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전쟁, 평화를 갈구한 ‘피카소 미술관’
[정연복과 손잡고, 세계의 미술관으로] 프랑스 남쪽 도시 앙티브와 발로리스 ‘프랑수아즈 질로와 사랑’ 시기의 그림들 245점의 피카소作 있는 앙티브 미술관 도기 작품 속 ‘전쟁과 평화’의 발로리스 9곳 피카소미술관 중 특별한 미술관
9개의 피카소 미술관
피카소는 1881년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했으니 오랜 세월 작품도 많이 남겼습니다. 무려 5만여 점에 이르는 그의 작품은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미술관에 흩어져 있는습니다. 전세계에는 아홉 개의 피카소 미술관이 있습니다. 그 중 프랑스에 3개(파리, 발로리스, 앙티브)가 있고 스페인에 4개(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말라가, 호르타 산 호안)가 있는데요. <더 칼럼니스트>에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을 소개한 적이 있죠. 오늘은 프랑스 남쪽의 작은 도시 앙티브와 발로리스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피카소는 “나야말로 최고의 피카소 컬렉터다”라고 말했었죠. 피카소는 파리에 처음 온 1900년 청색시대부터 무쟁에서 생을 마감하기까지 생애 전반에 걸친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었고 회화, 조각, 데생, 도기, 판화 등 5천 점 이상의 작품을 사후에 프랑스 정부에 기증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파리의 마레 지구에 <피카소 미술관>이 탄생되었죠.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피카소 사망 5 년 전에 제정된 법 덕분입니다. 프랑스 정부가 상속세를 돈이 아니라 예술품으로 낼 수 있다는 법을 1968년에 만들었기 때문이죠. 피카소의 유족은 엄청난 유산에 대한 상속세 대신 작품을 기증한 거고요.
파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이 피카소 사후에 만들어진 것인데 반해,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1963년 3월 9일 개관)처럼 앙티브와 발로리스에는 피카소가 살아있을 때 미술관이 개관합니다. 피카소가 직접 자신의 작품을 정부에 기증하면서 미술관 설립이 추진된 경우입니다. 이렇게 해서 피카소는 자신이 살면서 창작을 했던 도시들에 영원히 자신의 삶과 예술을 새겨놓게 되었습니다.
피카소의 세계에서는 예술과 여인들과의 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인데요. 가난한 파리 초기 시절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사랑은 입체파 시기의 많은 작품에 녹아 있습니다. <게르니카>를 작업할 때 피카소는 마리 테레즈와 도라 마르 사이에서 고민이 깊었고요. 도라 마르 이후 피카소는 프랑수아즈 질로(Fraçoise Gilot, 1921~2023)와 사랑에 빠집니다. 프랑수아즈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후 아버지의 강권으로 법 공부를 하던 21세 때 61세의 피카소를 만나죠. 이때가 1943년이고 관계는 10년 동안 이어집니다.

바닷가에 선 <앙티브 피카소 미술관>
프랑스 남쪽 해안도시 앙티브는 니스에서 남서쪽으로 23㎞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휴양도시인데요. 이곳에 있는 샤토 그리말디에 이들의 사랑이 영원히 새겨져 있습니다. 1946년 9월 중순에서 11월 중순 사이 피카소와 프랑수아즈가 머문 인연 때문인데요. 두 달 동안 피카소는 많은 작업을 했고 작품 일부(23개의 유화, 44개의 드로잉)를 남겨둔 채 파리로 떠납니다.
샤토에 남겨둔 작품과 다른 작품을 추가해서 그 다음해에 피카소 전시실이 마련되죠. 1948년, 피카소가 기증한 78점의 도기 작품도 전시되고요. 1966년에는 이곳이 <피카소 미술관>으로 개관합니다. 1991년, 피카소의 두번째 부인인 자클린 로크가 많은 작품을 기증한 덕택에 컬렉션은 더욱 풍부해집니다. 이로써 이곳은 소장품 규모로 보면 파리와 바르셀로나에 이어 245점의 피카소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이 되었습니다.

앙티브의 <피카소 미술관>은 전세계에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바닷가에 있는 미술관인데요. 현대적인 건물이 아니라 14세기 후반에 지어진 중세의 요새와 같은 건물이 풍경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 곳입니다. 미술관에 가려면 좁은 골목길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골목을 돌면 눈앞에 갑자기 거대한 건축물이 그 위용을 드러냅니다. 성은 고대 그리스 시대 때 쌓은 축대에 지어졌습니다.
11세기에 세운 탑의 높이는 무려 25m에 이릅니다. 샤토 그리말디에서 그린 작품인 <푸른 침대에 누운 나부>(1946년 9월), <염소>(1946년 9월) 뿐만 아니라 프랑수아즈와의 사이에 아들 클로드가 태어난 다음 해인 1948년에 그린 <삶의 기쁨> 등을 볼 수 있습니다.

뉴욕의 MoMa에 소장된 <앙티브에서의 밤낚시>(1939)는 1987년과 1988년 사이에 타피스리로 제작된 버전을 만나볼 수 있고요. 피카소 작품 이외에도 현대의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니콜라 드 스타엘의 <연주회>(1955)는 가로 6m, 세로 3m30cm에 이르는 큰 색면 그림으로 전시실에서 보는 순간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관람객을 사로잡습니다. 서명도, 제작날짜도 없이 오로지 앙티브에서 제작되었다는 메모만 표기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연주회를 듣고 그린 일련의 ‘연주회’ 시리즈 중 하나로 갈색의 콘트라베이스와 피아노, 붉은 바탕이 세련되면서도 강렬한 색채의 건반을 두드려주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림을 완성한 다음날 드 스타엘은 자살로 생애를 마감합니다. 작품은 1986년 미술관에 들어왔습니다.

마두라 공방과 <발로리스 피카소 미술관>
다시 피카소와 프랑수아즈에게로 돌아가 볼까요. 이들은 1948년 봄에 파리에서 발로리스로 이사합니다. 피카소와 프랑수아즈 사이에는 1947년 파리 근교에서 아들 클로드가, 1949년 발로리스에서 딸 팔로마가 태어납니다. 발로리스에서 노년의 피카소는 평화로운 가족생활을 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발로리스는 앙티브에서 7.7㎞ 떨어진 작은 도시인데요. 도기 공방으로 유명한 곳이죠. 피카소는 1946년 우연히 발로리스에 있는 ‘마두라 공방’을 방문하면서 도기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초기에는 이미 만들어된 접시에 그림을 그리다가 점차 도기 제작에 관련된 공부를 계속하면서 직접 자신만의 독특한 그림과 형태의 도기를 제작하죠.
1946년에서 1971년까지 모두 600점이 넘는 도기를 만들었고 복제 에디션까지 합하면 3,500여 점을 제작했습니다. 도기는 피카소의 마지막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전통적인 방식의 작업을 거부하고 특유의 자유분방함을 펼칩니다. 마두라 공방을 운영했던 라미에 부부는 “피카소처럼 일해서는 직장잡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말로 피카소 작업의 독특함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로리스에 크지 않지만 <국립 피카소 미술관>이 생겼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도자기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피카소가 즐겨 그리던 부엉이와 미노타우로스가 등장하는 활력이 넘치는 그림도 좋지만 색감과 형태가 대담하고 시원시원한 항아리와 접시가 많습니다. 미술관으로 쓰이는 건물은 16세기 건물인데요. 전시실이 크지 않고 낮은 층고에 적절한 조도의 조명이 피카소 도자기들의 전위성을 돋보이게 합니다.
전시실을 나와 마당을 가로지르면 오른쪽에 작은 문이 있는데요.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12세기에 지어진 아무 장식없는 작은 예배당이 나옵니다. 이곳에 피카소가 그린 <전쟁과 평화>가 있습니다. 종교적인 공간에 그려진 ‘반전’의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주는데요. 마치 동굴벽화를 보는 느낌이 듭니다.
피카소는 1952년부터 커다란 크기의 목판에 그림을 그렸는데, 이 그림은 1954년에 예배당의 천장과 벽에 설치됩니다. 들어가서 왼쪽이 ‘전쟁’(길이 10m, 높이 4.7m)이고 오른쪽이 ‘평화’(길이 10m, 높이 4.7m)입니다. 악과 어리석음, 책(지성)을 짓누르는 전쟁에서 모두가 어우러져 춤을 추고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가족이 단란한 한 때를 보내는 것으로 요약되는 평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입구 맞은편 벽에는 <세상의 네 부분>(1958년에 그려서 1959년에 설치)이 있습니다. 피부색이 다른 네 인물이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그려진 둥근 구를 들고 있습니다. 양쪽 벽화에 비하면 단순하고 밋밋하지만 덕분에 메시지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오른쪽의 ‘평화’ 부분을 보면 재미있는 그림이 있는데요. 보자마자 “어, 여기 태극문양이 왜 있지?” 하는 생각이 들겁니다. 피카소는 1951년 프랑스 공산당의 부탁으로 <한국에서의 학살>을 그리기도 했고 <전쟁과 평화>를 그리던 당시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라 한국에서의 평화를 기원하면서 태극문양을 그려넣었을까요? 확인할 길은 없지만 태극 문양은 동양 철학에서 ‘균형과 평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피카소가 원용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전쟁과 평화>가 완성되자 피카소는 1953년 프랑스 정부에 작품을 기증합니다. 발로리스에서 작업한 도기도 함께 기증되죠. 이렇게 해서 1955년 미술관이 개관됩니다.
피카소의 모든 사랑이 그렇듯 프랑수아즈와의 사랑도 시끌벅적하게 끝납니다. 1952년에 피카소가 자클린 로크와 가까워졌고 이를 알게 된 프랑수아즈가 그 이듬해 두 아이를 데리고 떠남으로써 끝을 맺게 됩니다. 헤어진 지 11년 후 그녀는 피카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피카소와의 삶』을 비평가 칼튼 레이크(Carton Lake)와 함께 출간합니다. 12개국 언어로 번역되고 1백만 부 이상 팔리는 대성공을 거두죠. 분노한 피카소는 다시는 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인 클로드와 팔로마를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모든 기억을 품고 있는 오래된 건축물에 전시된 피카소의 작품들을 보면서 사랑과 전쟁, 평화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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