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에서 동물은 왜 인간보다 존중받았을까

[김경은의 ‘신화의 시대, 시대의 신화’] 신화속 자연, 동물과 인간에 동등한 ‘무자비’ 현대사회, ‘자비’로 생명연장 기술 발전시켜 무엇이 정말 무자비인가...이태원 참사는 생명 존중하지 않은데서 온 비극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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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생명에 무자비하다

지난 10월 29일은 이태원 참사 1주기였다. 정부의 방관을 넘어선 방해 속에, 책임자 처벌을 위한 진상 규명은 한 발짝도 진전이 없었고 제대로 된 추모와 애도조차 할 수 없는 상태로 시간은 흐르고 있다. 관(官)의 무책임한 행위 앞에서 생명 존중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생태주의 신화에는 ‘생명 존중’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동물과 인간의 격에 구별이 없고, 동물이 오히려 상위에 올 때도 많다. 대칭적 세계관을 기본으로 하는 이들 신화는 기후 위기 시대를 맞아 새롭게 조명받는 인상이다. 특히 미야자키 하야오의 <원령 공주>를 기점으로 아이누 신화는 그 맨 앞에 놓인다. 그런데 이런 생태주의 신화를 보다 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로 생명에 대해 무자비한 경우도 있다. 아이누 신화에서 올빼미 신이 부르는 노래 「콘쿠와(コソクワ)」를 보자.

기근이 들자 세상을 관장하는 올빼미 신(神)은 하늘나라로 파견할 사자를 물색한다. 첫 번째로 젊은 까마귀가 나서지만 사자(使者)로 낙점받지 못했다. 올빼미 신의 얘기를 듣다가 사흘째 들어 졸아버린 것이다. 신은 화가 치민 나머지 젊은 까마귀의 깃털이란 깃털은 죄다 뽑아 죽였다. 두 번째 나선 산어치 역시 나흘째 되는 날, 앞선 지원자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임무를 수행한 영웅은 세 번째로 등장한 젊은 물까마귀였다. 그는 올빼미 신의 말이 끝나는 엿새째 들어 하늘나라로 갔고, 사슴도 물고기도 세상에 내보내지 않는 연유를 들었다. 신들의 화를 달랠 방법은 사슴이나 물고기를 잡을 때 예의를 다하는 것이었다. 여태껏은 필요한 부위만 취하고 남은 머리를 아무렇게나 방치해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있었다. 물까마귀와 담판한 신들은 인간들 꿈에 나타났고, 이후 인간들은 의례용으로 잘 다듬은 나무막대기인 ‘이나우’를 사용해 물고기를 잡았다. 늙은 신 올빼미는 한층 기품을 갖추고 돌아온 물까마귀를 보자, 자리를 물려주고 하늘나라로 돌아갔다.

「콘쿠와」에서 생명을 소중하게 다루라고 계시하는 것도 신들이고, 젊은 까마귀에 산어치까지 잔인하게 죽이는 것도 신이었다. 자격 미달이니 돌려보내면 될 일을, 굳이 털까지 뽑아가며 죽여야 했을까? 그러나 신들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고, 이를 어길 경우 어떠한 처벌도 받아야 하는 것이 규율이고 자연의 섭리였다. 기근을 담판 짓겠다고 자발적으로 손들고 나선 이들이 막중한 임무를 앞두고 고작 사나흘을 못 견뎌서는 곤란했다.

밀림에서 모든 생명은 똑같은 자격이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루이스 세풀베다 作)에서는 이를 ‘냉혹한 원칙에서 나오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밀림 세계의 인간들은 죽음을 죽음 자체의 행위라고 믿었다. 죽음은 참혹한 것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이 말하는 죽음은 이른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밀림 세계의 냉혹한 원칙에서 나온 죽음이었다.”

이 소설에는 안토니오라는 주인공 노인이 살쾡이와 대적하는 대목이 등장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百勝)을 실현하려면, 먼저 대치 중인 적을 이해해야 했다. 노인이 벌이는 사유는 일생에서 가장 가까웠던 이웃, 수아르족의 행위에 근거한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수아르족의 뜻은 살쾡이의 행동과 일치했다. 이 말을 좀 더 풀어갈 수도 있지만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다니엘 에버렛 作)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소개하면 의미가 직관적으로 이해될 것 같다.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의 저자 에버렛은 피다한 족(族)이 있는 아마존 깊숙이 선교사로 파견된다. 그들의 말과 문화를 익혀, 성경을 피다한어로 번역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가족까지 동행해 이들 사이로 무리 없이 스며들면서, 1단계라 할 정착은 성공적이었다. 그들에게 섞여드는 게 1차 관건이던 저자의 가족이 배타성 없는 피다한족의 심경을 거스를 일은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 단계에서 발생했다. 충분히 유대관계를 쌓았을 무렵 이웃에 태어난 아이를 두고 벌어진 신경전이었다.

그들의 2세가 약골인 걸 안 피다한 족 부모는 갓난쟁이를 밖에다 방치했다. 목이 쉬도록 울어도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선교사 신분이 아니더라도, 에버렛 부부는 이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핏덩이를 거둬 보살피자 평생 화 한번 안 낼 것 같던 이웃들은 시비를 걸어왔다. 좋게 말로 시작해서, 에버렛의 보호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급기야 눈에 안 띄는 곳으로 아이를 갖다 버린 것이었다.

‘모든 생명은 자기 몫을 지고 태어난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이들의 생명관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에버렛은 사냥에 동행하면서 그동안 피다한 족의 반쪽만 보아왔음을 깨닫는다. 순둥순둥하다가도 별일 아닌 일로 꼬장을 부렸고, ‘동네 바보형’을 자처하던 그들은 온데간데 없었다. 대신, 매서운 눈초리의 용사들이 그의 눈앞으로 순식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며 밀림을 활보했다. 이는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주인공이 대적하던 살쾡이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꼬리로 허리를 때리면서 유유자적하던 짐승은 숲속을 들락거리며 사방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시야를 교란하고 정신을 홀리려던 것이다.

모음 위주로 구성돼 그렇게나 배우기 어렵던 피다한 족의 언어 체계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경험이었다. 확연히 구분되면서 브레이크 작용을 하는 자음보다, 모음이 더 많은 피다한 어는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라 동료가 있는 곳으로 멀리멀리 날아갔다. 그의 귀에도 분명히 꽂히는 그 소리는 사냥하는 그들의 삶에 최적화된 언어였다. 평소에는 ‘까이이, 삐이이’하며 길게 빼는 의미 없는 소리로만 들렸었다. 마을보다 밀림의 조건에 셋팅돼 있던 그들의 의식과 관습을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에버렛의 번역 작업은 진척될 리 없었다.

집단 사냥에서 에버렛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는 방관자를 넘어 보호 대상이었다. 냉정히 말하면 피다한 족이 유기했던 갓난쟁이 신세였다. 자기 몫의 힘을 발휘할 뿐인 그들에게, 생명의 기준은 밀림에서 독립된 개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였다. 그렇지 못할 때 한 생명은 개인을 넘어 부족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 있었다. 그들이 헤어질 때 “잠들지 마, 거기 뱀이 있어”라는 말을 인사로 주고받는 이유는 그들이 놓인 환경에서 찾을 수 있었다.

어떤 것이 생명에게 더 무자비한가

그렇다면, 약자의 생명을 유기하는 피다한 족의 행위는 비인간적인 것일까? 식량도 권력도 비축하지 않고 남의 몫도 침범하지 않는 그들의 무심함과는 정반대로 불공정 구조하에 독점과 반칙이 횡행하는 문명인의 자비,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올바른지 묻는 것은 지나친 단순 비교이려나? 단순한 비교라고 치는 순간, 그 역도 성립하게 된다.

피다한 족의 세계관은 고대인의 가치체계를 닮았다. 자연과 직접 마주하고 생태계에 적응하면서 자리잡은 생명에 대한 이들의 인식을 현대적 가치관으로 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에서 주인공 노인의 ‘죽음 자체의 행위’라는 말은, 아기의 죽음은 (타고난) 죽음의 작동 결과이지 그들(어른들)의 행위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따라서 어떠한 행위를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자연=신’의 행위이기도 하다. 현대인에게는 이처럼 부조리한 논리는 없을 것이다. 질병 퇴치와 장수를 추구하는 현대의학의 관점에서는 더더욱 악(惡)이며 극복 대상이다.

그럼 고대인을 포함한 이들 부족의 생명 존중 방식은 어떻게 펼쳐졌을까? 『연애소설 읽는 노인』으로 돌아와서, 수아르족에게 안토니오가 배운 생명 존중은 자신의 의지로 죽음에 맞설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실현되었으며, 인간과 동물에 구분이 없었다.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면 그것이 노인에게 떨어지든, 살쾡이에게 떨어지든 당사자들은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대결의 긴박한 순간에도 둘은 교감하고 합의했다. 자비가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콘쿠와」에서 인간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젊은 까마귀와 산어치의 부주의한 행동에는 응당 처벌이 따라야 했고 의지를 존중하는 합의된 죽음이었다.

이러한 생명관(=죽음관)에 따르면, 비명횡사는 더할 나위 없이 불행한 사건이며 이태원 참사처럼 우리 사회에 끊이지 않는 인재(人災)는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데서 나온 비극이다. “아무렇지 않게 총을 난사하며 주검을 영원한 고통에 휩싸이도록 짓이겨 놓”은 백인들의 행위(『연애소설 읽는 노인』)와 다르지 않았다.

생명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자비로운’ 생명 연장 기술만 발전하는 것은 재앙이나 다름없다. 아직 우리 곁을 맴도는 이태원 참사 영령들이 유가족의 애도와 사회적 위로 속에 떠날 수 있도록 진상 규명부터 시작해야 한다.

글쓴이

김경은 소설가

김경은 소설가는 소설 외에 이런저런 잡글을 쓰는 중. 최근 <나타나다><매일 안녕하세요><마오리전사><애스컴시티> 등을 씀. 신화의 시대, 시대의 신화: 신화는 새롭지 않지만, 언제나 새롭게 읽힌다. 오랜 세월 만들어져 온 신화가 있는가 하면 오늘의 우리가 만들어 가는 신화도 있다. 신화의 시대에서 이 시대의 신화까지를 더듬어 갈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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