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황진규 음악 칼럼니스트
  • 오비추어리
  • 입력 2024.03.28 17:34
  • 수정 2024.04.03 09:56

존경하는 마우리치오 폴리니 선생님께

[마우리치오 폴리니를 추모하며]
'피아노의 황제'라 불리던 음악가
쇼팽 곡에 대한 가장 정확한 연주
'좌파 음악가'로 알려져...한국엔 안와
외트비시 페테르와 함께 천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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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실연을 볼 수 없다는 절망

저는 선생님의 쇼팽 폴로네즈 음반(DG)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1976년에 세상에 선을 보인 뒤로 선생님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동시에 지금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녹음 음반이죠. 명징하고 강력하며 기교적으로 완벽하다는 이유로 찬사를 보내는 이도 있고, 냉정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이 얼마나 의미가 있겠습니까만, 저는 두 의견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합니다. 지극히 선생님다운 연주라는 사실 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 마우리치오 폴리니 선생님께서 3월 23일 82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낭패감이었습니다. ‘이제 선생님을 직접 볼 기회가 없겠구나’하는 생각 말이죠. 지인 몇 명이 선생님을 뵈러 유럽까지 다녀온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을 때도, 그저 입만 벌린 채 듣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저도 가려고 했지만 게으름뱅이의 속 편한 핑계대로 ‘어쩌다 보니’ 여의치가 않았었죠. 그런 제가 선생님에 대한 추도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인연이라고는 그저 여느 음악 애호가 수준밖에 없는 제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대표해 이 추도사를 쓰려고 합니다.

지난 3월 23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타계한 '피아노의 황제' 마우리치오 폴리니
지난 3월 23일 향년 82세의 나이로 타계한 '피아노의 황제' 마우리치오 폴리니

미켈란젤리의 영향을 뛰어넘어

선생님은 1942년 1월 5일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셨죠. 아버지가 유명한 건축가였던 덕에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내셨던 것으로 압니다. 피아노를 공부한 것 외에 밀라노 음악원에서 작곡과 지휘를 공부하기도 하셨죠. 1957년에는 제네바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2등을 하셨고요. 이때 우승한 아르헨티나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는 친구가 되신 걸로 압니다. 18세 때인 1960년에는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는데, 이때 심사위원장이었고 쇼팽 해석의 권위자였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저 아이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피아노를 잘 친다”고 찬탄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여느 피아니스트였다면 이 성공을 계기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활발하게 공연을 가졌을 겁니다. 아니, 그러기 싫어도 주변에서 부추기거나 계약 때문에 그렇게 되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1년 동안 공연을 일절 갖지 않으면서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쇼팽 스페셜리스트라는 딱지가 붙는 게 싫어서 그랬다는 말도 있지요.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에게서 반년간 배운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죠.

선생님의 연주를 들어보면 미켈란젤리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미켈란젤리의 장기이기도 했던 드뷔시에서 그렇죠. 섬세하기 짝이 없는 터치와 미묘한 음색 변화 같은 것 말입니다. 물론 미켈란젤리만큼 탐미적이지는 않지만, 그건 어떤 피아니스트에게도 애초에 불가능한 게 아닐까 싶네요. 하지만 드뷔시 외에 몇 군데에서 겹치기는 해도, 선생님의 레퍼토리는 미케란젤리와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고전 지향적인 미켈란젤리와는 달리 선생님은 근대 레퍼토리, 심지어 동시대 음악까지도 편견 없이 폭넓게 받아들였으니까요.

편견없이 새로움을 향한 도전과 탐구

피에르 불레즈 같은 음악가는 작곡가로서나 지휘자로서나 선생님의 든든한 맹우가 되어주었고, 선생님은 그밖에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 브루노 마데르나 등 여러 현대 작곡가들의 음악을 평생에 걸쳐 줄기차게 연주했습니다. 심지어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2006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같은 행사에서도 말이지요. 이때 연 독주회 후반부의 프로그램을 선생님이 베베른과 불레즈의 곡으로 임의로 바꿔 연주하는 바람에 청중의 상당수가 중간에 나가 버렸다고 하더군요.

선생님께서 지휘도 했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 연주자나 성악가가 경력 중후반에 지휘를 겸업하거나 아예 지휘자로 전향하는 것은 그리 드물지 않은 일이지요. 신체적인 변화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기량도 체력도 쇠퇴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음악을 대하는 관점이 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 폭넓은 관점에서 음악을 대하고자 하는 욕구가 자연히 그렇게 이끈다는 겁니다. 특히 협주곡의 경우, 독주부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파트까지 장악한다면 사실상 곡을 자신의 뜻대로 해석할 수 있게 되니 커다란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생님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같은 경우에는 일찍부터 지휘를 겸해서 연주하기도 하셨지만, 지휘자로서 본격적으로 무대에 선 것은 1981년의 일이었습니다. 페사로에서 열린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이 작곡가의 오페라 <호수의 여인>을 지휘한 것이죠. 이에 대한 평단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로시니 특유의 어법에 정통한 해석이라는 찬사와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데다 템포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비판이 공존했지요. 어쨌거나 이후에도 선생님은 기회가 될 때마다 종종 지휘 무대에 섰습니다만, 그게 선생님을 지휘자로 각인시킬 만큼 자주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생전에 하얀 셔츠를 받쳐입은 연주복을 입고 열연하는 모습의 마우리치오 폴리니
생전에 하얀 셔츠를 받쳐입은 연주복을 입고 열연하는 모습의 마우리치오 폴리니

한국을 방문하지 못한 안타까운 이유

저를 비롯해 국내의 많은 음악 애호가가 품었던 의문이 있었지요. ‘왜 폴리니는 우리나라에 오지 않는 것일까?’ 옆 나라 일본에는 자주 가셨으면서 말입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기량이 떨어져 가는 마당에 새로운 청중을 만날 수는 없다’고 하셨다지요. 사실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2014년에도 라인가우 뮤직 페스티벌 데뷔 무대를 가질 정도로 평생 새로운 도전을 꺼리지 않으신 분이니 말입니다.

설령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왜 그 이전에는 안 오셨는지 의문입니다. 수익성 문제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정치적 문제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선생님은 공산주의자였으니까요. 1960~70년대에 작곡가 루이지 노노,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더불어 이탈리아 음악계에서 좌파 행동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신 것도 그 일환이었고요. 어느 독주회에서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발언을 한 것 때문에 청중이 소란을 일으킨 나머지 경찰이 개입해야 했다는 것은 꽤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역시 뼛속까지 예술가였다고 해야 할 겁니다. 정치적으로 반대되는 신념을 가진 음악가라도 예술적으로 뜻이 맞으면 함께 일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셨으니까요. 물론 이탈리아의 정치에 대해 만년까지 날카로운 발언을 그치지 않으신 것은 그와 별개의 문제겠지요.

선생님은 같은 밀라노 태생으로 평생에 걸친 친구이자 음악적 동반자였던 클라우디오 아바도(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지낸 분이죠)가 2014년에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큰 충격을 받았고, 점차 대외 활동을 줄여나가셨지요. 그렇기에 2022년 5월에 내한공연을 두 차례 열 예정이라는 소식이 공표되었을 때 우리나라 음악 애호가들이 느낀 흥분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매는 문자 그대로 전쟁이었고요. 하지만 과연 이 공연이 무사히 열릴 것인지 우려하는 시각도 많았습니다. 결국 이 공연은 선생님의 건강 문제를 이유로 이듬해 4월로 연기되었고, 그마저도 결국 취소되고 말았죠. 선생님의 열렬한 팬이던 제 지인 하나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견디다 못해 숫제 유럽까지 가서 선생님의 공연을 '직관'하는 영예를 스스로에게 베풀더군요. 저는 여건이 안 돼서 따라가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위대한 예술가 세월을 그냥 보내자 않아

선생님은 21세기 들어서도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녹음 활동을 이어가셨는데, 이 시기의 녹음들은 이전과 다르다는 지적을 종종 듣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 2008년에 녹음하신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권’(DG) 녹음을 무척 아끼고 있습니다. 이 음반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단정하고 이지적인 해석의 대명사와 같았던 선생님한테서 이렇게 따뜻하고 정감 어린 연주가 나올 줄은 미처 몰랐거든요. 역시 '위대한 예술가는 세월을 그냥 보내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제2권’을 끝내 내놓지 않으신 게 얼마나 아쉬운지 모르겠습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 바흐의 곡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 1권'

선생님,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고민하던 도중에 외트뵈시 페테르(헝가리인이라 우리처럼 성부터 표기하는 게 옳다고 하지요) 작곡가가 타계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3월 24일에 향년 80세로 돌아가셨다는군요. 선생님께서 타계한 바로 다음 날이죠. 참으로 불경스러운 얘깁니다만, 소식을 듣자마자 ‘혹시 선생님께서…?’ 하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생전에 동시대 음악을 조명하는 데도 무척 열심이셨으니까요. 외트뵈시의 죽음은 국내의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적잖은 충격일 터입니다. 그는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의 상주 작곡가로서 활동할 예정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사람이 그 어떤 계획을 세우더라도, 그것을 이루느냐 아니냐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게 맞나 봅니다. 아무려나 두 위대한 음악가를 연이어 떠나보내게 되어 음악계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부고 기사마다 두 분을 묶어서 쓰고 있네요. 저 역시 여기서 그러고 있고 말입니다. 사실 국내에는 선생님은 알아도 외트뵈시는 모르는 이가 많은데, 이 자리를 빌어 이름이라도 전하고 싶었습니다. 저 역시 그의 음악을 몇 번 접해본 입장이라 감회가 없지 않고 말입니다. 덕분에 부디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기를 빕니다. 이제 뒷일은 후학들(역시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아드님 다니엘레 폴리니를 포함해서 말이죠)에게 맡기고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 황진규 음악 칼럼니스트는 월간 <그라모폰 코리아>에서 편집기자로 근무했으며, 월간 <코다>, <인터내셔널 피아노>, <스트라드>, <스트링 앤 보우>, <콰이어 앤 오르간>, <안단테>, <라 뮤지카>, <월간 SPO> 등의 잡지에 원고를 기고하였다. 또 서울시립교향악단, KBS교향악단, 서울스프링실내악음악제, 금호아트홀 등의 프로그램 노트를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