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미래’와 농업혁명의 거짓 신화
[김경은의 ‘신화의 시대, 시대의 신화’] 기후위기로 시작된 ‘식량 위기’ ‘곡물의 신’은 농업혁명의 주인공 상징 인구수 조절 실패· ‘죽으라 노동’ 부작용 농업혁명을 억지 신화로 만든 것 아닐까
농경문화마다 등장하는 ‘곡물의 신’
기후 변화와 인류의 위기를 말하는 요즘, 식량의 무기화에 대비한 미래산업으로 농업이 떠오르고 있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위기 국면으로 들어섰다고 진단하는 기후학자들에 따르면 농업은 미래산업이 아니라 당면한 문제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부터 인류는 정착 생활로 전환했다고 알려져 있다. 농경이 메소포타미아를 기점으로 뻗어나갔다던 종래의 학설은 각 지역에서 자생했다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에 따르면 먼저 시작한 곳이 좀 더 우월한 문명이고 나중에 발생한 곳은 처진 문명이라 말할 수 없다. 문화 양식은 지역의 환경이나 사정에 따라 결정되는 현상적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인구는 급속히 늘기 시작했으며 특히 아시아의 인구 밀도가 유럽을 압도하는 이유로 쌀농사를 꼽는다. 첨단농법을 쓰지 않더라도 일찍부터 삼모작이 가능했던 동남아시아의 수량 풍부한 몬순지대는 밀을 재배하는 유럽의 생산력에 비할 바 아니었다. 아시아나 유럽이나 어찌 됐든 인구는 증가했는데 유목민에게 개체수 조절은 부족의 존폐를 결정하는 중요 요인이었지만 정착민은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유화’신화는 농경문화 탄생 이야기
인류에게 대사건이었던 만큼 경작지를 일구기 시작한 증거는 여러 민족의 신화에 직간접적으로 남아 있고 이를 선도한 주인공은 ‘곡물의 신’이라는 상징적 타이틀을 얻었다. 이번 글에서는 지난번에 다룬 고구려의 시조모(母) 유화의 에피소드 가운데 곡물의 신 자격을 얻은 시퀀스를 소개하면서 농경과 인구 문제를 이야기해보겠다.
해모수를 따라 승천하지 못한 유화를 아버지 하백은 용궁에서 쫓아냈는데 이를 거둬들인 이가 동부여의 금와왕이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유화는 별궁에서 햇빛을 받아 주몽을 임신하고 낳아 길렀다. 알에서 태어나 특별한 신분임을 입증한 주몽은 활쏘기 재주까지 출중해 함께 자란 왕자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서러움에 어머니한테 하소연하며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물었고 출생의 비밀을 듣고는 한껏 고무된다. 새로운 땅으로 떠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결심에 이른 주몽을 유화는 격려한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건국을 위한 구체적 지혜를 주는데, 씨앗이 든 ‘주머니’를 건넨 일이다.
평소 따르던 이들과 함께 떠나는 주몽이 씨앗 주머니를 어떻게 챙겼는지에 관한 일화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서 각각 다르게 전한다. 받았다는 이야기까지는 두 기록에 공통으로 등장하지만 <동국이상국집>은 이를 좀 더 자세히 다룬다.
한동안 말을 달려 동부여에서 멀어진 주몽 일행이 쉬는 동안 멀리서 비둘기가 날아왔고, 주몽은 어머니가 보낸 전령임을 알아차린다. 주몽은 비둘기를 내려 즉시 배를 갈랐고 그 안에서 잊고 온 씨앗을 꺼냈다. 구삼국사를 참고한 이규보는 이 장면을 ‘동명왕 편’에 챙겨 넣어 이야기성을 살렸을뿐더러 유화의 역할을 확실하게 새긴다. 유학자인 김부식이 가부장적 왕권 의식으로 건국사에 초점을 맞췄다면, 뛰어난 문장가였던 이규보는 될수록 원(原) 텍스트를 살리고 문학성에 집중한 것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구삼국사를 이규보(1168~1241)보다 앞선 세대였던 김부식(1075~1151)도 참고했을 가능성이 높다(김종대, <주몽신화>의 유화행동을 통해본 문화변화양상에 대한 일고, 2011). 구삼국사가 주몽이 아니라 유화를 주인공 삼았을 가능성을 근거로 해당 시퀀스는 ‘수렵이나 유목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남긴 것’이라고 김종대는 해석한다. 백성의 경작으로 세수 시스템을 갖춘 위엄을 대외에 천명하는 의도가 담긴 것이다.
농업혁명은 인류를 발전시켰을까
그렇다면 정말로 농업국가는 인류의 발전 또는 진보를 가져왔을까?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역사를 어느 시기까지 끊어서 평가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국가 체제가 들어선 뒤로는 왕, 정부 관료, 병사, 사제, 예술가처럼 극소수의 사람들만 이득을 보고 대다수의 개인은 고통스런 노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풍요는 미래로, 미래로 지연되었다”고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반란으로 국가는 전복되고 시대의 큰 흐름을 타고 체제가 여러 번 바뀌면서도 국가 형태의 공동체가 유지된 것은, 그들을 하나로 묶는 ‘상상의 질서’, 바로 신화(특히 건국신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까운 역사에서는 혜택을 못 받았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축적된 열매를 아주 후대인 우리 시대에는 확실히 따 먹고 있긴 하다. 당시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 정세와 국가 발전의 과정에서 보면 고구려의 농경문화 확립은 고대국가로 도약하는 발전이 맞다.
그러나 다니엘 퀸의 소설 <고릴라 이스마엘>(평사리, 2004)은 이러한 ‘인간 중심주의’를 비판한다. 소설에서 주인공 이스마엘(고릴라 종족)은 ‘카인과 아벨’,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를 뒤집어 고대 인류의 역사에 감춰진 비밀을 들려준다. ‘역사상 최대의 사기’(하라리, 사피엔스)라는 농업혁명이 인간을 어떻게 괴롭혀왔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된 신화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 기만해왔는지 아주 구체적인 내러티브로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미국 작가인 다니엘 퀸은 문명화 실험이 얼마나 심각한 오류와 폐해를 낳았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 문명은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지 등의 문제를 다뤄온 작가다.
소설에서 고릴라의 이름 ‘이스마엘’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이사악의 이복형제로 아브라함의 아들이자 팔레스타인의 조상이 되는 인물과 동명이다. 이스마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나는 그만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중학교 때 아주 잠깐 친구 따라 교회를 들락거리던 시절, 구약 설교를 어설프게 졸다가 듣다가 하면서도 분명하게 품은 의문 하나가 있었고 그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왜 야훼는 카인의 첫 곡식을 거부하고 아벨이 키운 양의 수확물(첫 새끼한테 얻은 기름)은 받은 거야?’
발전은 선(善), 퇴보와 정체는 악(惡)으로 받아들인 성장 제일주의 시대의 키즈답게 농부(善)가 바친 수확을 거부하는 신을 그때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목사님에게 그 문제는 강연 포인트가 아니었던지 스킵했고 나는 의문을 몇십 년 묵혀온 것이다.

고릴라가 본 인간의 농업혁명
이 소설에서 고릴라인 이스마엘은 인간을 앞에 두고 ‘너희 어머니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농업혁명 이후 인구가 팽창하는 바람에 더 많은 식량을 조달한답시고 이웃한 유목민의 영토를 침범하고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인간을 ‘역할 맡은 자(taker)’와 ‘역할 맡지 않은 자(leaver)’로 구분하는데 한 줄 요약하자면 각각 경작자와 유목민의 기표인 카인과 아벨의 ‘살인사건’은 taker가 leaver를 정복한 역사다. 그러니 유목민 시대의 역사를 경작민에 포섭된 우리 후손은 (심지어 목자까지) 알맹이는 쏙 빼놓고 기억하는 우려할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역사는 기억하는 이들의 것이라지만 기록에서 기원은 지워지고 글자만 남아버린 것 아닌가.
이스마엘은 계속해서 들려준다. 이브의 권유로 아담이 딴 선악과는 (농업혁명을 가져올) ‘지식의 나무’였다. 그 후과로 인간은 보름이면 사나흘이나 일하고 놀던 라이프스타일에서 ‘죽어라 일해도 모자라’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인류는 게다가 개체 수 조절을 폐기함으로써 이브를 인구 증가의 도구로 만들고 출산의 고통을 짊어지게 했다. 이것은 우리가 굳게 믿는 고대국가와 문명 건설신화에 감춰진 비밀이요, 신화의 배신 아닌가?
잘못된 진보의 길을 걸은 건 아닐까
고령화와 인구 감소는 국가 위기를 부른다지만 고릴라 입장에서 볼때, 개체수 조절에 실패한 인간의 숫자는 많아도 너무 많다. 경제 발전 단계가 높아질수록 인구가 줄어드는 현상으로 보아 인구 감소는 시간차를 두고 전 지구에 퍼질 게 분명하다. 그러니 정책으로 지연할 수는 있을지언정 생성-소멸 과정을 겪는 농업혁명의 커다란 사이클에서 인구 감소는 되돌릴 수 없는 필연적 단계 아닐까. 물론 문명화 바람이 지구를 몇 바퀴 돌면서 발전의 혜택을 단 한 구석도 남겨두지 않고 지구 곳곳에 미칠 때야 비로소 인구 감소는 완성될 것이다.
다만 전 우주에 생명체는 있어도 지적생명체는 호모사피엔스가 유일할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천문학자들은 농업혁명 이래 산업혁명과 온갖 혁명을 거쳐 현재에 이른 호모사피엔스의 의미를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부와 지식을 고도로 축적한 결과,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주의 존재와 역사를 규명하고 알아봐 주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잘못된 진보의 길을 걸어왔을지언정 인류의 존재 의미는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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