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대표 슈퍼리치 미술관 ‘루이뷔통 재단’

[정연복과 손잡고, 세계의 미술관으로] 국가에서 개인으로: 미술의 권력 이동 불로뉴 숲의 ‘지진 지대’ 건축물 LVMH 아르노 회장이 세운 미술관

'데이비드 호크니 25' 전시실. 캘리포니아 시절 그린 대표작들 앞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객들. 사진=정연복
'데이비드 호크니 25' 전시실. 캘리포니아 시절 그린 대표작들 앞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관람객들. 사진=정연복
  • [핵심요약]
  • 자본의 역전 국가 박물관(루브르)의 쇠락과 대조적으로, 압도적 자본력을 앞세운 슈퍼리치 재단, 루비뷔통 재단이 파리 현대미술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 건축적 파격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12개의 유리 돛’은 현대미술의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파격적 랜드마크가 되었다.
  • 수잔 피제 감독의 전시 슈킨 컬렉션, 데이비드 호크니 25, 게하르트 리히터 전시회마다 100만명 넘는 관람객. 예술작품과의 진짜 만남을 이끌어 내.
  • 역설적 공간 자본이 만든 가장 화려한 ‘안전지대’에서 세상의 균열을 다루는 예술을 소비하는 현대미술의 아이러니를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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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 옆의 슈퍼리치 미술관

지난해 10월 19일.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야밤의 절도도 아니고 박물관이 개관한 직후인 오전 9시 반경, 사다리차로 박물관에 진입해 불과 7분만에 시가 1,400억 원 상당의 프랑스 왕실 보석을 훔쳐 달아난 겁니다. 프랑스 혁명 직후인 1793년 개관이래 세계 최고의 박물관으로 연 평균 1천만 명에 가까운 관람객이 찾았던 루브르의 체면이 이만저만 구겨진 것이 아닙니다.

유리 피라미드와 루브르. 도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로랑스 데 카르(Laurence des Cars) 관장이 결국 지난 2월 24일 사임했다. 사진=정연복
유리 피라미드와 루브르. 도난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로랑스 데 카르(Laurence des Cars) 관장이 결국 지난 2월 24일 사임했다. 사진=정연복

도둑들의 대담한 행각보다 더 놀라운 것은 어떻게 이렇게 허술하게 당할 수 있었냐는 건데요. 이러한 충격은 컬렉션의 형성에서부터 박물관의 탄생, 문화정책 전반이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던 프랑스이니만큼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도난 사건 직후인 10월 25일에는 카르티에 재단이 루브르 바로 옆으로 이전, 재개관했습니다.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이벤트는 프랑스 문화계 지각변동의 어떤 ‘징후’로 읽힙니다. 카르티에 재단의 재개관은 2014년 10월 불로뉴숲에 문을 연 <루이 뷔통 재단>, 퐁피두 인근에 2021년 5월에 개관한 <부르스 드 코메르스-피노 컬렉션>과 연결되면서 문화계에서의 슈퍼리치들의 역량과 영향력에 주목하게 합니다.

슈퍼리치들은 돈을 아끼지 않고 작품을 사들이고 미술관을 짓고 전시를 기획하는데 국가는 이들과 경쟁할 돈과 기획력, 동력이 부족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니까요. 오늘은 21세기 현재, 파리에서 현대미술의 랜드마크로 떠오른 세 미술관 중 파격적인 건축물과 성공적인 기획전시로 매번 큰 관심을 불러모으는 <루이 뷔통 재단>으로 가보겠습니다.

세계 최고부호가 “21세기 상징적 건물” 의뢰

화제성 면에서 <루이 뷔통 재단>은 단연 선두를 달리는데요. 그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 멋진 건축물을 들 수 있습니다. 2001년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 1949~ ) LVMH 회장은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Frank Gehry, 1929~ 2025)에게 재단의 건축을 의뢰합니다. 게리가 설계하여 1998년 문을 연 스페인 빌바오 소재의 구겐하임 미술관 건축에 깊이 매료된 영향입니다.

아르노는 자신이 원하는 “문화와 예술을 위한 대담하고 독보적인 건물, 21세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을 지어줄 최적임자가 바로 프랭크 게리라고 생각한 겁니다.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 3만 3,000 개의 티타늄 패널로 종이를 구긴 듯한 자유로운 형태를 띠고 있다. 날씨에 따라 건축물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다양한 색깔로 빛난다. 독특한 건축물과 현대 미술 전시로 연 10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명소다. 사진=정연복
스페인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 3만 3,000 개의 티타늄 패널로 종이를 구긴 듯한 자유로운 형태를 띠고 있다. 날씨에 따라 건축물은 물고기의 비늘처럼 다양한 색깔로 빛난다. 독특한 건축물과 현대 미술 전시로 연 100만 명의 방문객이 찾는 명소다. 사진=정연복

프랭크 게리는 구조를 해체하여 자유롭게 움직이는 듯한 건축을 추구하는 후기 구조주의 건축가로 분류되는데요.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뿐만 아니라, L.A.에 있는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 프라하의 댄스 센터, 파리의 시네마테크, 서울 청담동의 메종 루이 뷔통 등 자유롭고 대담한 건축 세계를 펼친 건축가입니다.

불로뉴숲 북쪽에 위치한 루이 뷔통 재단. 12개의 유리 돛이 바람을 품고 한껏 부푼 듯이 보인다. 유리 돛 안쪽에 보이는 하얀색 콘크리트벽이 내부 공간을 이룬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안이고 바깥인지 모호한 건축물은 다양한 형식적 실험과 문제의식으로 관람객을 당혹케 하는 현대미술을 닮았다. 사진=정연복
불로뉴숲 북쪽에 위치한 루이 뷔통 재단. 12개의 유리 돛이 바람을 품고 한껏 부푼 듯이 보인다. 유리 돛 안쪽에 보이는 하얀색 콘크리트벽이 내부 공간을 이룬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안이고 바깥인지 모호한 건축물은 다양한 형식적 실험과 문제의식으로 관람객을 당혹케 하는 현대미술을 닮았다. 사진=정연복

설계를 앞두고 파리를 찾았던 게리는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어진 유리 건축물 ‘그랑 팔레’와 루이 뷔통 재단이 지어질 불로뉴 숲의 ‘자르댕 다클리마타시옹(Jardin d’Acclimatation)’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예술의 항해를 떠날 듯한 유리 돛 건물

2008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2014년 10월에 완공된 건축물은, 게리의 표현에 따르면 ‘지진’의 모티프를 띤 12개의 유리 돛이 외관을 감싸고 있습니다. 12개의 돛은 전체가 3,600여 개의 작은 유리면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각각 다르게 생기고 구부러진 곡면을 가진 돛의 형상은 강철과 나무로 된 정밀한 들보로 지지되고요. 돛단배처럼 보이는 건물은 건물 바깥에 조성해 놓은 물과 물이 흐르는 계단 덕분에 금방이라도 물과 바람을 타고 떠날 것 같이 보입니다.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예술의 항해가 시작될 것처럼 말이죠.

유리 돛 아래에는 하얀색 콘크리트벽이 보입니다. 이 벽이 내부 공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전시실은 모두 3,850㎡의 면적에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까지 11개가 있습니다. 특별 전시회가 열릴 때마다 층고가 높고 크기와 모양이 다른 전시실이 거의 모두 할애가 되면서 그 어떤 미술관도 도전하기 어려운 야심찬 기획들이 성공적으로 펼쳐집니다.

지하 1층 바깥쪽. 선큰(sunken) 구조라 전시실 복도에 빛이 가득 들어온다. 오른쪽에 보이는 작품은 2014년 개관전의 일환으로 열렸던 울라프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개인전, '콘택트'를 위해 설치되었던 작품, '인사이드 더 호라이즌 Inside the horizon'(2014)이다. 거울, 알루미늄, LED 빛이 물과 어우러져 하루종일 다양한 빛을 선사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진=정연복
지하 1층 바깥쪽. 선큰(sunken) 구조라 전시실 복도에 빛이 가득 들어온다. 오른쪽에 보이는 작품은 2014년 개관전의 일환으로 열렸던 울라프 엘리아슨(Olafur Eliasson)의 개인전, ‘콘택트’를 위해 설치되었던 작품, ‘인사이드 더 호라이즌 Inside the horizon’(2014)이다. 거울, 알루미늄, LED 빛이 물과 어우러져 하루종일 다양한 빛을 선사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진=정연복

층고가 높고 큰 전시실, 유리 패널을 통해 하루종일 다양한 각도의 빛이 비쳐드는 멋진 건축물이라면 어떤 작품들이 어울릴까요? 루이 뷔통 재단의 전시가 주목받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공간의 장점과 매력을 살리고 공간에 어울리는 뛰어난 기획입니다.

<루비 뷔통 재단>의 예술감독 수잔 파제

재단의 예술 감독은 수잔 파제(Suzanne Pagé, 1941~)입니다. 1988년부터 재단의 예술 감독으로 선임되던 2006년까지 파리 시립 현대미술관의 관장직을 맡았던 현대미술계의 거물입니다. 1986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프랑스관을 맡아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루이 뷔통 재단을 맡으면서 파제는 “방문객 각자에게 지적이고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진짜 만남의 경험을 주고자 한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현대미술의 아이콘-슈킨 컬렉션(2016.10.22-2017.03.05)을 보기 위해 관람객이 줄을 서 있다. 이 당시 루이 뷔통 재단은 프랑스의 설치 미술가 다니엘 뷔렌이 2016년 5월부터 13개의 색을 유리 돛에 입힌 '빛의 관측소 L’Obserbatoire de la lumière'가 설치되어 있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슈킨(Sergei Ivanovich Shchukin, 1854-1936)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파리를 드나들며 모네, 고흐, 고갱, 세잔과 같은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회화뿐 아니라 피카소, 마티스 등 아방 가르드 예술가들의 작품을 사모았던 러시아의 컬렉터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소장된 그의 컬렉션이 서구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전시, 소개된 것은 처음이었다. ‘슈킨 컬렉션전’은 루이 뷔통 재단의 추진력과 앞으로 펼칠 기량을 예상케 하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사진=정연복
‘현대미술의 아이콘-슈킨 컬렉션(2016.10.22-2017.03.05)을 보기 위해 관람객이 줄을 서 있다. 이 당시 루이 뷔통 재단은 프랑스의 설치 미술가 다니엘 뷔렌이 2016년 5월부터 13개의 색을 유리 돛에 입힌 ‘빛의 관측소 L’Obserbatoire de la lumière’가 설치되어 있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슈킨(Sergei Ivanovich Shchukin, 1854-1936)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 파리를 드나들며 모네, 고흐, 고갱, 세잔과 같은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회화뿐 아니라 피카소, 마티스 등 아방 가르드 예술가들의 작품을 사모았던 러시아의 컬렉터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소장된 그의 컬렉션이 서구에서 이렇게 대규모로 전시, 소개된 것은 처음이었다. ‘슈킨 컬렉션전’은 루이 뷔통 재단의 추진력과 앞으로 펼칠 기량을 예상케 하는 일종의 ‘사건’이었다. 사진=정연복

루이 뷔통 재단에서 열린 굵직굵직한 전시회만 예로 들어보면, <현대미술의 아이콘-슈킨 컬렉션>(2016.10.22-2017.03.05), <현대미술의 아이콘-모로조프 컬렉션>(2021.09.22-2022.04.03), <모네-미첼>(2022.10.05-2013.02.27), <바스키아x워홀, 4개의 손>(2023.04.05-2023.08-28), <마크 로스코>(2023.10.18-2024.04-02), <데이비드 호크니 25>(2025. 04.09-2025-09.01), <게하르트 리히터>(2025.10.17-2026-03.02) 등이 있는데요.

이미 정평이 나있는 유명 컬렉터 혹은 작가 위주의 전시로 웬만한 자금력과 기획력이 없으면 한 자리에 모으기 어려운 규모의 전시회가 열린 것이죠. <현대미술의 아이콘-슈킨 컬렉션>은 폭발적인 인기로 전시기간을 연장해야 했는데요. 12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습니다.

루이 뷔통 재단뿐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1967년 프티 팔레에서 열렸던 <투탕카멘> 전시회 이후 최고의 관람객을 끌어들인 전시회였습니다.

초기작부터 최근의 아이패드화까지 400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었던 <데이비드 호크니 25>는 90만이 넘는 관람객을 화사한 색채의 향연에 초대했습니다. 세계 각지의 미술관과 개인소장가로부터 모은 작품의 보험료만 2천만 유로(약 342억원)에 달했다고 합니다.

자금이 부족하고 복잡한 심의과정을 거쳐야 하는 국가기관으로서는 엄두를 낼 수 없는 기획이죠. 10년 전이었다면 베르나르 아르노가 후원하고 국립박물관에서 개최했을 전시회를 이젠 아르노 자신이 주최한 겁니다. 박물관들은 부러웠으나 아르노처럼 할 재간이 없는 겁니다.

직관적인 리히터의 그림과 사진들

지금 현재 열리고 있는 <게하르트 리히터> 전 역시 전시의 규모면에서 직전 전시인 <데이비드 호크니 25>에 버금갑니다. 전시는 동독의 드레스덴 출신인 게하르트 리히터가 서독으로 탈출한 직후인 1962년부터 2024년까지에 이르는 275점의 작품을 연대기순으로 따라가도록 합니다.

회화, 조각, 드로잉, 수채화, 사진을 활용한 작업 등, 극사실적인 작품에서 추상화에 이르기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양식을 시도하면서 여전히 창작열을 불태우는 화가의 전생애를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오른쪽이 '마리안 이모(1965), 왼쪽이 '루디 삼촌(1965)이다. 동독을 떠날 때 챙겨온 가족 앨범을 보며 그린 그림. 유화를 흔들리거나 빛바랜 사진처럼 그렸다. 사진=김정화
오른쪽이 ‘마리안 이모(1965), 왼쪽이 ‘루디 삼촌(1965)이다. 동독을 떠날 때 챙겨온 가족 앨범을 보며 그린 그림. 유화를 흔들리거나 빛바랜 사진처럼 그렸다. 사진=김정화

리히터 예술세계의 출발점이자 핵심을 담고 있는 <마리안 이모>(1965)와 <루디 삼촌>(1965)이 각각 타이완과 체코에서 날아와 제1 전시실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는데요. 정신병이 있던 마리안 이모는 나치에 의해 수용되어 있다가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모의 품에 안겨 있는 아이는 어린 리히터고요.

이미 지나간 소중한 과거이자 고통 없이는 돌아보기 어려운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을 흔들린 흑백 사진처럼 흐릿하게 흐리는 기법으로 그렸습니다.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그 어떤 책이나 비평을 읽는 것보다 리히터의 예술 세계를 직관적으로 느끼고 이해하게 되는데요. 구상화와 추상화의 구별뿐만 아니라 회화와 사진, 회화와 조각의 구별조차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워싱턴 D.C.의 허쉬온 미술관과 바젤의 쿤스트뮤지엄에서 온 네 그림이 전시된 방도 흥미로웠는데요. <티치아노를 따라 그린 수태고지>(1973) 네 작품입니다. 리히터는 197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갔다가 티치아노의 <수태고지>(1535)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엽서를 사옵니다. 이 엽서를 보면서 허쉬온 버전을 그리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던 리히터는 구상적인 표현을 지워나가며 여러 버전의 그림을 연속해서 그립니다.

제목이나 설명을 보지 않고 뒤의 세 그림을 보면 완전한 추상화로 보이는데, 허쉬온 버전을 보고 다시 보면 ‘수태고지’의 장면이 흐릿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의 시각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더 나아가 얼마나 정보에 종속되어 있는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불완전하고 제한적이기 때문에 우리의 감각이 인지하는 현실의 이미지를 불신한다던 리히터의 말이 이해되는 경험이었습니다.

'비르케나우'(2014). 처음에는 사진을 보고 그대로 그리려다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워나간 결과, 추상화가 되었다. 사진=김정화
‘비르케나우’(2014). 처음에는 사진을 보고 그대로 그리려다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워나간 결과, 추상화가 되었다. 사진=김정화

한 번도 프랑스에서 선보인 적 것이 없는 <비르케나우>(2014)가 최초로 전시되었다는 점에서도 이번 전시는 의미가 큽니다. 비르케나우는 악명높은 아우슈비츠의 수용소로 100만여 명의 사람들이 학살되었던 참혹한 곳입니다. 이 작품은 리히터 개인뿐만 아니라 독일인으로서, 예술가로서 외면할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한 오랜 고민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비르케나우>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시신을 태우는 일을 하던 소너코만도(Sonderkommando)의 일원이 나치 몰래 찍은 사진 네 장을 보고 그린 추상화 4점으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사진을 옮겨 그리다 만족스럽지 않아 계속 그리던 끝에 추상화가 된 겁니다.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 없지만 검은색과 붉은색, 하얀색, 초록색으로 이루어진 그림들은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끔찍한 역사의 아우성을 들려주는 듯했습니다.

2m가 훌쩍 넘는 리히터의 그림은 한쪽벽에 전시된 아주 작은 네 장의 사진과 대조를 이루는데요. 홀로코스트가 결코 망각의 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겠다는 화가의 의지로 보입니다.

전시장에 설치된 검은 유리 네 장 중 일부. 거울은 작품뿐 아니라 관람객의 모습을 비춰준다. 1967년, '네 개의 유리판'을 제작한 후 리히터는 ‘투명성과 반영’이라는 유리와 거울의 매체적 속성에 매료되었다. 유리와 거울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도 무한하게 많은 이미지를 매순간 다르게 그려준다. 무엇보다 관람객에게 작품과 자신의 모습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 사진=김정화
전시장에 설치된 검은 유리 네 장 중 일부. 거울은 작품뿐 아니라 관람객의 모습을 비춰준다. 1967년, ‘네 개의 유리판’을 제작한 후 리히터는 ‘투명성과 반영’이라는 유리와 거울의 매체적 속성에 매료되었다. 유리와 거울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도 무한하게 많은 이미지를 매순간 다르게 그려준다. 무엇보다 관람객에게 작품과 자신의 모습을 함께 바라보게 한다. 사진=김정화

<비르케나우> 맞은편 벽에는 검은색 유리 네 장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리히터의 작품뿐 아니라 관람객의 얼굴을 그대로 비춰줍니다. 예술작품을 보는 것은 결국 자신의 얼굴을 대면하는 일임을 상기하는 설치 작품입니다.

“어떤 것을 상상한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리히터의 말입니다. 이것은 예술가뿐만 아니라 작품을 보는 감상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작가가 무엇을 그린 거냐고 질문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품이 무엇을 꿈꾸게 하는지, 작품에서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이 과정을 통해 신비롭게도 우리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게 되고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전시회를 다 보고 나서며 “관람객들이 지적이고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진짜 만남의 경험을 하기 바란다”는 수잔 파제의 말을 떠올립니다. 또한 프랭크 게리가 만든 ‘지진’ 지대가 얼마나 단단한 지대에 세워져있는지를 절감합니다.

이토록 멋진 안전 지대에서 세상의 치부를 들여다보며 우리가 사는 세상에 균열을 일으킨다고 ‘자부하는’ 예술 작품을 찬탄하는 아이러니라니!

이 칼럼을 영상으로 · 4:55 루브르 털릴 때 비웃듯 개관? 파리 미술계 큰 손 루이뷔통 회장의 큰 그림?
글쓴이

정연복 미술평론가

정연복 미술평론가는 서울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현재 중앙대에서 예술사 강의를 한다. 사조의 이해나 단순지식보다는 직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이해에 관심이 많다. 삶에서 예술이 나오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림과 미술관에 관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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