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워싱턴 D.C.의 필립스 컬렉션

[정연복과 손잡고, 세계의 미술관으로] 美 워싱턴DC에서 만난 매혹적인 미술관 던컨 필립스, 1921년 “현대미술의 흐름 공유” 그레코, 고야, 보나르, 마네, 호퍼, 에브리 등 르누아르의 유명한 작품도 걸려있고, ‘마크 로스코’ 방, 꼭 찾아봐야할 공간

왼쪽부터 프란시스 베이컨의 ‘풍경 속의 인물탐구’(1952),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의 집’(1890),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1880-1881)이 나란히 걸려 있다. 사진=정연복
왼쪽부터 프란시스 베이컨의 ‘풍경 속의 인물탐구’(1952), 빈센트 반 고흐의 ‘오베르의 집’(1890),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1880-1881)이 나란히 걸려 있다. 사진=정연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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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도 워싱턴D.C.는 박물관 도시이기도 하답니다. 미국을 상징하는 박물관인 내셔널 갤러리를 포함, 무려 70개 이상의 박물관이 있습니다. 국립 아프리카 미술관, 국립 아메리카 인디언 박물관, 국립 자연사 박물관 등 그 종류와 규모가 세계 최고입니다. 박물관과 미술관은 자칫 밋밋한 행정수도에 그칠 수도 있었던 워싱턴D.C.를 보석처럼 빛나게 해준다고 할 수 있어요. 그 덕분에 매년 수백 만명의 관람객을 불러모읍니다.

미국의 수도 위싱턴 D.C.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 내셔널 갤러리. 사진=정연복
미국의 수도 위싱턴 D.C.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 내셔널 갤러리. 사진=정연복

매혹적인 미술관 ‘필립스 컬렉션’

이곳에 작지만 ‘매혹적인’ 미술관이 있습니다. 바로 필립스 컬렉션(The Phillips Collection)인데요, 5천여 점의 소장품을 자랑합니다.

워싱턴 대부호의 아들인 던컨 필립스(Ducan Phillips, 1886-1966)는 1917년과 그 이듬해에 연이어 아버지와 형을 잃습니다. 상심에 빠진 던컨은 가족이 수집한 예술품을 공개하기로 합니다. 던컨에게는 문화적 전통과 새로운 예술운동에 목말라 하는 미국민들에게 현대미술의 흐름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포부가 있었어요. ‘필립스 기념 컬렉션 갤러리’라는 이름의 현판을 걸고 작품들을 일반에게 공개한 때가 1921년입니다.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이 1929년에 문을 열었으니, 필립스 컬렉션이 20세기 미국 미술에 끼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립스 컬렉션 외관. 왼쪽 건물이 1921년 문을 열었던 본관이고 오른쪽 건물은 1960년대 세워진 별관. 1989년에 일본의 기업가 야스히로 고(Goh)의 후원으로 개보수 공사가 이루어져 고 별관(Goh Annex)으로 불린다. 사진=정연복
필립스 컬렉션 외관. 왼쪽 건물이 1921년 문을 열었던 본관이고 오른쪽 건물은 1960년대 세워진 별관. 1989년에 일본의 기업가 야스히로 고(Goh)의 후원으로 개보수 공사가 이루어져 고 별관(Goh Annex)으로 불린다. 사진=정연복

필립스 컬렉션은 워싱턴D.C.의 박물관들이 몰려있는 내셔널 몰(National Mall)에서 좀 떨어진 듀퐁 서클 인근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습니다. 1897년 지어진 필립스 가의 저택이 미술관이 되었기 때문에 주택가의 명물이 된 것이죠. 소장 작품이 많지 않아 처음에는 단 두 개의 방에 전시했습니다. 그런데 미술관 개관 후 던컨은 열정적으로 작품을 수집합니다. 작품수가 많아지자 1930년에는 저택 전체를 미술관으로 만들게 됩니다.

“세계 최고의 작품을 전시하는 ‘작고 내밀한’ 미술관을 만들고 싶다. 미술관은 생존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미적 체험과 연구 결과를 보여주는 연구실이 될 것이다.”

이러한 던컨의 바람에서 엘 그레코, 프란시스코 고야에서부터 피에르 보나르, 오노레 도미에, 에두아르 마네 등 유럽의 주옥 같은 작품 뿐아니라, 당시 크게 주목받지 못하던 생존 작가들의 작품이 다수 컬렉션에 합류합니다.

던컨이 50여 년 동안 수집한 2천여 작품 중 1400점이 미국의 생존 작가의 작품입니다. 덕분에 조지아 오키프, 에드워드 호퍼, 밀턴 에브리, 존 마린 등의 작품을 이곳 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는데, 말하자면 필립스 컬렉션은 MoMA보다 먼저, 미국 최초로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고 예술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06년에는 규모가 큰 컨템퍼러리 작품 전시와 강연장 등을 위해 2800㎡의 공간을 확충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우아한 계단은 필립스 컬렉션의 또 다른 볼거리입니다.

필립스 컬렉션 건물 별관에 있는 아름다운 계단. 사진=정연복
필립스 컬렉션 건물 별관에 있는 아름다운 계단. 사진=정연복

무엇보다 필립스 컬렉션을 대표하는 작품은 <뱃놀이 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입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1880년에서 1881년 사이 샤투(Chatou)에서 그린 그림이죠. 샤투는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17㎞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인데, 센 강변에 있는 식당 ‘라 푸르네즈’에서 그렸습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 1880-1881. 사진=정연복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뱃놀이하는 사람들의 점심식사’, 1880-1881. 사진=정연복

뒤랑-뤼엘가(家)에 있던 르누아르의 작품들

야외에서 소풍을 즐기거나 간단히 식사하는 장면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다루던 소재인데요, 왼쪽 멀리 센강에 떠있는 돛단배, 테이블보나 인물들의 등, 얼굴, 목덜미에 어린 찬란한 햇살이 삶과 청춘의 예찬처럼 보입니다.

르누아르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왼쪽에 모자를 쓴 채 강아지를 어르고 있는 여인은 당시 막 사랑에 빠진 르누아르의 약혼녀 알린 샤리고입니다.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남성은 인상주의 화가이자 컬렉터인 귀스타브 카유보트이고요. 약혼녀 알린 살리고 뒤에 모자를 쓰고 난간에 기대고 있는 남녀는 식당 주인의 아들과 딸이라고 합니다. 넓지 않은 공간에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앉거나 서서 대화를 하거나 상념에 빠져 있습니다.

던컨 부부가 르누아르의 이 그림을 처음으로 본 것은 1923년 6월 프랑스 여행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유명한 화상인 폴 뒤랑-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의 아들인 조젭 뒤랑-뤼엘의 집에서였지요. 뒤랑-뤼엘의 아들들은 얼마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수집한 인상주의 작품들을 팔고 싶어했죠. 젊은 예술애호가 부부는 벽을 뒤덮고 있는 그림들에 하도 강한 인상을 받아서 기품있고 정성스레 꾸며져 있던 그 집의 어떤 실내장식이나 가구도 전혀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별관 2층에 있는 마크 로스코의 방. 가운데 의자는 '색면과 함께 깊은 성찰에 잠기라'는 화가의 의지의 표현이다. 사진= 연합뉴스
별관 2층에 있는 마크 로스코의 방. 가운데 의자는 ‘색면과 함께 깊은 성찰에 잠기라’는 화가의 의지의 표현이다. 사진= 연합뉴스

“깊은 내면에 빠져라”는 마크 로스코방

필립스 컬렉션의 마크 로스코방은 절대 놓쳐서는 안되는 공간입니다. 이 방은 1960년에 만들어졌는데요, 던컨과 마크 로스코의 뜻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작은 방에는 <붉은 바탕에 주황과 빨강>(1957), <붉은 바탕에 초록과 오렌지색>(1956), <붉은 바탕에 갈색과 빨강>(1954), <초록과 적갈색>(1953). 이렇게 네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방이 작기도 하지만, 고요하게 색면을 마주하라는 화가의 뜻을 존중해 한 번에 최대 8명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방에 들어서면 마크 로스코의 말이 떠오릅니다. “나는 추상화가가 아니다. 색이나 형태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비극이나 운명, 인간 본연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만 관심이 있다”, “나는 예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생각하게 하기 위해 왔다.” 화가는 자신의 그림을 40㎝ 앞으로 다가와서 보라고 권합니다. 색깔과 캔버스를 물성으로 대하지 말고 거대한 색면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그림을 보다 보면 무한한 우주 혹은 깊은 내면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미술관은 마음껏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놀이터이다.”

던컨 필립스의 말입니다. 가로지르며 겹쳐보고 뒤집어보라는 거죠. 필립스 컬렉션의 작품들이 사조나 국가, 연대와 상관없이 ‘뒤죽박죽’ 전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르누아르 옆에 반 고흐와 프란시스 베이컨이, 도미에 맞은편에 존 슬론의 그림이 걸려있는 식이죠. 다양한 화풍과 다른 시대의 그림들 속을 산책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미술관. 필립스 컬렉션의 매력입니다.

글쓴이

정연복 미술평론가

정연복 미술평론가는 서울에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현재 중앙대에서 예술사 강의를 한다. 사조의 이해나 단순지식보다는 직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이해에 관심이 많다. 삶에서 예술이 나오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림과 미술관에 관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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