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인의 스포츠는? 소음, 그리고 문명 창조

[김경은의 ‘신화의 시대, 시대의 신화’] 마야인들, 공놀이로 신을 화나게 하다 자연과 신은 ‘인간의 소란’ 싫어하지만 인간은 서로 부대끼며 ‘문명’을 창조해

영화 '아포칼립토'에서 나오는 마야인.
영화 '아포칼립토'에서 나오는 마야인.

45억 명이 넘는 아시아인의 축제, ‘2022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지난 9월 23일 개최되었다. 출전 선수를 응원하는 사람들의 함성과 탄식이 같은 시간대 아시아 전역에서 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이를 지켜보는 ‘신(神)’들이 있다면 어떤 반응을 나타낼까?

신들은 소란을 싫어한다

수메르 왕조의 신화를 담은 『길가메시』를 보면 하계(下界)의 소란이 신들의 응징을 불러왔다. 인간 숫자가 불어나면서 불평불만이 많아지자 신들이 견디다 못해 큰 비를 내린다. 불평과 민원은 오늘날 아파트 생활을 주로 하는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심하면 아래위층 사이에 칼부림으로 번지는 불행한 사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인간이 큰 무리를 이루면서 시끄럽고 무질서해지고 신들마저 노하는 과정에서 ‘소란’ 또는 ‘소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마야인의 성서 포폴 부』(고혜선 편역, 여름언덕, 2005)에는 마야인의 ‘층간소음’ 문제가 등장하는데, 소음의 원인은 인간의 공놀이였다. ‘포폴 부’는 ‘공동체의 책’이라는 의미로, 우리나라에서 ‘뽀뽈 부’라는 표기와 혼용되어 쓰인다. 고유명사를 현지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면, 이 책 『뽀뽈 부(Popol Vub)』는 끼쩨 왕국(지금의 과테말라 내륙에서 16세기까지 번성한 마야의 한 부족)에 구전하던 신화, 종교, 역사, 천문학을 라틴 문자를 차용해 끼쩨어로 집대성한 책이다. 마야문명은 기원전 1500년경부터 17세기까지 번영한 중앙아메리카의 문화권을 말한다.

마야인들은 공놀이하다 벌 받아

쌍둥이 형제 우나뿌와 스발란께는 문제의 공놀이 때문에 지하세계의 신들에게 소환당한다. 신들은 자신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들이 괘씸해 불러다 죽일 속셈이었다. 지하 여정엔 깎아지른 계단, 계곡과 강이 이어졌고 마침내 빨강, 노랑, 하양, 검정의 네 갈래 길이 나온다. 그중 지하세계로 통하는 검정 길에서 이들이 수행할 미션은 좌정한 신들 가운데 가짜인 인형을 가려내고 진짜 신들의 이름을 맞히는 문제였다.

우나뿌와 스발란께는 먼저 모기를 파견해 상황을 파악하고 이 관문을 통과한다. 모기가 차례로 물면 나무로 만든 인형들은 반응하지 않는 데 반해 살과 피가 있는 신들은 비명을 질렀고, 옆에 있던 다른 신이 반사적으로 이름을 불러 안부를 물어준 까닭이다.

쌍둥이 형제가 이런 꾀를 낼 수 있던 것은 아버지 대에 이어 같은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인 운 우나뿌와 삼촌인 부꿉 우나뿌도 공놀이를 하다가 소환당했다. 명목상 공놀이 초대였지, 검정 길에서부터 함정이 대기하고 있었다. 형제의 어리숙한 행동에 신들은 박장대소했고, 형제는 추위의 집, 불의 집, 칼날의 집 같은 형벌의 집에 들어가 시달렸으며, 무방비 상태에서 강요된 요구 사항을 지키지 못했다. 공놀이는 시작도 해보지 못한 채 목이 잘렸고 아버지 운 우나뿌의 머리는 나무에 걸리게 된다.

이 와중에 스뀍이라는 처자가 ‘운 우나뿌 나무’를 찾아가 임신을 한다. 생전 열린 적 없던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다는 소문을 듣고 열망에 들떠 찾아간 스뀍의 손바닥에 운 우나뿌가 침을 뱉은 것이다. 열매의 정체는 옥수수였으며, 지상으로 추방된 스뀍이 쌍둥이 우나뿌와 스발란께를 출산한 것은 운 우나뿌의 부활을 의미한다. 그의 쌍둥이 아들은 지하세계와 연결되어 능력을 갖춘 영웅으로서 온갖 음모를 물리쳤고 신들이 나서서 애원하는 공놀이 시합에서도 승리했던 것이다. 아버지 세대에서 아들 세대, 신들까지 발 벗고 나서서 열중하던 공놀이는 무엇이었을까.

신과의 경쟁, 문명을 만들어내다

우나뿌와 스발란께 쌍둥이 형제는 낮에는 공놀이를 하다가도 밤이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고문의 집에 들어가야 했다. 무사히 빠져나오는가 싶더니 마지막 관문에서 우나뿌의 목은, 박쥐의 공격을 받아 댕강 잘려 나간다. 신들은 그의 머리를 공놀이장 위에 걸어둔 채 경기를 재개했고 어디선가 돌연 튀어나온 토끼가 놀이 공을 몰고 가는 바람에 선수와 관람객 모두 뒤를 쫓아 경기장을 이탈한다.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공을 찾아 돌아왔을 때 신들은 다시 혼란에 빠지고 마는데, 잘려 나간 머리가 우나뿌의 몸에도 공놀이장 위에도 달려 있던 것이다. 물론 공놀이장 위의 머리는 거북을 가지고 그럴듯하게 위장한 것이었다.

이렇게 온 지혜를 발휘한 쌍둥이의 승리는 그들의 아버지 운 우나뿌를 ‘옥수수신’으로, 마야인의 선조로 좌정시켰으며 ‘공놀이를 하는 사람’은 ‘마야의 왕’을 의미했다(정혜주, 「고전기 마야 문명 공놀이의 주인공들」, 『스페인어문학』 제59호).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쌍둥이는 스스로 모닥불로 뛰어들었고 이들의 뼛가루는 강에 뿌려졌다. 이는 신들이 포기하지 않으리란 예측에 따라 쌍둥이가 내린 결단이었으며 이후 청년으로 환생한다. 얼마 뒤 청년들은 비루한 늙은이의 모습으로 신들 앞에 등장해 온갖 묘기를 부렸고 흥이 오른 신들은 자신들을 희생물로 바친 뒤 부활시키라고 명령한다. 이로써 이들의 모험기도 마침내 대단원으로 달려간다.

신들을 물리친 쌍둥이는 공놀이장에 있는 제단에다 아버지 형제의 제사를 지냈고, 그뒤 승천해서 해와 달이 된다. 이 대목에서 알 수 있듯 공놀이는 매일 뜨고 지는 천체의 움직임을 의미하며, 목이 잘리는 죽음이 있어야 재생도 가능하다는 자연의 이치를 보여준다. 정혜주에 따르면 지하로 떨어진 우나뿌의 머리가 그 세계를 뒹구는 동안 스발란께는 신들과 맞서 이기고 지상으로 솟아올라 옥수수를 키울 수 있게 된다.

공놀이장과 관람객, 여기 동원되는 고리, 장갑, 공 따위의 장비들만 봐도 이 사회가 문명사회임을 알 수 있다. 공놀이는 왕이 주도하는 제전이었지만 일반인들도 이러한 행사를 치렀다. 공놀이를 즐기는 문화는 라틴아메리카의 축구 열풍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왕족의 의례에서 백성들의 놀이로 퍼져나가며 공 하나만으로도 즐기는 버전으로 변형될 수 있는 일이다.

공 하나만 있으면 사람들이 무리 지어 발재간을 선보이고 이를 구경하려 모여드는 사람들의 함성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다. 문명사회는 시끄럽게 마련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자연은 조용하다는 의미일까?

독침을 쏴 동물을 잡는 아마존의 인디오.
독침을 쏴 동물을 잡는 아마존의 인디오.

자연에 반하지만 소란한 인간을 위한 축제

루이스 세풀베다(1949~2020)가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에게 헌정한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열린책들, 2001)에서는 자연의 성격을 한마디로 단정하진 않는다. 다만 자연의 최대 적으로 ‘소란’을 지목했다. 그는 오지 여행 경험을 소설에 반영하고 있다.

주인공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는 남 말하기 좋아하는 이웃들을 피해 정부가 제안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 수아르족 인디오와 친해지고 아내와 사별한 뒤에는 ‘수아르족이 아니면서 수아르족’으로 살아간다. 간결하지 못할뿐더러 자칫 요란해 보이기까지 한 이 이름, ‘수아르족이 아니면서 수아르족’ 은 인디오들이 그에게 붙여준 이름이었다. 완전한 수아르족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서운한 마음도 있었지만 나중에 볼리바르는 그들이 옳았음을 인정하게 된다.

둘도 없는 단짝 누시뇨가 백인 노다지꾼에게 살해당했을 때 이 노다지꾼을 처치한 볼리바르는 수아르족이 보인 반응에 당황했다. 아무리 원수일지라도 정정당당히 맞설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비겁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들의 논리는 이랬다. 요란한 물건인 총을 겨눠 목숨을 빼앗으면 자기들 종족인 누시뇨는 평온히 저세상으로 떠나지 못하고 떠돌면서 여기저기 부딪치고 소란을 일으켜 밀림을 들쑤실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의 사냥이 방해받을 거란다.

수아르족이 야생에서 살아가는 비결은 자연의 성질을 알고 순응하는 데 있었다. 밀림에서는 다들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움직이며 살아가는데 천박한 양키의 물건을 동원해 밀림의 고요를 깨는 행위를 수아르족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들이 왜 자기를 완전한 수아르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그는 문명으로 돌아와 살면서 사무치게 되새기며 노년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양키의 총에 짝을 잃고 미쳐 날뛰는 살쾡이를 정면 대결하여 교감하고 우정을 나눌 기회를 맞이한다. 다시는 수아르족의 세계에 돌아갈 수 없지만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적기를 맞아, 노인은 총이 아닌 입으로 부는 화살을 이용해 살쾡이의 최후에 예의를 지킨다.

이상에 따르면 신(=자연)은 절제를 모르는 인간의 문명에서 발생하는 소란(소음), 그로부터 훼손되는 환경을 못 견디는 게 분명하다. 어찌됐든 ‘소란’한 아시안게임은 진행중이고, 현대 스포츠가 전쟁을 대리하는 제전인 만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가는 경기장에서라도 우리 선수들은 물론 아시아의 모든 선수가 자연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장이 되었으면 한다.

글쓴이

김경은 소설가

김경은 소설가는 소설 외에 이런저런 잡글을 쓰는 중. 최근 <나타나다><매일 안녕하세요><마오리전사><애스컴시티> 등을 씀. 신화의 시대, 시대의 신화: 신화는 새롭지 않지만, 언제나 새롭게 읽힌다. 오랜 세월 만들어져 온 신화가 있는가 하면 오늘의 우리가 만들어 가는 신화도 있다. 신화의 시대에서 이 시대의 신화까지를 더듬어 갈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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