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지난 20대 국회에서 현행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도출되던 과정을 생각해 보라. 또 그 결과가 어땠는지도 돌이켜보라. 예컨대 만약 국회의원들이 결국 의원정수를 늘여 문제를 해결하기로 합의한다면, 국민들이 단순하게 그 결과를 수용할 수 있을까?

‘시민의회’를 소집하라
과제는 복잡하고, 관련 당사자들의 이해관계는 서로 이질적일 뿐만 아니라 상충하기까지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도출될 결과의 방향과 내용에 대해서는 괄호를 친 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기본 원칙과 절차부터 마련하는 것이다.
우선, ‘민주(주의)적 정의’의 원칙을 분명히 하는 게 필요하다. 간단히 말해, 새로운 정치 체제와 그 체제를 만들기 위한 절차는 원칙적으로 우리 정치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모두에 대해 ‘평등한 존중과 관심’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누구의 의견도 배제되지 않고 모두의 의견이 동일한 가치를 갖고 최종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반영되어야 한다. ‘다수의 전횡’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도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국회는 이런 민주적 정의의 원칙에 맞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 지금 우리 국회의 구성은 바로 그런 원칙에 제대로 부합하지 않아서 정치개혁이라는 과제가 제기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나아가 이런 원칙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합리적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통상적인 민주주의 절차인 의회 안의 ‘단순 다수결’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두자. 개헌이 단순다수결의 대상이 아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선거제도 또한 여야 합의 없이는 사회적 혼란을 불러 올 수 있다는 건 현행 선거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민주당이 주도해서 어떤 안을 만들어 다시 ‘패스트트랙’에 태우고 다수결로 의결하는 일을 반복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건 민주당의 정치적 자살행위가 될 것이다. 무언가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김진표 의장이 나름의 방식과 절차를 제시하긴 했다. 선거제도 개혁과 관련해서는 정개특위가 복수의 안을 만들어 내면 의원 전원 토론에 붙여 끝장을 보겠단다. 그러나 결국 관건은 여야의 지도부와 의원들이 흔쾌히 그런 제안에 동의해 주어야 한다는 건데, 쉽지 않아 보인다. 설사 정개특위가 그럴듯한 안들을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근본적인 이해관계가 다른 여야 정당들과 의원들이 무슨 끝장 토론 같은 걸 통해 선거제도를 확정 짓겠다는 건 사실 누가 들어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개혁을 가로 막고 있는 근본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서 그렇다.
그래도 나는 김의장이 선거제 개혁과 개헌 문제를 함께 묶어 해결하자고 제안한 데 대해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또 김의장은 개헌 절차와 관련하여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자고 제안했는데, 이 또한 동의한다. 다만 나는 그런 공론화위원회를 선거법 개정에도 도입했으면 좋겠다. 사실 애초 캐나다에서 최초로 실험된 이런 위원회는 다름 아닌 선거법 같이 여야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안을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고안되고 도입되었다.
나아가 이런 위원회의 위상과 성격을 좀 더 무게 있게 ‘시민의회(citizen assembly)’라고 하고 이 시민의회가 두 문제 모두의 해법을 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러니까 우리 국민 전체의 표본을 추첨의 방식으로 선발해서 조직되는 평범한 시민들의 회의체가, 문제되는 현안들에 대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심도 있게 숙의하여, 민주적 정의의 원칙에도 부합하고 관련 당사자들 모두가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해법을 찾게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민의회를 구성하자는 결정이나 시민의회가 내 놓은 안에 대한 최종 의결은 국회가 해야 한다. 시민의회가 심의할 선택지들도 국회가 제안할 수 있다. 개헌과 관련해서는 국민투표도 필요할 것이다. 시민의회가 최종 심급은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새롭게 정치체제를 구성하는 일을 자기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정치인들에게만 맡겨둘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국회의원들의 권한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평범한 시민들이 말하자면 공정한 심판관이 되어 우리 정치공동체 전체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안을 찾아내도록 하는 게 대의 민주주의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국회로서는 여러모로 쉽지 않은 결정이 될 것임을 안다. 올해 4월 10일까지라는 선거법 개정 시한 같은 것도 지키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정치개혁에 대한 필요를 만들어 낸 지금의 극한적인 ‘전쟁 정치’의 현실이 이 시민의회를 통해 해법을 찾자는 최소한의 절차에 대한 합의조차 근본적으로 방해할 것임도 틀림없다. 여야 모두 온갖 차원에서 정치적 계산기를 두드려 보느라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개혁 과제를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는 긴급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 정치의 혼란, 아니 사실상 정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지금의 상황이 나라를 깊은 나락으로 몰아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개혁은 단순한 개혁이 아니라 정치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기본 체제를 비로소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정치권이 그런 개혁을 할 역량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의지와 진정성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조건과 환경이 문제다. ‘시민의회’라는 우회로가 필요하다. ‘정치인들’의 결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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