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엔딩으로 끝날 만큼 ‘세상은 단순하지 않아’
[김경은의 ‘신화의 시대, 시대의 신화’] 구비전승된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 아킬레스처럼 ‘단 하나’ 부족했던 영웅 우투리 ‘콩’과 ‘갈대’, 민중의 강인한 생명력 극적 표현 ‘졌잘싸’ 세상, 아쉽지만 서로 아파하는 공감을
구비전승 설화에 있는 ‘졌잘싸’
아, 그것만 갖췄더라면! 살면서 되돌릴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을 누구나 겪어보았을 것이다. 만반의 준비가 돼 있었(다고 보았)는데 사소한 실수 하나로 놓치는 아쉬운 기회 말이다. 스포츠 경기에서 대중은 이를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로 선수들에게 격려와 찬사를 보낸다. 정해진 시간 동안 관람하면서 경기력뿐 아니라 임하는 자세나 과정 등을 지켜보기 때문에 가능한 평가다.
구비전승에서 ‘졌잘싸’는 ‘모든 걸 다 갖췄는데 그거 딱 하나가 모자라네’ 하고 탄식하게 만드는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아주 완벽했는데 누가 알았겠어? 그게 빈틈일 줄이야”하는 식으로 스토리텔링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이야기 가운데 「우투리」 설화가 있다. 「우투리」는 제7차 개정 교육과정으로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실렸고, 그만큼 인지도가 높아져서인지 2021년 동명의 웹툰(이재헌 글/임재헌 그림)으로도 그려진 바 있다. 필자는 이 설화를 친구인 김석희 교수에게 들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가 나한테 들려주었으니 민간에 구전되는 그야말로 살아 있는 이야기 현장이었다. 「아기장수」만 알고 있다가 접한, 디테일 살아 있는 설화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친구의 아버지에게서 친구에게로 다시 내게로 전해진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기장수 ‘우투리’ 이야기
어느 마을에 아기가 태어나는데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았다. 아이는 ‘우투리’라는 이름을 얻었고, 자신의 비범성을 입증이라도 하듯 탄생에 얽힌 비화도 지녔다. 어떻게 해도 끊어지지 않던 탯줄을 지나가던 할머니가 갈대로 치고 나서야 떨어져 나갔다는 것이다. 우투리는 장차 영웅으로 자라 왕이 되리라는 소문이 퍼졌고 왕의 귀에까지 닿아, 목숨이 위태로워진다. 이를 예견이라도 한 듯 우투리는 어머니께 갑옷을 만들어달라고, 혹은 대피해서 먹을 식량으로 콩을 볶아 달라고 청한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콩을 볶는데 이때 튀어나온 콩알 하나를,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생각 못 한 채, 우투리는 무심히 집어먹는다.
항상 비극은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옮긴 행동에서 시작해 화가 닥친다. 엄마가 만든 갑옷은 훌륭했지만 겨드랑이 쪽이 비어 ‘아킬레스건’처럼 약점으로 작용한 것이다. 바로 우투리가 집어먹은 콩 한 알만큼 겨드랑이에 구멍이 생겼고 적의 화살이 우투리의 겨드랑이에 박히며 죽음을 맞이한다. 탐관오리의 폭정에 시름겹던 백성은 새 세상 맞을 기회를 놓쳤다고, 하소연하듯 「우투리」 비극을 널리 전승한다.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죽음 이후로 연장한 우투리 설화의 버전도 있다. 우투리가 죽기 전에 콩 한 되를 무덤에 같이 넣으면 훗날 다시 만난다는 말을 남기자, 어머니는 그대로 이행하는 사연이다. 그런데 이 일이 우투리가 살아 있다는 소문으로 번져 왕의 귀에까지 들어간 걸 보면, 최고 권력의 정상을 지키려는 전전긍긍이 얼마나 집요하고, 백성의 삶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지 탄식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득달같이 달려와 우투리의 어머니를 협박한다. 아버지의 목에 칼을 대고 자백을 강요해 우투리의 비밀을 끝내 알아내고야 만다. 대체로 알려진 버전(부재한 아버지)과 달리 아버지가 등장하는 걸 보면, 재담꾼인 친구의 아버지가 극적 요소를 더하기 위해 상황을 지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일은 구비전승에서 비일비재하며 이야기에 살과 피가 붙어 어떻게 확장하는지 그 양상도 보여준다. 대부분의 버전에서는 어머니가 협박에 못 이겨 알려주는 것으로 돼 있으며 왕을 구체적으로 ‘이성계’로 특정한 경우도 있다.
‘갈대’와 ‘콩’의 상징적 의미는
어찌 됐든 우투리가 묻힌 무덤을 알아낸 왕과 군사들은 무덤을 파헤치려 하는데 어떻게 해도 무덤은 열리지 않아 왕의 애를 태운다. 이때 다시 튀어나오는 것이 ‘갈대’다. 중요 요소는 나중에 반드시 재활용된다는 이야기의 법칙(복선)은 여기서도 작동하여 극적 재미를 더한다. 왕은 갈대를 구해다 무덤을 쳤고 갑자기 무덤이 열리자 그 안에 있던 우투리는 낭패한다.
우투리가 준비하던 군사와 말, 무기 들이 바람이 되어 날아가 버리며 민중의 염원이자 우투리의 원대한 포부가 백일몽으로 형해화하는 순간이었다. 우투리는 콩으로 이 모든 신공을 부리고 있던 것인데 이날은 3년에서 하루가 빠지는 날이었다. 하필 안타깝게도 단 하루가 모자라 백성들이 그렇게 바라던 새날, 혁명의 그날은 좌절되고 만다.
「우투리」는 「아기장수」설화이면서 ‘콩’이라는 화소가 덧붙여져 ‘곡류 첨가형’(강은해, 「동아시아 아기장수 설화 전승의 교훈과 그 사회 교육적 의미」, 동북아문화연구 제20집, 2009)으로 분류된다. 「아기장수」설화가 전국에서 310편 정도가 발견되었다면 「우투리」설화는 주로 경기, 전라, 경상, 충청 지역에서 30여 편이 발견되었다(김영희, 한국 구전서사 속 ‘부친살해’ 모티프의 역방향 변용 탐색, 고전문학연구 제41집, 2012). 「아기장수」의 기본 플롯에 첨가된 형태라는 점에서 「아기장수」 설화 이후에 디테일을 덧붙여 흥미진진하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비극으로 끝나는 이 설화들에서 아이들은 역설적으로 희망과 실패하지 않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강은해는 말한다. 그런가 하면, 김영희는 부친살해로 기성세대를 극복하고 세계를 이끌어가지 못한 채, 아버지 세대가 아들 세대를 살해함으로써 가부장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순간, 어머니와 아들의 대결이 예고돼 있으며 아버지로 표상되는 세계의 그늘에 고착된다고 얘기한다.
김영희의 이 논평은 최근 아시안컵 대회 기간에 불거진 선후배 갈등 스캔들을 잘 설명해준다. ‘항명’, ‘하극상’이라는 말로 ‘후배’를 가차 없이 징치하라는 이들의 연배를 보면 대개 선수의 아버지 벌, 할아버지 벌이다. 이러한 ‘아버지 세대’의 분노와 마녀사냥은 우리 사회에서 진즉에 떠났어야 할 가부장이 유령으로 떠돌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글은 ‘이야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므로 언급만 하고 넘어가려 한다.
왜 하필 콩이고 갈대였을까? 콩과 갈대가 가진 특성을 보면 이것은 어렵지 않게 해석된다. 신데렐라 유형의 민담에서 콩은 저승을 나타내며 부활, 재생의 의미를 띤다(필자의 지난 칼럼 「인어공주, 신데렐라, 그리고 PC한 현대신화」에서 다뤘음). 이 유형에 속하는 우리의 설화 「콩쥐팥쥐전」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이 ‘콩쥐’다. 특히 콩쥐를 괴롭히는 안타고니스트(주인공에 대립하는 인물-편집자주)의 이름 ‘팥쥐’의 ‘팥’(작고 예쁜 색깔의 곡류)과는 대척점에 있다. ‘콩’에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굳센 생명력과 재생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들어있다.
실제로 춘궁기를 겪는 민중에게 콩은 귀중한 식량이면서 그것 자체로 씨앗이다. 땅속에 던지기만 해도 발아해 잘 자라주는 세계를 품은 우주다. 갈대 또한 비슷한 의미의 식물로, 시인 김수영이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도 더 빨리 일어난다’고 노래한 ‘풀’처럼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며 울지만 강한 생명력으로 습지에서 자라난다. 게다가 빗자루, 바구니, 문발, 지붕의 이엉, 밧줄 따위의 온갖 살림 도구로 이용되는 요긴한 식물이다. 콩과 갈대는 흔하면서 질긴 생명력으로, 화려하지 않아 부담 없이 민중의 삶에 깊이 스며든 식물이다.
단 하나 모자라는 결핍, 인간 드라마의 생명력
단 하나가 모자라 성공하지 못하는 설화는 한양 도읍지를 구하는 전설에도 있다. 무학대사가 조선의 서울을 정하러 전국을 떠돌다 부평에 이른다. 넓고 기름진 평야가 있고 한강이 가까워 봉우리(또는 골짜기)를 세어보는데 백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아흔아홉 봉우리였다. 아깝다, 하나만 더 채웠으면 도읍지거늘 아무리 세어도 아흔아홉이라 원통해하던 자리가 ‘원통이 고개’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인간과 결혼한 테티스가 그녀의 아들 아킬레우스를 스틱스 강에 혹은 불구덩이에 담가 단련시키지만 딱 한 군데 빈틈이 존재했던 것처럼, 아쉬움(결핍)은 인간의 오랜 드라마 요소이며 생명력이다. 다시 말해 단 한 톨도, 단 하루도 모자람을 용납하지 않는 상태는 완벽하지만 움직임이 멈춘 죽음의 상태다. 세상은 멈춰 있지 않으며 그래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 눈물을 흘려도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다. 해피엔딩 드라마는 희망을 주지만 살아볼 만큼 산 민중의 사유는, 닫힌 결말의 완벽(죽음)한 이야기에 전승을 고착시킬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따라서 이렇게 간단하지 않은 상징적 모티프를 장착한 설화 「우투리」가 고작 ‘최선을 다하고 다하라’(낭패하지 않으려면 사소한 일에도 신경 써라)는 교훈만을 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쉬워하며 서로서로 가슴 아파하는 공감(그리고 때로는 애도로 나아가는)이 이 설화의 면모 아닐까? 즉자적으로 터득한 깨달음이 행동으로 옮겨지기엔 세상에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있는가? 단순하게 움직이기엔 세상은 녹록지도, 또 우리의 의지는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다는 것을 ‘어리석은 백성’은 알지 않겠나.
태반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딱 한 알, 딱 하루가 모자라 죽었고 부활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사람들 애간장을 태우면서, “알겠니? 세상은 그런 곳이야”라고 그냥 보여주기로 말해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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