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 위의 뮤지엄, 이인희의 ‘뮤지엄 산’
[정연복과 손잡고, 세계의 미술관으로] 원주 오크밸리 산중턱에 세계적 뮤지엄 이인희 씨의 열정과 안도 타다오의 설계 플라워가든, 조각공원, 워터가든의 조각들 현재 전시중인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들 “마치 일기 쓰듯 살아있는 우주를 기록”
기후위기가 심각합니다. 지구의 온도는 매년 조금씩 오르고 북극과 남극의 얼음이 이미 상당히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합니다. 큰일이라고 하면서도 우리는 매일 자동차를 타고 에어컨을 틀고 엄청난 음식물을 먹어치우며 지구를 못살게 굴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역설적으로 도시의 번잡함과 열기를 피해 자연을 찾고 우리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원하죠. 오늘은 산으로 가서 자연 속의 공간, 공간과 함께 향유하는 예술을 만나볼까 합니다. 강원도 원주에 있는 세계적인 ‘뮤지엄 산’ 이야기입니다.
처음 개관했을 때인 2013년에는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그 먼 곳에 누가 찾아오기나 할까 우려가 많았다고 하는데요. 지금은 연간 2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되었습니다. ‘뮤지엄 산’이 어떤 곳인지 둘러본 다음, 지금 전시중인 우고 론디노네를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인희의 염원 ‘뮤지엄 산’
‘뮤지엄 산’은 한솔문화재단이 운영 관리하고 있는 곳입니다. 고(故)이인희(1928~2019) 전 한솔그룹 고문은 우리 고미술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선친 이병철(삼성그룹 창업주) 회장을 가까이 지켜보면서 40여 년간 300여 점의 작품을 수집했습니다.
이 고문은 먼저 1997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종이박물관을 개관합니다.(한솔그룹의 모기업인 한솔제지는 제지전문기업이죠) 박물관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2006년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타다오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오랜 준비 끝에 2013년 5월, 한솔뮤지엄이 문을 열었습니다. 기존의 종이박물관 소장품은 페이퍼갤러리에서 상설 전시되고, 그 외의 공간과 야외 공간에 다양한 조각과 기획전시가 매년 새롭게 소개되고 있어요. 한솔뮤지엄은 2014년 3월, ‘뮤지엄 산’(Museum SAN)으로 명칭을 변경합니다.

뮤지엄 산은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해발 275미터에 길쭉하게 펼쳐져 있는데요. 대지면적이 7만 1,172m2에 달합니다. 건축물은 세모와 네모, 둥근 형태 등 다양한 기하학적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이렇게 구획된 공간이 하늘과 물과 어우러져 매혹적인 빛을 펼쳐줍니다. 조망도를 보면 웰컴센터에서 뮤지엄본관을 거쳐 명상관, 제임스 터렐관에 이르기까지 700m에 이릅니다.

천천히 오래 머물며 오감으로 느끼면서 조금씩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는 길에 펼쳐진 조각과 꽃, 물과 어우러진 건축물, 탁 트인 자연경관에 머물다 보면, 왜 이곳이 공간, 아트, 자연(Space, Art, Nature)을 표방하는 뮤지엄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도착하면 터렐관과 명상관 관람을 여유있게 예약하는 것이 좋습니다.
플라워가든과 황조롱이 새

웰컴센터를 지나면 플라워가든이 나오는데요. 사방이 개방된 산 위의 평지를 보는 순간, 도심에 찌든 마음이 다 씻겨 내려가는 듯한 해방감이 느껴집니다. 5월에 가면 패랭이꽃이 온 들판을 화려하게 수놓은 장관을 볼 수도 있어요. 너른 들판에 전시된 마크 디 수베로(Mark Di Suvero)의 ‘제라드 먼리 홉킨스를 위하여 For Gerard Manley Hopkins’(1995, 강철, 1040x1525x1525cm)는 건축 폐기물인 H-빔을 재활용하여 새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윗부분이 움직이는 키네틱 아트로, 조각가가 제라드 먼리 홉킨스(1844~1889)의 시 ‘황조롱이새(Windhover)’에서 받은 감흥을 나타낸 작품이라고 합니다.
성공회 사제였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해 사제 서품을 받은 종교인이자 시인이었던 홉킨스는 자연을 관찰하고 기리는 시를 많이 남겼는데요. ‘황조롱이새’는 “거친 아름다움, 용기와 행동, 공기, 자부심, 깃털”을 언급하며 새의 힘찬 날갯짓을 예찬합니다.
큰 바람을 가르며 나는 새처럼 자연 속에 우뚝 선 붉은 조각, 산업 폐기물로서의 운명을 극복하고 새의 모습으로 환생한 조각은, 새이면서 어떻게 보면 하늘에 가 닿으려는 인간의 희구(hover는 ‘맴돌다’라는 뜻)의 몸짓으로도 보입니다.
플라워가든에 들어간 후 왼쪽으로 조금 들어가면 오귀스트 르누아르, 세자르 발다치니, 에릭 오어 등 세계적인 조각가의 작품이 전시된 조각공원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개관 10주년을 맞이하여 2023년 새로 지은 ‘빛의 공간’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이바라키에 있는 ‘빛의 교회’의 컨셉에 따라 규모를 작게 해서 지은 파빌리온인데요. 천장에 만들어둔 십자 모양의 틈새로 들어오는 빛이 공간을 더없이 성스럽게 해줍니다.

워터 가든과 리버만의 아치웨이
조각공원에서 나와 플라워 가든을 따라가면 180그루의 하얀 자작나무로 이루어진 가로수길을 지납니다. 이어서 나타나는 워터 가든에서는 뮤지엄 건축물과 물, 알렉산더 리버만(Alexander Liberman)의 ‘아치웨이 Archway’(1997, 강철, 800x800x1200cm)가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리버만 역시 수베로처럼 H-빔과 파이프와 같은 산업폐기물을 재활용하여 작업하는데요. 사선으로 절묘하게 자른 파이프들이 간결하면서도 강렬합니다. 붉은색의 ‘아치웨이’는 물과 산, 야트막한 2층 건물에 강렬한 포인트를 주면서, 건축물과 자연과 함께 예술을 감상하는 뮤지엄 산의 컨셉을 집약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뮤지엄 본관
뮤지엄 전체 공간의 내외벽은 미니멀한 노출 콘크리트와 경기도 파주에서 채굴한 연한 주황색의 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노출 콘크리트가 차갑고 기하학적인 느낌으로 전체 틀을 잡아준다면 깨진 돌 모양 그대로 자연스럽게 배열된 돌벽은 편안함과 따뜻함을 더합니다.

뮤지엄 본관은 페이퍼 갤러리와 청조갤러리, 백남준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전시실에는 창문이 없지만 동선을 따라 내부를 다니다 보면 뾰족하거나 둥근 구조물, 비스듬히 올라가는 길을 따라 좁게 난 창문, 복도의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큰 창문으로 하늘, 물, 돌과 산을 보게 됩니다. 주변의 자연은 뮤지엄 안으로 들어오고 뮤지엄을 관람하는 관람객은 뮤지엄 바깥을 보면서 새로운 공간으로 미끄러져 가는 듯한 경험을 합니다.
바로 위 사진은 페이퍼 갤러리로 올라가기 전 1층에 있는 창문인데요. 아래쪽에 낮게 창을 내어 물을 실내로 끌어들입니다. 풍경이 뮤지엄과 하나가 되면서 개방감과 함께 관람객은 절제된 빛의 향연에 잠기게 되는 거죠.
상설 전시중인 페이퍼갤러리

페이퍼갤러리는 1997년 문을 연 한솔종이박물관을 이어받아 3개의 전시실에 종이의 역사와 종이로 만든 다양한 공예품과 문화재들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한지뿐 아니라 전세계의 종이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다양한 시각 자료와 교육, 체험 프로그램이 항시 전시, 운영되고 있습니다.
우고 론디노네展 ‘Burn to shine’
뮤지엄 산은 2013년 5월 개관할 때부터 소장 작가들의 작품을 주제별로 의욕적으로 기획 혹은 상설 전시하고 있는데요. 2023년에는 개관 10주년을 맞이하여 뮤지엄 산을 건축한 안도 타다오 전시가 열렸습니다. 개막 3개월만에 10만 명의 관람객이 찾으며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죠. 때마침 ‘빛의 공간’이 문을 열면서 전시는 12월 초까지 연장되어 관람객을 맞이했습니다.
올해는 4월 6일부터 9월 18일까지 우고 론디노네의 전시, ‘Burn to shine’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고 론디노네는 1964년 스위스 태생의 조각가인데요. 회화, 설치, 조각, 영상 등 40여 점의 작품이 청조갤러리와 백남준관, 스톤가든에 형형색색 생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청조갤러리에는 유리로 만들어진 11개의 말 조각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아주 단순한 형태에 투명한 푸른빛을 띠고 있는 조각들은 ‘에게해’, ‘켈트해’, ‘보퍼트해’ 등 바다 이름으로 불립니다.
“나는 마치 일기를 쓰듯 살아있는 우주를 기록한다. 내 앞에 있는 바로 이 태양, 구름, 비, 나무, 동물, 계절, 오늘 바로 이 시간, 바람, 흙, 물, 풀소리, 바람 한 줄기, 고요, 이 모든 것을 기록한다.”

스톤가든에 전시된 수도승과 수녀 시리즈는 석회암으로 작게 조각한 것을 3D 프린터로 확대 스캔하여 청동으로 주조한 것인데요. 이 조각을 보면 로댕이 조각한 <발자크상>이 떠오릅니다. 발자크는 19세기 초중반, 온갖 탐욕으로 괴로워하는 인간군상들을 그렸던 프랑스의 작가입니다. 로댕은 세부적인 묘사는 과감히 생략하고 세상에 거리를 두고 내려다보는 듯한 절묘한 포즈로 작가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억겁의 시간을 품은 돌로 된 정원, 인간이 쌓아올린 건축물, 이 모든 것을 품고 자연 속에 서 있는 론디노네의 조각들은 처음부터 거기 서 있었던 것 마냥 관람객을 마주하고 바라봅니다.
인터뷰에서 작가는 말합니다. ”전시 주제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지속성에 관한 사유입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자연에 관심을 기울여야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순환입니다.” 14분 길이의 영상물 ‘Burn to shine’은 론디노네의 주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줍니다. 해가 지면 다시 떠오르듯 삶이 다 하면 죽음이 오고 죽음 너머에는 삶이 있다는 것을 18명의 무용수와 12명의 타악기 연주자들이 춤과 음악, 뜨거운 불꽃으로 펼쳐줍니다.
“내 모든 작업의 토대는 자연이다.” 론디노네는 태양, 구름, 바다, 산 등 자연을 주로 다루며 우주 속에서 살고 죽는 우리 자신을 직면하게 합니다. 주제는 묵직한데 기법은 전위적입니다. 파리의 방돔 광장에 설치했던 ‘여름달’은 올리브나무 본을 떠서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것이고, 미국 캘리포니아에 설치한 ‘세븐 매직 마운틴스’는 다양한 색깔로 칠한 돌을 쌓아올리는 방식으로 작업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선사시대의 스톤헨지에서부터 다양한 지역의 민속예술, 21세기 팝아트까지 연결한다는 느낌이 듭니다.
제임스 터렐관과 명상관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 9개의 스톤마운드가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이 신라고분을 생각나게 하죠. 건축물을 지을 때면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담으려는 건축가의 뜻으로 우리 역사에서 모티프를 따 만든 공간입니다.
멋진 소나무와 단풍나무, 해외 작가의 조각품을 관찰하면서 걷는 길은 역사와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고, 결국 우리 자신에게 가는 길입니다. 이 길의 입구에는 스톤가든과 비슷한 외관을 가진 명상관이, 그 끝에는 ‘공간에서의 빛’을 통해 우주 안에서의 ‘나’를 발견하게 하는 제임스 터렐관이 있습니다.
미술관은 작품을 보는 곳이 아니라 ‘나’를 만나고 ‘우주’를 만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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