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는 왜 ‘나치’ 하이데거를 사랑했나①
[홍성광의 독일 철학자들의 사랑 이야기] 나치의 지적 슈퍼맨, 마르틴 하이데거 ‘악의 평범성’으로 유명한 한나 아렌트 하이데거는 왜 나치에 빠졌고 아렌트는 그와 사랑에 빠졌을까?
‘지적 슈퍼맨’ 마르틴 하이데거
인간이 품을 수 있었던 가장 심오하고 복잡한 사고를 소유함으로써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천재, 그러한 ‘슈퍼맨’이 어떻게 나치 이념에 동조하고 히틀러 같은 사악한 괴물을 편들 수 있었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는 친나치 철학자들이 여럿 있었지만, 독일 밖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치에게는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당대의 천재가 필요했다.
1933년 5월 1일 하이데거는 나치당에 입당했다. 그는 입당 연설에서 제3제국을 “독일을 위한 새로운 지적·정신적 세계”라고 규정하며, “국가사회주의 건설이 오늘날 독일 대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과업이 되었다”라고 선언했다. 계속해서 그는 히틀러의 목표를 칭송했으며 대학의 나치화가 ‘가장 중요한 국가의 과제’라며 기꺼이 환영했다.
그러자 나치 신문은 엄청난 존경심을 담아 이 저명한 철학자를 다룬 기사를 싣고 그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는 고귀한 도덕적 책임감의 소유자이며, 독일 국민의 운명과 미래를 노심초사하는 그가 우리 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임을 의심치 않는다”라며.
하이데거는 재빨리 히틀러를 완벽한 인물로 이상화했다. 그는 히틀러가 수상이 되고 3개월도 안 된 1933년 5월에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이 되었다. 이 같은 부역 행위는 전 세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이데거라는 인물은 이미 범상한 철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제작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는 1929년에 출간한 『존재와 시간』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어 출간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1929)는 그의 명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이후에 그는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저작들을 집필했다. 하이데거의 가장 가까운 동료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인 카를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에게 “자네는 히틀러처럼 천박한 인물이 독일을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라고 물었다. 그러자 하이데거는 회심의 미소를 띠며 “중요한 것은 문화가 아닐세. 그의 경이로운 손을 보라고!”라 답했다.
술통 제조인 겸 성당지기의 아들로 태어난 하이데거는 대학에 다닐 만큼 형편이 넉넉지 못해 신부가 되려는 생각으로 예수회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내면을 탐구하고픈 욕구에 이끌려 ‘철학자이자 현인’으로 인생의 목표를 변경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1년 동안은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1917년에는 여성인권 운동가로 나치에 열광한 엘프리데 페트리와 결혼했다.
전쟁이 끝난 후 하이데거는 에드문트 후설 밑에서 공부했고 그의 조교로 일했다. 1923년 후설은 하이데거가 마부르크 대학에서 자리를 얻도록 힘을 써주었고,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가기 전까지 5년 동안 그 대학에서 가르쳤다. 후설이 적극적으로 밀어준 덕분에 그는 후설의 뒤를 이어 프라이부르크 대학 교수가 될 수 있었다.
1920년대 내내 그는 사색에 잠겨 연구에 매진했다. 그의 목표는 일상의 경험에 깃든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었다. 그는 존재의 의미를 탐구했으며, 그것에 대한 탐구는 ‘시간’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되었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존재’라는 단어가 익숙하게 여겨진다고 해서 존재한다는 것의 거대한 수수께끼를 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사색의 골간이었다.

위험한 사랑의 시작
1924년 한나 아렌트는 마부르크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부전공으로 신학과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그녀의 지도교수는 카리스마 넘치는 젊은 ‘메스키르히의 마법사’, 바로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마부르크 대학에서 하이데거의 강의는 극찬을 받았다. 그의 제자들의 대부분은 유대인이었다. 여학생들에게 그는 매혹적인 존재였다. 그는 무언가를 제시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것을 감춤으로써 사람을 매료시키는 법을 알았다.
총명한 소녀 한나 아렌트는 이 매혹적이고 이기적이며 권위주의적인 남자를 만난 순간 그를 향한 경외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아렌트는 그에게서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 숭배할 만한 아버지 같은 ‘신’을 발견했다. 강의를 듣는 한나 아렌트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낀 하이데거는 그녀를 자신의 연구실로 초대했다. 그는 35세였고, 그녀는 18세였다. 금지된 은밀하고 위험한 사랑의 시작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쪽지를 보냈다. “오늘 저녁 내 연구실에 들려줘요. 내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어요.”
아렌트는 하이데거와의 은밀한 관계를 지속했다. 유혹자 하이데거는 아렌트를 정신적으로 뿐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유혹했다. 두 사람은 시적 감수성이 비슷했으며, 몽상가였고 감수성이 충만했다. 그러나 차츰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렌트는 자신이 하이데거의 위험한 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이데거는 아렌트에게 마부르크 대학을 떠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권했다. 아렌트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낙담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았다.

야스퍼스의 제자 한나 아렌트
하이데거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있던 벗 야스퍼스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한나 아렌트는 이미 벌어진 일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하이데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함께 시작했던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논문을 야스퍼스 밑에서 계속 써나갔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때까지 아렌트는 실연의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한 가면무도회에서 그녀는 유대인 철학자 귄터 슈테른을 만났고 그해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아렌트는 하이데거 앞에서는 여성적이고 굴종적이었지만, 남편을 대할 때는 사뭇 달랐다. 유대인으로서 그녀의 정체성은 점점 더 강해졌지만 하이데거에 대한 불안감도 결별 이후 더욱 커졌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칭얼대는 아이처럼 하이데거에게 애원했다. “이제 나는 당신의 아이예요, 당신의 한나예요.”
시온주의 운동가 한나 아렌트
아렌트는 하이데거에게 버림받자 라헬 파른하겐이라는 유대인 여성에 주목하여 그녀의 인생을 다룬 몇 편의 글을 발표했다. 라헬도 비유대인인 백작과 사랑에 빠졌던 여성이었다. 아렌트는 라헬에게서 실연의 상처를 안은 동지를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통해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에도 눈을 떴다. 그리하여 그녀는 베를린에서 시온주의 행동가들 진영에 합류하게 되었다.
1933년 5월 27일, 대학 총장이 된 하이데거의 취임 연설 제목은 ‘독일 대학의 자기주장’이었고, 이 연설은 훗날 나치주의를 찬양한 연설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유대인으로서 새로운 정체성에 눈을 뜬 아렌트는 이 연설문에 격분했다. 그녀의 눈에 하이데거의 새로운 스승은 아돌프 히틀러였다. 하이데거는 모든 비아리아인 교수들을 대학에서 쫓아내 히틀러의 이념에 동조했다. 그중에는 당시 독일 철학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하이데거에게 일자리를 잡아주고 물려준 후설도 있었다.
감옥과 수용소 그리고 탈출
1933년, 아렌트의 남편 슈테른은 파리로 몸을 피했고, 그녀는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아렌트는 어머니와 함께 일주일 후 극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체코로 도피했다가 가을에 파리에 도착했다. 아렌트는 이때부터 여생의 대부분을 망명자 신분으로 살게 된다. 파리에서 그녀는 시온주의에 헌신했고 당시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발터 벤야민과 친구가 되었다.
파리에서 아렌트는 정치행동가 하인리히 블뤼허를 알게 되었다. 그는 그녀에게 하이데거를 잊게 해준 해독제 역할을 했다. 그녀는 이제 나치를 추종하는 하이데거를 열정적으로 증오했다. 정치적 행동주의를 추구하던 아렌트에게 블뤼허는 영혼이 통하는 친구였다. 그들은 곧 연인이 되었고, 아렌트는 사랑하지 않았던 슈테른과 원만하게 이혼했다.
아렌트는 파리에서 망명자를 돕는 유대인 정보기관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블뤼허가 1939년 체포되어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두 달 만에 석방되자 둘은 서둘러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하자마자 그녀는 체포되어 프랑스 남서부 귀르 수용소로 보내졌고, 1940년 6월 어느 날 파리가 함락되어 수용소가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용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아렌트는 천신만고 끝에 프랑스 남부 몽토방에 살고 있던 친구 라테의 집에 도착했다. 이즈음 그녀는 파리에서 절친이 된 벤야민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벤야민은 자기 운명을 예감했는지 소중한 원고를 아렌트에게 맡겼었다. 프랑스 남부에서 그녀는 우연히 다시 남편을 만났다. 그리하여 부부는 1941년 리스본으로 가서 다행히 미국행 배에 몸을 실을 수 있었고, 1941년 5월 뉴욕항에 도착했다.
하이데거에 대한 아렌트의 관계는 애와 증, 그리고 후일 다시 애와 용서가 섞인 복잡 미묘한 것이었다. 헤어진 지 20여 년이 지난 1950년 다시 아렌트를 만날 무렵 하이데거는 아내한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굳이 털어놓지 않아도 되는데 왜 그랬을까?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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