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두 표정
[김윤태의 한국시 산책] ‘광주민중항쟁’을 추념하며 노천명의 ‘푸른 오월’과 김남주의 ‘학살1’ 감옥에서 맞이한 5.18항쟁의 참상 김남주 시인, 시적 상상력으로 그려내
노천명의 ‘푸른 오월’
5월은 흔히 “계절의 여왕”이라고 한다. 그렇게 부르는 데는 아마도 5월의 기후가 1년 중에 가장 좋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람이 살기에 가장 쾌적한 온도가 영상 18~20℃라는데, 서울 기준으로 5월의 평균기온이 대체로 17~19℃쯤 되니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5월은 4월에 이어 역시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 화려한 자태를 더욱 뽐내고, 신록의 계절이라 부를 만큼 주변의 자연환경이 온통 초록으로 변해간다. 5월은 사람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생물들이 살아가기에도 아주 적합한 철이라 할 만하다.
‘계절의 여왕’ 이란 말의 유래에 대해서는 나 역시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노천명의 시에 나온다는 것을 어릴 적에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어슴푸레 나기에 찾아보니 과연 그러하다. 그 시부터 먼저 살짝 살펴보자(이 시는 1945년 노천명의 시집 『창변』에 수록된 작품이다. 총 8연으로 짜여 있으나, 여기서는 지면 제한으로 그 일부만 소개한다).
청자빛 하늘이
육모정 탑 우에 그린 듯이 곱고
연못 창포잎에
여인네 맵시 우에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라일락숲에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내가 웬일로 무색하구 외롭구나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들
어찌하는 수 없어
눈은 먼데 하늘을 본다
(노천명, 「푸른 오월」 1~3연 / 『사슴』 미래사, 1991)
1912년생인 시인이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의 나이에 썼음 직한 이 시는 노천명만의 독특한 여성적 감수성이 듬뿍 묻어나는 서정시이다.
제목부터가 ‘푸른 오월’로 싱그러운 계절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분위기 속에서 시적 화자가 그리움(‘향수 鄕愁’)이나 외로움과 같은 감정에 휩싸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보리밭 푸른 물결을 헤치며 / 종달새 모양 내 마음은 / 하늘 높이 솟는다 // 오월의 창공이여 / 나의 태양이여”(7~8연)라고 읊을 정도로, 약동하는 5월의 계절적 아름다움을 찬송하고 있다.
이렇듯 5월의 아름다움은 아무리 자랑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내 청춘의 마음 속에도 5월은 늘 그렇게 향유되고 또 기억되어 왔을 것이다.
핏빛 아픔이 된 1980년 5월
그러나 대학생이던 1980년의 5월 이후, 푸르른 계절의 여왕은 내게 전혀 다른 색깔, 즉 핏빛의 아픔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공포와 분노와 절망으로 뒤범벅된, 그때 이후 평생토록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과 같은 트라우마를 남겼다.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혼란스러운 정세를 틈타 12월 12일 쿠데타를 성공시킨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은 1980년 봄 대학가와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끓어오르고 있던 민주화의 열풍을 잠재우고자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2차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바로 이날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비상계엄 해체 등을 요구하며 교문 앞에서 벌인 광주 대학가의 시위를 계엄군이 과잉 진압하면서 사태는 점점 커져갔다. 그 이후의 과정을 새삼 여기에 일일이 열거할 필요가 있을까. 김남주 시인의 이 한 편의 시가 그 실상을 압축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은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경찰이 전투경찰로 교체되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전투경찰이 군인으로 교체되는 것을
밤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도시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차단되는 것을
아 얼마나 음산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계획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침략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야만족의 약탈과도 같은 일군의 군인들을
밤 12시 나는 보았다
악마의 화신과도 같은 일단의 군인들을
아 얼마나 무서운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노골적인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도시는 벌집처럼 쑤셔놓은 붉은 심장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이었다
밤 12시
바람은 살해된 처녀의 피묻은 머리카락을 날리고
밤 12시
밤은 총알처럼 튀어나온 아이의 눈동자를 파먹고
밤 12시
학살자들은 끊임없이 어디론가 시체의 산을 옮기고 있었다
아 얼마나 끔찍한 밤 12시였던가
아 얼마나 조직적인 학살의 밤 12시였던가
오월 어느 날이었다
1980년 오월 어느 날이었다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2시
하늘은 핏빛의 붉은 천이었다
밤 12시
거리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었다
밤 12시
무등산은 그 옷자락을 말아올려 얼굴을 가려버렸고
밤 12시
영산강은 그 호흡을 멈추고 숨을 거둬버렸다
아 게르니카의 학살도 이렇게는 처참하지 않았으리
아 악마의 음모도 이렇게는 치밀하지 못했으리.
「학살1」(『나의 칼 나의 피』, 실천문학사, 1987)

현실보다 생생한 시적 상상력
이 시의 내용이 완벽하게 사실에 부합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시적 화자가 2연과 5연에서 “보았다”고 몇 번을 강조하지만, 실은 당시 시인은 1979년 10월에 남민전 사건으로 이미 투옥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처참한 광경을 실제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어서, 아마 항쟁의 과정에 대해서는 충분히 전해 들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문학에서 리얼리티(reality)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님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시인이 학살의 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이미 마음의 눈으로 직접 본 것보다 더 리얼하게, 더 생생하게 느꼈을 것이다. 시적 상상력은 때론 현실보다 더 생생한 것이므로.
이 시는 총 12연으로, 3연씩 한 묶음으로 동일한 구조가 4번 반복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1-4-7-10연은 시공간적 배경이 “오월 어느 날→ 1980년 오월 어느 날→ 광주 1980년 오월 어느 날”로 점층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2-5-8-11연은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과 묘사를 역시 반복과 점층의 수법을 빌어와 극적 효과를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3-6-9-12연은 사건에 대한 시적 화자의 평가를 배치하였다.
이러한 구성과 시적 기법은 김남주 시의 특징이다. 또한 그 평가에 해당하는 어휘들을 보면 ‘음산한’, ‘계획적’, ‘무서운’, ‘노골적’, ‘끔찍한’, ‘조직적 학살’, ‘처참한 학살’, ‘치밀한 악마의 음모’라고 쓰고 있다. 당시의 사태가 신군부 세력의 철저한 계획에 의한 학살이었음을 시인은 선명하게 단정짓고 있다.
시에서는 시간적 배경을 “1980년 오월 어느 날”이라고 했을 뿐, 날짜를 특정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이 학살 사건을 5.18이라고 대표 명사화해서 부르지만, 사실 이 사건의 시간은 시위가 발발한 5월 18일부터 항쟁지도부가 전남도청을 사수하며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진압당한 5월 27일까지의 열흘간이다. 나는 이 사건에서 가장 비장하고 숭고한 순간이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마지막 항쟁으로 시민군들이 죽어가던 때가 아닐까, 그쪽으로 심정적 지지를 보낸다.
‘광주민주항쟁’이라 부르면 어떨까
이와 관련하여 이 대규모 학살 사건에 대한 명칭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다. 오늘날 광주 시민들을 향해 신군부 세력이 가한 바로 이 사건은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으로 공식화되어 있다. ‘광주사태’, ‘광주민중항쟁’, ‘광주학살’, ‘5.18’ 등 여러 다른 별칭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어쨌든 ‘5.18민주화운동’은 현재 법률에 근거한 공식 명칭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명칭이 과연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담고 있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고, 사태의 역사적 의미를 지나치게 가치중립적이고 평면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Uprising(광주 봉기)’ 혹은 Massacre(광주 대학살)’이라고 등록한 유네스코 같은 해외에서의 명칭이 오히려 실상에 더 부합한다고 본다. 허나 대학살이라고 하면 피해의 측면이 더 부각되는 것 같아, 좀 더 부당한 권력에 맞선 주체들의 능동성과 적극성을 감안하여 ‘광주민중항쟁’이라고 부르고 싶다. 왜냐하면 정명(定名/正名)이야말로 사태의 본질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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