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외교의 절묘한 ‘균형의 기술’

대미 투자로 달러 질서내 마찰 줄이고 한중 통화스와프는 상시적 ‘보험’ 든 것 핵잠수함 협력은 동맹의 신뢰 확인한 셈 李, ‘줄서기 외교’ 아닌 ‘현실주의적 외교’

왼쪽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대통령, 이재명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 연합뉴스
왼쪽부터 도널드 트럼프 미대통령, 이재명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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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세상의 일은, 역사적 사건일지라도, 치밀한 계획의 산물이라기보다 절박한 필요가 빚은 절충과 조합, 그리고 우연이 더해 만든 결과다. 다원주의 체제에서 한 나라가 동시에 돌아가는 여러 사안을 섬세하게, 일사불란하게 조율하는 일은 드물다. 국정은 대체로 그때그때 위기를 넘기려는 결단과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본능 속에서, 국내의 이견을 조율하고 타협을 찾는 노력을 거쳐 필연의 형상을 한 우연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오늘 한국의 외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그려진 정교한 전략 지도라기보다, 복잡한 정세 위에서 맞부딪히는 힘을 조절하며 얻어낸 현실적 균형에 가깝다.

‘연 200억 달러 상한’...현실주의적 투자 계획

한국 정부는 연 200억 달러 안팎의 상한을 두고 10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미국에 투자하는 장기 계획을 트럼프 행정부와 합의했다. 총규모는 약 3,500억 달러로 잡혀 있으며 집행은 첨단산업·에너지·인프라 등 공급망과 규제 협력의 진척에 맞춰 나눠 진행된다. 명분상으로는 산업 협력의 형태지만, 실제로는 달러 중심 질서와의 마찰을 줄이고 통상·규제의 불확실성을 낮추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한국은 세계시장에서 달러를 많이 번다. 외환보유액에서도 달러 비중이 크다. 이 달러를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한국 경제의 방향도 달라진다. 하나는 달러를 외환보유액으로 쌓고, 그에 맞춰 원화 공급을 늘려 국내 투자 여력을 키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 달러를 미국의 금융·산업 자산에 재투자해 해외에 머물게 하는 길이다. 이번 합의는, 여러 제약 속에서 우리가 사실상 후자의 경로를 선택하도록 압박받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달리 말해 경상수지 흑자에 기반한 국내 자금 여력은 제약을 받고, 그 달러는 미국 자산으로 재배치된다. 두 갈래 길 중 한쪽에 무게가 실린 셈이다.

달러는 여전히 세계 무역과 결제의 기본 언어이고, 참여자가 많을수록 거래가 쉽고 비용이 낮아지는 네트워크 효과가 크다. 이 구조는 단기간에 바뀌지 않는다. 한국은 대미 수출로 달러를 벌어 다른 나라에서 원자재·부품을 산다. 이런 연결 속에서 관세가 오르면 기업 부담은 즉각 커진다. 따라서 이번 선택은 달러 질서와의 마찰을 줄이고 통상·규제의 불확실성을 낮추려는 현실적 판단으로 읽힌다.

이런 반론도 나온다. 지금의 타결이 아니라 지연이 맞지 않았나? 2025년의 통상·관세·안보심사 환경에서 지연은 레버리지보다 불확실성 비용을 키운다. 기업·가계에 전가되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큰 신호(투자)’를 먼저 고정하고 세부는 뒤에서 다듬는 두 단계 접근이 합리적이었다.

한중 통화스와프, 얇지만 단단한 ‘보험’

비슷한 시기에 한국은행은 중국인민은행과 ‘원·위안 통화스와프(4000억 위안, 약 70조 원)’을 갱신했다. 명목은 외환시장 안정장치지만, 실질은 달러 경로가 막혀도 상시로 쓸 수 있는 결제·유동성의 보험이다. 통화스와프는 중앙은행 간 상호 통화 교환 권리의 계약이다. 한중 스와프의 경우, 양측이 서로의 통화 계정을 보유해 필요할 때 바로 상대국 통화 유동성을 확보한다.

이는 달러 없이도 거래를 이어갈 얇은 대체 경로다. 다만 스와프가 모든 제재를 무력화하는 만능키는 아니다. 네트워크 효과·환리스크·규제 준수를 고려하면, 효용은 어디까지나 ‘완충(backstop)’에 가깝다. 그래도 위기 때 시간을 벌어주는 실용성은 분명하다.

왜 ‘한미’가 아니라 ‘한중’인가? 한미 스와프는 연준(Fed)이 상황을 보고 열었다 닫는 비상용 창구, 한중 스와프는 언제든 쓸 수 있는 상시 보험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의 선택은 ‘미국 대신 중국’이 아니라 ‘상시(원·위안) + 비상(달러)’을 함께 갖춘 포트폴리오다. 달러 의존이 과하게 보이는 신호를 시장에 굳이 주지 않으면서도, 필요하면 달러는 다른 길로 조달할 수 있다. 이렇게 상시 보험과 비상 대여를 함께 갖추면 변동성 국면에서도 숨 쉴 틈을 확보할 수 있다.

미국의 버지니아급 핵추진 잠수함. 사진= 연합뉴스
미국의 버지니아급 핵추진 잠수함. 사진= 연합뉴스

핵잠수함, 동맹의 언어이자 서사의 관리

한국은 핵추진 잠수함 협력의 문을 열었다. 이는 중국에겐 잠재적 압박, 북한엔 실질 억지로 읽힌다. 핵잠은 장기 체공·고속 전개·탐지 회피로 상대의 핵·미사일 운용비용을 높이는 능력이다. 동시에 이 선택은 동맹의 신뢰를 보여주는 정치적 언어다.

물론 핵잠이 한반도에서 ‘두 국가’ 현실을 상징적으로 굳힐 위험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돌아갈 길은 전력 자체가 아니라 ‘운용 태세’에서 마련해야 한다. 핵잠 보유는 장기 억지의 기반으로 유지하되, 상황에 맞춰 전개 빈도·훈련 강도·작전 해역·연합훈련 범위·정보 공개 수준을 단계적으로 조절한다.

긴장 완화 국면에선 순찰 간격을 넓히고 민감 해역 진입을 자제하며, 연합훈련을 축소·전환하고 통지·검증·핫라인 같은 신뢰구축 조치를 병행한다. 반대로 위기 시에는 태세를 신속히 복원한다. 핵심은 지금이 정치적 승인 단계이고, 실제 전력화까지 협상·심사·기술이전·인력양성 등 시간이 필요한 만큼, 능력은 견고히 축적하되 운용으로 긴장과 대화의 문을 함께 조절하는 것이다.

현실주의가 가져온 균형

세 사건을 하나의 청사진으로 설계했다고 믿는 건 과하다. 이는 정교한 설계의 산물이 아니라, 달러 질서의 압력, 한중 경제관계의 현실, 북핵과 미·중 갈등이라는 구조적 힘이 동시에 가하는 압박에 실용적으로 응답한 결과다. 그 결과, 대미 투자는 통상·규제 리스크를 낮추고, 한중 스와프는 결제·유동성의 최소한을 보장하며, 핵잠 협력은 억지에 대한 신뢰를 확보한다.

서로를 묶어두지 않으면서 서로를 보완하는 조합이다. 세 선택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로 다른 위험을 나눠 맡았다. 냉전식 줄서기가 아니라, 양쪽 압력 속에서 움직일 공간을 넓히려는 실용적 선택이다. 지금의 균형은 완벽하지 않다. 한쪽으로 기울면 종속, 다른 쪽으로 쏠리면 불안정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균형을 유지하는 능력이 오늘 한국이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다.

미·중 갈등 속 한국이 개척해야 할 독자적 길

이렇게 보면, 대미 장기 투자, 한중 스와프, 핵잠 협력은 어느 한 진영으로 쏠리기 위한 비용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지를 넓히기 위한 도구다. 한국이 택한 것은 ‘줄서기’가 아니라 독립된 균형의 기술이다. 미·중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국은 자기 속도로 자기 길을 내야 한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지켜야 할 균형의 기술이다.

글쓴이

유승경 전 경기경제과학진흥원 원장

유승경은 경기도 경제과학진흥원 원장을 역임하며 산업정책과 혁신 생태계 조성에 힘쓴 바 있다.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의 수석연구위원으로서 화폐와 금융을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리노이 주립대와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수학했다. LG경제연구원과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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