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홍성광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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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3.25 11:17
  • 수정 2024.04.01 08:35

'삶이 고통'이라던 대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사랑

[홍성광의 독일 철학자들의 사랑 이야기]
염세주의자라고? 이렇게 다양한 사랑을
바이마르 대공의 애첩을 흠모하기도
오페라 가수와 교제...'연금 배분' 유언 남겨
17세 소녀와 사랑 실패로 끝나자 독신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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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그동안 프리드리히 니체에 비해 존재감이 미미했던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가 최근 들어 국내에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삶이 고통스럽다고 외치는 그의 철학에 공감하는 청춘이 많아서 그런 모양이다. 그는 1833년부터 프랑크푸르트에 정착해 고독하게 살면서 친구도 아내도 없었다. 처음에 쇼펜하우어의 대표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열광하다가 후일 그를 우울한 예언자라며 비판하는 쪽으로 돌아선 니체는 자신의 유고집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매일 아침 쇼펜하우어를 뿌리치고 나왔다가는 저녁이 되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만다.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쇼펜하우어는 나보다 더 완전하고 순수하며 이해심이 있었다. 광기도 나보다 약간 더 심했다.”

쇼펜하우어는『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두에서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우리가 표상, 즉 사물의 현상 만을 인식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세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표상이 아닌 신체를 제시하고 있다. 칸트는 사물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고 했지만, 쇼펜하우어는 신체에서 의지를 감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란 개념은 일반적인 의미의 뜻뿐만 아니라, 인간의 맹목적인 감성인 ‘욕망’, ‘욕구’, ‘갈망’, ‘추구’, ‘노력’, ‘고집’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쇼펜하우어는 또한 이 개념을 넘어서 식물의 성장을 가능케 하는 힘, 광물이 결정을 만드는 힘, 나침반이 북쪽을 향하는 것, 중력의 작용 등을 모두 의지로 보았다. 이처럼 그는 의지를 자연과 우주 속에 있는 모든 힘이라고 표현한다.

쇼펜하우어는 우리의 모든 삶이 고통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행위가 이기주의에 지배되기 때문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나의 탐구가 가져다준 가장 큰 결실은 쇼펜하우어였다. 그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

연민과 온정의 철학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이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동고(同苦)와 연민에 근거한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한다. 이기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려면 자신과 타자를 동일시해야 한다. 그러면 타인은 ‘나 아닌 존재’가 아니라, ‘또다른 나’가 된다. 타인의 고통은 단지 ‘그의 고통’만이 아니라 ‘나의 고통’이기도 한 것이다. 그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를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삼는 윤리학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이러한 통찰이 ‘이것이 너다tat twam asi’라는 우파니샤드 철학에 표현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즉 괴롭히는 자와 괴롭힘을 당하는 자 모두 같은 본질을 지닌 하나라는 것이다. 모두가 하나임을 깨달은 자는 모든 생명체를 자기와 같이 여기고, 남을 괴롭히지 않는다. 이러한 인식에서 진정한 연민이 나오고, 이기심 없는 참된 덕인 온정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동물 권리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아무도 해치지 말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을 도와라”라는 것이 그의 철학의 핵심이다.

어머니 요한나와의 갈등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요한나(Johanna Schopenhauer)는 부자 남편과 결혼해서 유복한 생활을 했지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평범한 사업가와의 따분한 결혼생활에 점차 싫증을 내게 되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자 모자간의 불화가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남편이 죽은 다음 해인 1806년 요한나는 아들을 함부르크에 남겨두고 딸 아델레(Adele)와 함께 괴테가 살고 있는 바이마르로 이사를 떠났다. 바이마르를 선택한 것은 무미건조한 남편과 행복을 누리지 못했으므로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기에 좋은 그곳에서 마음껏 사교생활과 연애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아버지에게 애착을 지닌 쇼펜하우어는 나이 어린 남자와 사귀는 등 경조부박(輕佻浮薄)한 생활을 하는 어머니에게 햄릿이 재혼한 어머니에게 품었던 것과 같은 반감을 품게 되었다. 어머니는 비판적이고 사사건건 따지며 언쟁을 벌이는 집요한 성격의 아들을 성가시게 생각했다.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학위 논문 『충분근거율의 네 가지 뿌리』를 높이 평가해 요한나에게 "부인의 아들은 장래 반드시 유명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한 집안에서 두 명의 천재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1814년 5월 어머니와 다투다가 자신을 계단 밑으로 밀쳐버렸을 때 쇼펜하우어는 "어머니는 이 일로 후세에 철학사에 남을 것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드레스덴으로 떠나버렸다. 이후 24년 동안 모자는 다시는 만나지 않았고, 두 사람의 불화는 끝내 풀리지 않았다.

대공의 애첩 '카롤리네 야게만'에게

우리는 평생 독신으로 지낸 근엄한 얼굴의 쇼펜하우어가 여성은 거들떠보지도 사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재기가 넘치고 유머러스한 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 여성을 사귀기도 했으며, 니체와는 달리 금욕적인 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여자를 좋아한 것으로 보인다.

1809년 쇼펜하우어가 바이마르에 머물면서 뒤늦게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때의 일이다. 그는 배우이자 오페라 가수인 카롤리네 야게만(Karoline Jagemann)을 짝사랑한다. 그녀의 연기와 노래 실력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한때의 풋사랑이었다. 이때 쇼펜하우어는 21세였지만, 그녀는 32세로 바이마르의 대공 아우구스트의 애첩이었다. 1809년, 대공은 야게만에게 귀족 작위와 저택을 하사했다. 쇼펜하우어는 다소 가무잡잡한 피부와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의 늘씬한 여성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데 야게만은 아담한 체구에 피부가 하얀 금발로 그의 이상형과는 달랐다. 야게만한테 완전히 빠진 그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설령 야게만이 거리에서 구걸하는 비천한 여자라 할지라도 나는 그녀와 결혼했을 겁니다.”

바이마르 연극계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막강해서 괴테조차 그녀 앞에서는 한 발 물러서야 할 정도였다. 그녀의 뜻을 거스르는 극장은 문을 닫을 각오를 해야 했다. 한번은 신파극 <디데 산의 개>를 공연하는데 대공의 애첩 야게만과 괴테의 의견이 갈렸다. 괴테의 부인 크리스티네가 죽은 다음 해인 1817년의 일이었다. 그녀는 공연 시 개를 무대에 등장시키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괴테는 이를 만류했다. 그래서 애첩과 괴테의 관계가 껄끄러워졌다. 그런 와중에 괴테는 극장 총감독직 해약 통보를 받았다. 아우구스트 대공은 계몽 군주였지만 괴테와 애첩 사이에서 애첩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바이마르를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 만든 군주일 뿐 아니라 1816년 독일 역사상 최초로 민주헌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1824년부터 야게만은 궁정극장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바르마르의 아우구스트 대공의 애첩 카롤리네 야게만(Karoline Jagemann)
바르마르의 아우구스트 대공의 애첩 카롤리네 야게만(Karoline Jagemann)

스쳐간 여인중 오페라 가수 카롤리네 메돈

1819년 4월, 쇼펜하우어는 베네치아에서 석 달 정도 지내면서 부유하고 지체 높은 집안의 처녀와 사귀게 되었다. 당시 영국 시인 바이런이 1816년부터 마침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 쇼펜하우어와 같은 해에 태어난 그 염세적 시인도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불행한 과거가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가 바이런 앞으로 써준 소개장도 가지고 있었지만 우연한 일로 결국 바이런을 찾아가지 않았다. 쇼펜하우어가 연인과 거리를 산책하고 있을 때 바이런이 말을 타고 옆을 지나가는 것을 본 그녀가 흥분해서 “어머, 저길 좀 보세요. 저분이 바로 영국 시인이에요”라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온종일 바이런의 인상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쇼펜하우어는 바이런을 찾아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마음이 바이런에게 기울까 봐 그는 대시인을 알게 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후에 그는 그 일을 내내 후회했다고 한다.

또 쇼펜하우어는 베를린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1821년부터 오페라 가수였던 19세의 카롤리네 메돈(Caroline Medon)과 수년간 교제를 한다. 그런데 그해 8월 12일 그가 메돈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언짢은 일이 발생한다. 그의 베를린 셋집의 작은 방에 세 들어 살던 47세의 여재봉사 카롤리네 마르케(Caroline Marquet)와 다툼이 생겼던 것이다.

마르케는 두 소녀와 같이 방에서 시끄럽게 떠들다가 소음을 싫어하는 쇼펜하우어에 의해 방에서 쫓겨났다. 밀쳐지는 와중에 몸에 몇 군데 멍이 든 것을 가지고 그녀는 소송을 제기해 소송비용의 5/6와 매달 5탈러씩 평생 생계비를 지급받는다는 판결을 받게 된다. 쇼펜하우어로서는 골치 아픈 일이었다. 20년 후 마르케의 사망진단서를 받은 쇼펜하우어는 거기에다 라틴어로 ‘노파가 죽고, 짐은 사라졌다obit anus, abit onus’라고 운을 맞춰 말장난을 적어놓는다. 쇼펜하우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운명의 시련을 겪었지만 이처럼 태연히 극복한 모습을 보였다.

쇼펜하우어가 일생에서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카롤리네 메돈(Caroline Medon).
쇼펜하우어가 일생에서 가장 사랑한 여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카롤리네 메돈(Caroline Medon).

대철학자와 사랑을 한다는 것은

하지만 그가 그 후 병으로 베를린을 떠나 여러 곳에서 요양 체류하는 중에 메돈과의 관계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쇼펜하우어는 프랑크푸르트로 떠날 때 그녀를 함께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낳은 그녀의 아이를 두고 떠나라고 요구하면서 일이 꼬이게 되어 둘은 헤어지게 된다. 프랑크푸르트에 가서도 그는 친구에게 메돈을 지켜보라고 당부하지만 그 친구는 그가 상대를 믿지 못하기에 둘의 관계가 망가졌다고 설교했다. 그녀는 당시 자신이 사귀는 까다로운 남자가 좀 색다르다는 것은 알았지만 훗날 대철학자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1860년 2월 메돈은 신문에서 쇼펜하우어의 70회 생일을 알리는 기사를 보고, 지난날 함께 보냈던 그리운 시절을 회상하는 편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냈다. 유명한 철학자의 마음에도 젊은 시절 ‘귀여운 공주’의 인상이 강하게 남아 있었는지, 그는 재산의 일부를 그녀에게 연금의 형태로 남겨주겠다고 유언장에 적었다. 그래서 그녀는 1860년 쇼펜하우어가 사망한 뒤 1882년 죽을 때까지 22년 동안 그의 자비로운 혜택을 받았다. 소위 그의 연민과 온정 철학이 현실에서 옛 연인에게 실현된 것이다.

1831년 43세의 나이에 쇼펜하우어는 또 한번 17세의 소녀 플로라 바이스(Flora Weiss)에게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이지만 그녀는 나이 많은 숭배자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말았다. 이로써 쇼펜하우어는 결국 결혼 생각을 접고 평생 독신으로 살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결혼 포기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첫째,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수단을 충분히 보유했다고 생각하지 못했고, 둘째, 고독을 요구하는 천직이 결혼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는 결혼을 전쟁과 곤경으로 보았다. 빵과 버터에만 관심을 쏟는 사람은 창조적 개인이 될 수 없고, 결혼하면 성가신 가정사에 얽매여 생업 종사자로 전락하고, 여가 시간은 아내에게 쓰느라 소진한다고 생각했다.

※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