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자가 본 ‘영화 엘리멘탈’...기발함 번뜩
[정연섭의 과학과 철학] ‘영화 엘리멘탈’, 과학이야? 로맨스 영화야? 어떤 세계에서도 사랑을 막을 규칙은 없어 공존못할 물과 불, 기포로 극복한다는 교훈
지난 주에 디즈니 영화 ‘엘리멘탈’이 개봉됐다.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시간에 아내와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 피곤한 아내가 졸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주인공 앰버의 이야기를 보느라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영화의 긴 이야기를 줄이면 ‘엘리멘트 시티’라는 곳은 물의 인간, 불의 인간, 흙의 인간, 공기의 인간이 살아가는 다민족 공동체이다. 앰버의 부모는 조국을 떠나 엘리먼트 시티로 이민을 왔고 낡은 건물을 개조하여 자리를 잡고 앰버를 낳았다. 불같은 앰버는 간혹 폭발한다. 부모 가게를 이어받기 위해 경영 수련을 받는 엠버는 폭발로 파손된 배관을 타고 들어온 물의 청년 웨이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물과 불은 사랑할 수 있을까
4종족이 사는 엘리멘트 시티에는 서로 섞이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다. 물은 불을 만나면 증발하고 불은 물을 만나면 꺼진다. 접촉으로 손상된 불은 장작을 먹어 힘을 얻고 물은 접촉으로 빠져나간 수증기를 다시 채워야 한다. 흙에 난 풀도 불에 타므로 접촉금지의 규칙은 당연해 보인다. 불 같은 앰버는 물 같은 웨이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서로가 망가질 일만 남았다. 가게를 잇기 원하는 아버지가 결코 허락할 수 없으니 앰버는 갈등한다. 상냥하고 배려심 있는 웨이드의 노력에 둘은 용기를 내어 손을 잡고 키스를 감행한다. 물과 불의 키스로 거품이 일어나지만 둘의 형상은 유지된다. 다행이다. 사랑은 규칙을 이겨낸다.
사실 서로 섞이지 못한다는 규칙은 허점이 많은 규칙이었다. 형상을 유지하려고 도입한 경험적 규칙이지만, 에너지나 감정의 교감을 고려하지 못했다. 사랑의 느낌도 접촉이다. 접촉해선 안된다는 비접촉의 규칙이 본능에 기초했다면 엠버와 웨이드가 첫 눈에 호감을 느끼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에너지를 전달하는 방법
물질 세계에서는 접촉 경계에서 물질과 에너지가 늘 섞인다. 대체로 물질이 섞이면서 에너지도 함께 전달된다. 찬물과 더운물을 섞으면 에너지도 함께 전달된다. 그러나 에너지 전달은 물질의 관여 없이도 일어날 수 있다. 태양은 허공으로 열과 빛을 보내주고, 전력은 전선을 타고 들어온다.
기포는 물을 증발시키지 않으면서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열을 전달하는 방법이다. 앰버의 열을 받자 웨이드의 몸속에는 사랑의 기포가 일어난다. 앰버와 웨이드의 성공적인 짝짓기는 기포에 달려있다. 물론 기포의 열 전달에 한계는 있다. 개방된 공간에서는 기포를 통해 열을 식힐 수가 있지만 폐쇄된 공간에서는 결국 물이 증발될 수밖에 없다. 탑에 갇히게 된 앰버와 웨이드는 기포를 식힐 방법이 없으므로 웨이드가 수증기로 사라진다.
세상에서도 과학에서도 사랑의 전달 방정식은 별도로 없지만, 사랑도 경계면을 통과해야 한다. 무생물 간에 전달되는 물질과 에너지에 비해, 생명체가 교감하는 사랑은 다르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고귀한 사랑이 세속적인 에너지와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사랑도 에너지이다. 인류 문명사는 항상 신비한 사랑의 전달 방정식을 찾았다.
최초의 자연 철학자 탈레스는 세계는 물로 이뤄져 있다고 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로 이뤄져 있다고 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불로 보았고 헤시오도스는 흙으로 보았다. 하나씩 원소가 추가되다가 엠페도클레스는 근본 물질을 4개 원소로 정리했다. 그러나 그들은 4원소만으로는 정신적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음을 곧 알아챘다. 플라톤은 4원소로 만들어진 육체에 하늘에서 영혼이 내려와 인간이 태어난다고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 하늘보다는 아버지의 정자로 영혼을 물려받는다고 보았다.
2000년이 지나고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하고 맥스웰이 전자기력을 발견하면서 진보적 철학자들은 영혼과 정신이 만유인력과 전자기력 같은 힘 혹은 에너지라는 생각을 했다. 공산주의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은 정신을 물질에서 파생된 소산으로 본다. 반면 자본주의 철학자들은 입장을 유보했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유물론은 힘을 얻었다. 추론하는 인공지능까지 물질과 에너지로 작동하니 이제 정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사랑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사랑은 에너지의 변형이고 승화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미시 세계로 들어가면 근본적 물질과 근본적 힘이 있다. 근본적인 물질이 원자가 되고 분자로 성장하면서 근본적인 힘도 수소결합이 되고 ‘반데르바알스 힘’으로 변환된다. 분자가 모여 세포가 되고 인간이 되면서 반데르바알스 힘은 사랑과 증오의 힘으로 승화된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진실에 가깝지만 근본적인 힘을 무시하고 물질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한계가 있다. 세상은 원래부터 이원적인 요소인 물질과 힘이 함께 작용하고 있으며 고귀한 사랑은 물질보다는 힘의 변형이다.
에너지가 불과 물 사이에 전달되듯이, 이제 사랑도 앰버와 웨이드 사이에 싹틀 수 있다. 사랑은 눈으로 전달되고 가슴에서 멈춘다. 서로 섞일 수 없다는 엘리멘탈 시티의 경험적 규칙은 물질의 섞임을 막을 수는 있지만 승화된 에너지 즉 사랑을 막을 수는 없다. 상반된 물질의 성질을 지녔으니 사랑은 오히려 더 끌린다.
사랑이 에너지의 변형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자들도 많다. 소립자를 꿰고 있고 양자역학 문턱을 넘고 통계역학을 지나야 사랑의 본질을 깨우칠 수 있는데 양자역학이 어렵다.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도 이 문턱을 넘지 못한 과학자이다. 양자 역학이 태어나는 시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비상식적인 논쟁에서 통찰을 얻어 그리스의 4원소로 되돌아가 상상 나래를 펼쳤다. 그는 과학철학을 공부하고 학생을 가르쳤지만 결국 시인으로 전향했다. 그는 사랑을 과학으로 해석할 기회를 놓치고 사랑을 상상력으로 보는 시의 길, 예술의 길을 열었다. 그가 원했던 세계가 엘리멘트 시티였다.

아이들은 어느 장면에서 낄낄댔을까
시인과 예술가는 과학자가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볼 수 있다. 필자는 사랑이 에너지의 변형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엘리멘탈 화면에 나타나는 재치와 해학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었다. 모래를 녹인 유리로 물 새는 둑을 막고 열쇠구멍을 통과하는 웨이드의 장면을 필자는 상상할 수 없었다. 순간순간 화면을 보며 깔깔대는 아이들의 웃음은 의미를 몰라 하는 필자를 주눅 들게 했다. 화면에 녹아 있는 기발한 상상은 여러 아티스트들의 협력 덕분이라고 했다.
칸 영향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엘리멘탈은 한국계 미국인 감독(피터 손)의 작품이다. 앰버를 떠나보내면서 부녀가 큰 절을 나눈다. 필자가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한국적 정서가 묻어난다며 뭉클하다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극 중에 놓친 화면의 분풀이를 늘어놓았다. 이민을 갔으면 그곳 문화를 따라야지 한국 문화에 여전히 묶여 있을 이유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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