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이 가벼운 계엄..그 미스터리
[박정인의 정치평론] 특이한 비상게임.. 5가지 미스터리 1. 국회 장악 왜 허술했나 2. 명령 불복종 있었나 없었나 3. 방송·통신 통제는 왜 못했나 4. 국회 의결, 왜 거부하질 않았나 5. 계엄은 끝났나 안 끝났나
평생 또다시 계엄을 겪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더구나 이렇게 황당하고 부실한 비상계엄을 겪을 줄은 정말 몰랐다. 대통령 담화가 발표될 때 마침 젊은 세대 직장인들과 저녁 자리를 파하기 직전이었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42살이었으니 아무도 계엄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였다.
대통령 담화 소식에 자리가 술렁거리자 20대 친구가 “계엄이 뭐에요?”라고 내게 물었다. 옆에 있던 또래의 대답이 이랬다. “야! 너 <서울의 봄>도 못봤어? 계엄을 모르게.” 우리 세대가 이들에게 죄를 또 하나 짓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비상계엄은 특이했다. 계엄이란 공포이고, 우리의 일상이 어제와 같을 수 없다는 경고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은 한 겨울 밤의 꿈처럼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는 세 시간 만에 사라져버렸다. 미스터리 한 계엄이었다. 분노 이전에 ‘이게 도대체 뭐지?’라는 물음표가 먼저 떠올랐다. 과거에 겪었던 계엄과 비교하자면 참을 수 없이 가벼웠다.
미스터리 1. 국회 장악이 왜 그리 허술했을까?
국회 봉쇄는 계엄의 시작이자 끝이다. 절대 다수 야당이 국회를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계엄이 성공하려면 우선 본회의를 막았어야 했다. 또 어떤 명분으로든 국회의원 과반수를 체포 또는 격리해서 화상을 통한 의결도 못하게 했어야 했다. 이게 계엄 사용설명서 1장 1조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날 밤의 국회 봉쇄 시도는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국회 통제를 처음 담당한 기관이 경찰이었다는 사실부터 의외였다. 계엄은 군의 통치인데 가장 중요한 일을 경찰에게 맡겼다. 국회 입구에 경찰병력이 배치됐지만 출입구를 봉쇄했다 열었다 하는 우왕좌왕이 반복됐다. 국회의원 중에도 우원식, 이재명, 안철수처럼 담을 넘은 경우가 있는가 하면, 아무 제지 없이 정문으로 들어간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의결 정족수가 확보됐다. 경찰청과 서울지방경찰청의 지시가 혼선을 빚어 벌어진 일이라는 후문이다.
최초 군 병력은 하늘에서 국회로 진입했다. 블랙호크 헬기 석 대에 나눠 탄 1공수 특전단 등의 병력이었다는 데 숫자는 국회를 통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시간도 늦었다. 뒤늦게 군 수송버스로 진입하려던 다른 병력은 시민에게 막혀서 문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일부 병사들은 항의하는 시민에게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비상계엄이 선포됐는데 군보다 시민들이 국회를 먼저 장악한 셈이다.
미스터리 2. 신념에 따른 명령 불복종이 있었던 건 아닐까?
국회에 진입한 병력은 방송 중계 카메라에 비친 모습을 봐도 적극적인 작전 의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본회의장 근처까지 들어가다 국회 직원과 보좌진이 소화기를 뿌리자 뒤로 돌아가는 장면도 보였다. 추가 병력 투입은 없었고 하늘에서 국회로 들어간 병력만 어정쩡하게 국회 본관 곳곳을 서성이다 상황이 종료됐다.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서 구멍이 뚫린 것일까? 계엄 사령부가 애초부터 아무 생각없이 국회를 방치한 걸까? 계엄사령관이나 특전사령관이 항명을 결심하고 일부러 ‘소극적 대응’을 주문한 것일까? 적어도 ‘국회의원들과 충돌은 피하라’는 정도의 지시 말이다. 전언에 따르면 특전사 현장 지휘관들이 ‘복수의 지시’에 헷갈려 했다고 한다. 그게 아니라면 현장 지휘관 스스로의 소신? 또는 젊은 병사들의 집단 사보타지?

미스터리 3. 언론 통제는 왜 안했을까?
필자도 그랬지만 많은 국민이 비상계엄 소식을 듣고 오래간만에 넷플릭스나 디즈니나 tvN이 아닌 뉴스 속보를 보느라 잠을 설쳤다. 속보에 나선 어느 방송도 윤 대통령에게 호의적인 분위기로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담화 내용을 객관적으로 보도했을 뿐 그 내용을 옹호하거나 뒷받침하는 보도는 거의 볼 수 없었다.
계엄의 명분을 설명한 보도라고는 TV 조선이 출연기자의 말을 통해 “야당의 무리한 탄핵 추진과 예산 삭감이 원인이 됐다”고 논평한 게 거의 전부였다. 언론 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부 언론사에 병력이 접근했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쿠데타 세력이 비상 계엄을 선포했을 때도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이 방송국이었다. 정규 프로그램은 중단되고 쿠데타의 당위성을 선전하는 방송이 이어졌다.
하물며 요즘 같은 미디어 만능 시대에 비상 계엄이라는 위험한 정치적 도박을 하면서 언론 통제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해가지 않는 행동이다. 비장하게 시작한 비상 계엄이 국회 의결로 허무하게 무효화 되는 모습을 전 국민이 생중계로 시청하게 해준 계엄 당국은 무지하거나 용감하거나 둘 중 어느 쪽인 것인지…

미스터리 4. 국회 의결을 왜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윤 대통령은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안을 참석 의원 전원 찬성으로 의결한 뒤 지금까지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한덕수 총리가 몇몇 장관들과 함께 대통령을 가까스로 설득해 국회 의결을 수용하게 했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계엄의 한복판인 것이다.
사실 극단적인 상상을 하자면 비상계엄 포고령 1호를 적용해 계엄을 그대로 밀고 가는 방법도 없지는 않았다. 포고령 1호 1항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라고 규정했다.
우기자면 국회의 의결이 계엄을 무력화할 수 있게 한 헌법 77조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치활동으로 몰아 무시하면 계엄이 생명을 연장할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계엄이라는 게 어차피 법보다는 무력을 가진 쪽의 논리에 따르는 것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장한 표정으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는 해도 뜨기 전에 빼든 칼을 칼집에 도로 넣은 이유가 뭘까? 법률가 출신 대통령이라 뒤늦게라도 법을 엄밀하게 해석한 걸까? 계엄 주도자들 사이에서 의견충돌이 있었을까? 한 총리의 간곡한 설득이 효과를 본 걸까? 계엄을 포기한 뒤 정치적 입지에 대한 계산은 무엇이었을까?
사실 설득으로 따지자면 국회 의결을 수용하라는 내각의 설득은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었다. 애초에 몸을 던져서라도 계엄 선포를 막았어야 했다. 대통령 앞에 국무위원들이 스크럼을 짜고 울면서 철회를 요구했어야 했다. 김용현 국방장관이 국무회의에 나왔으면 그를 붙잡고 ‘당신이 주동자니 당신이 해결하라’고 고함이라도 질렀어야 했다.
국무위원들과 청와대 수석들이 계엄 선포를 막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점차 진실이 드러나겠지만 지금까지 알려진 상황을 종합해 보면 그리 적극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설득하다 대통령의 미움을 산다 한들 장관, 수석 자리 며칠 일찍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정 안되면 기밀 유지고 뭐고 다 무시하고 여당 지도부에 전화라도 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참담하게 번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의 일방통행을 막지 못한 총리, 장관, 수석들보다는 시민의 힘이 훨씬 컸다. 국회에 진입하려는 군 병력을 막은 공만이 아니다. 40여년 전 비상 계엄이 선포됐을 때와는 세상이 다르다는 걸 시민들이 직접 입증했다. 계엄이 선포되고 군 병력이 진주하면 집으로 숨어들어가던 7, 80년대의 시민들이 더이상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 폭력의 현장으로 달려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총칼을 마주하더라도 안되는 건 안된다고 말할 수 있는 민주사회의 주인임을 명백하게 보여줬다.
미스터리 5. 계엄은 완전히 끝났나 안 끝났나?
그래서 나는 윤 대통령이 또다시 계엄을 시도할 수 있다는 일부의 걱정이 기우라고 생각한다. 다시 계엄을 선포한다면 시민들이 앞장서 막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날 밤 국회 앞에서 시민들과 대치했던 군 병사들의 태도도 이런 믿음에 힘을 실어준다. 그들중 일부는 이미 시민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계엄군으로 어딘가 나가야 한다면 신발을 거꾸로 신고 시민 편에 설 젊은 병사가 없을 거라고 보장하기 어렵다.
그 뿐 아니다. 제대로 계엄을 관철하려면 이번에는 수방사, 특전사, 방첩사의 병력을 최대한 동원해 국회와 언론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장악해야 한다. 광화문, 시청 앞과 여의도 같이 시민이 모일 수 있는 장소의 통제도 필수다. 그 정도의 사전 준비를 하다 보면 정보가 새 나갈 것은 불보듯 뻔하다. 새 나간 정보는 정치권, 언론, 그리고 주한 미군에게까지 재빨리 전파될 것이다. 이게 계엄군에게 ‘중과부적’이다. 계엄은 끝났다.
그날 밤 <서울의 밤>으로 계엄을 배운 젊은이들과 저녁자리를 마치고 집에 왔더니 아내가 29살 딸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엄마는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내일은 저녁약속 가지 말고 일찍 들어오라고 채근하고, 아이는 “계엄이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냐”고 항변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웬만하면 내일은 좀 조심하는게 좋겠다’”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내가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내가 아이에게 열어주려던 세상은 이게 아니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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