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조영섭 문성길복싱클럼 관장
  • 문화
  • 입력 2023.03.26 13:21
  • 수정 2023.03.27 14:30

불꽃 같았던 삶....나의 제자, 나의 챔프 최요삼

[조영섭의 잊을 수 없는 순간과 선수들]
필자는 입문부터 6년간 최요삼 가르쳐
복싱 입문하자마자 '발군의 기량'을
원래는 변칙복서 스타일...파이터로 바꿔
2007년12월 경기직후 쓰러져 하늘의 별로

최요삼과 첫 인연

오는 4월 19일은 세상을 떠난 전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최요삼이 나와 인연을 맺은지 34주년이 되는 날이다. 나는 1989년 바로 그날 88프로모션에 지도자로 들어가 그해 창단한 신생팀 용산공고 복싱부를 맡아 첫 항해(航海)를 시작했다.

1989년은 다사다난 했던 해였다. 가요계에선 태진아가 부른 '옥경이', 이동원 박인수가 부른 '향수'란 곡이 히트를 쳤다. 유럽에선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역사적인 한해였다. 필자가 입성한 88프로모션에는 WBA 밴텀급 챔피언 문성길이 있었다. 또 WBC 플라이급 챔피언 김용강, IBF 미니 플라이급 챔피언 이경연, WBC 플라이급 세계 7위 진윤언, 국가대표 출신의 장성호, 전칠성, 송광식, 김만수 등 역대급 복서들이 세계정상을 노리면서 포효하고 있었다.

당시 최요삼은 영등포 중학교를 졸업하고 용산공고에 갓 입학한 16세 학생이었다. 쾌활하고 명랑한 요삼이는 상대의 스타일에 따라 변신하는 변칙복서였다. 그런 그를 필자는 88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김광선 같은 파이터 스타일로 뜯어고쳤다. 새벽 운동은 용산공고 인근에 위치한 한강변 둔치에서 이뤄졌다. 요삼이는 적토마처럼 잘 달렸다.

당시 12명의 용산공고 창단 멤버중 요삼이는 이미 '물음표'보다는 '느낌표'가 굵고 진하게 찍힌 발군(拔群)의 복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요삼의 부친이 88프로모션으로 필자를 찾아왔다. 마장동에서 건강원을 운영하던 부친 최성옥 씨는 요삼의 고향이 '정읍'이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지도편달을 부탁했다.

1994년 신인왕전이 끝난후 최요삼(왼쪽)과 필자
1994년 신인왕전이 끝난후 최요삼(왼쪽)과 필자

서울에서 복싱부를 운영하는 학교는 용산공고를 포함 4개팀이 있었다. 황철순 사단의 리라공고와 장한곤이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포진된 서울체고가 양대산맥을 구축하고 있었고 신귀항 선생이 사령탑을 맡고 있는 당곡고는 코치진이 자주 바뀌면서 전력이 약했다. 그리고 용산공고. 마치 고대국가인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포진된 형국과 흡사했다.

변칙복서를 파이터로 바꾸며

그해 6월 학생선수권대회에 필자는 용산공고팀을 이끌고 처녀 출전했다. 코크급 (45kg)에 나선 에이스 최요삼이 3연승을 거두고 준결승에 진출, 비록 신은철(대전체고)에 고배를 마셨지만 소중한 동메달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7월에 전국체전 선발전에서 필자는 7명의 선수들을 이끌고 대회에 나섰지만, 최요삼을 포함한 7명 전원이 모두 1회전에서 탈락하는 아픔을 맛봤다. 당시 그는 리라공고의 이근식과 불꽃 튀는 타격전을 펼쳤지만 3대 2로 판정패를 당했다. 그가 경기에 패하자 난 스탠드에 앉아 눈물을 쏟아냈다.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최요삼.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최요삼.

곁에는 최요삼의 누나(최경애)과 형(최요석)이 말없이 날 지켜보고 있었다. 필자는 그때 '보이지 않는 힘' 즉 인탠지블 파워(intangible power)가 부족하다는 걸 절감했다. '기록은 깨지기 위해 존재하고 코치는 짤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스포츠계 속설이 있다. 스포츠 세계에서 코치라는 위치는 경기에 패배하면 언제든 필요없는 인간으로 사라지는 자리다. 난 절박한 심정으로 독하게 선수들을 조련시켰다. 

한편으로는 대한복싱협회 182명 심판진 명단을 입수해 그들의 생년월일부터 출생지, 학력 같은 세세한 신상명세를 고시생처럼 외우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심판진의 스타일을 연구, 분석하는 한편 이들과 폭넓게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최요삼을 비롯한 선수들을 필자의 집에서 합숙 훈련시켰다. 그때 우연히 필자의 자택을 방문한 당시 서울심판위원인 현천일 선배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많은 응원과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심영자 회장이 꼽은 최요삼 

다음해인 1990년 7월 전국체전 선발전이 서울체고에서 열렸다. 최요삼의 준결승 상대는 그해 김명복배 코크급 결승에서 차관철(홍천고)을 판정으로 꺾고 우승한 리라공고 이근식이었다. 1년전 맞대결에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고배를 마셨던 최요삼은 이근식과 복수혈전을 펼쳐 끝내 우승을 차지한다. 적장인 리라공고의 황철순 코치도 인정할수 밖에 없는 완승이었다. 경기가 끝나자 한국체대 엄규환 교수에게 러브콜이 들어왔다. 우승컵을 들고 88프로모션을 찾아가자 심영자 회장이 격려금 20만원을 주셨다. 

당시 필자의 한달 급료가 25만원 임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금액이었다. 이때부터 '복싱계 대모'로 불린 심영자 회장은 차세대 세계챔피언으로 최요삼을 낙점하고 관심을 쏟았다. 심 회장은 김성준, 김철호, 장정구, 문성길, 김용강, 이경연, 장태일, 백종권, 정비원 김봉준 등 세계챔피언을 탄생시킨 복싱계의 큰손이었다.

세계챔피언 최요삼과 심영자 88프로모션 회장(오른쪽)
세계챔피언 최요삼과 심영자 88프로모션 회장(오른쪽)

자신감을 얻은 요삼은 그해 8월에 개최된 전국 회장배 대회에서 파죽의 4연승을 거두면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특히 결승전에서 이리고의 이광호와 펼친 타격전은 그 대회 백미 중의 백미였다. 경기가 끝나자 이번엔 서원대 전재완 교수에게서 스카웃 요청이 들어왔다. 그리고 맞이한 10월 전국체전에 요삼은 서울 대표로 출전을 한다. 1회전 상대는 강원 대표의 차관철이었다. 이 경기에서 요삼은 뜻밖의 판정패를 당한다. 하늘 높은 줄만 알았지 땅 넓은 줄 몰랐던 그가 큰 충격을 받고 방황을 할 정도로 차관철에 당한 1패는 치명적이었다. 반면 요삼을 꺾은 차관철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993년 4월 요삼이가 프로로 전향하겠다면서 날 찾아왔다. 방황을 끝내고 복귀하겠다는 것이었고 나는 다시 그를 지도했다. 데뷔전 일정이 확정되자 요삼을 88프로모션 합숙소가 있던 워커힐 아파트에 데려갔다. 그곳은 1985년 12월 필자가 프로 데뷔 10차전에서 KO패 당하고 퇴출당한 곳이어서 만감이 교차했다. 

강펀치의 소유자인 세계 챔피언 사만 소루자투롱과 격돌하는 최요삼(왼쪽). 이 경기 승리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강펀치의 소유자인 세계 챔피언 사만 소루자투롱과 격돌하는 최요삼(왼쪽). 이 경기 승리로 세계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승승장구, 마침내 세계 챔피언

그해 7월 3일 WBC 슈퍼 플라이급 챔피언 문성길의 9차방어전 언더 카드로 출전한 요삼은 이태길(덕흥체)을 상대로 4회 판정승을 거두면서 데뷔전을 승리로 장식한다. 다음해인 1994년 1월 제23회 전국신인왕전에 출전한 요삼은 라이트 플라이급에서 우승과 함께 부상으로 5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요삼이는 50만원 전액을 자신을 지도한 나에게 전달했다. 그후 나와 함께 호흡을 맞추면서 3차례의 국제전을 승리로 이끌며 11전 전승(3KO)을 기록한 요삼은 한국타이틀전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직장상사인 염동균 사장과 뜻하지 않은 불화로 경솔하게 체육관을 떠나면서 최요삼과의 6년 사제 지간의 인연에 마침표를 찍었다. 

최요삼은 그 후 이영래 사범의 지도를 받으며 1998년 동양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 사범은 장정구 챔프를 발탁하여 조련한 명(名)트레이너였다. 그리고 1999년 10월 뉴 밀레니엄을 2개월 남겨놓은 시점에서 멕시코의 움베르토 곤잘레스를 상대로 7회 KO승을 거두고 세계정상에 오른 WBC 라이트 플라이급 챔피언 사만 소루자투롱(태국)이 최요삼과 11차 방어전을 치르기 위해 한국으로 날아왔다.

21전 20승(10KO) 1패를 기록한 최요삼에게 44전 41승(31KO) 1무 2패를 기록한 챔피언 사만 소루자투롱과의 경기는 승산이 희박했다. 왜냐하면 역대 복서 100인에 선정될 정도로 사만은 10차 방어전 중 8차례를 KO승으로 장식한 세계적인 클라스의 하드 펀처 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요삼은 초반부터 사만의 펀치를 위빙과 더킹으로 무력화시킨 후 교묘하게 버팅(?)까지 써가며 송곳 같은 잽과 좌우 훅으로 두들겨 완승을 거두고 세계 정상에 올랐다.

뇌수술 끝에...불운의 세계챔프 

그 경기는 한국의 도전자들이 태국 출신 세계챔피언들에게 13차례 연속으로 도전하고도 실패한 경기에 종지부를 찍는 일전이어서 기쁨은 배가 되었다. 자신의 한계를 딛고 일어섰을 때 위대한 황제가 되었다고 말한 칭기스칸처럼 최요삼도 활활 타오르는 열정으로 모든 장애물을 걷어내고 세계정상에 우뚝섰다. 그러나 챔피언에 등극한 최요삼은 IMF위기와 복싱 흥행침체와 맞물려 경기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2년 4개월동안 단 3차례의 방어전만 치른다.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운의 아이콘이었다. 그리고 한일 월드컵 열기가 식지 않은 2002년 7월 6일 열린 4차 방어전에서 멕시코의 강타자 호르헤 아로세에게 6회 KO패를 당하며 타이틀을 상실한다.

쓰러진 최요섭을 위해 수술비 900만원을 쾌척했던 김미화 씨(오른쪽)과 그의 남편 윤승호 교수.
쓰러진 최요섭을 위해 수술비 900만원을 쾌척했던 김미화 씨(오른쪽)과 그의 남편 윤승호 교수.

그후 연달아 두 차례 세계타이틀전에 도전했지만 판정패로 물러난 최요삼은 컴백과 은퇴를 반복하던 2007년 9월 인터콘티넨탈 챔피언에 등극하기도 했다. 그때 그의 나이 34세였다. 최요삼은 2007년 12월 25일 인도네시아의 헤리 아몰과 벌인 1차 방어전에서 전라운드에 걸쳐 우세한 경기를 펼치다 12회 종료직전 아몰의 불의의 일격에 그만 쓰러진다. 다시 일어나자 공이 울렸고 최요삼은 판정승을 거뒀다. 그러나 경기 직후 실신한 최요삼은 뇌수술을 받아야 했다. 언론을 통해 수술비 때문에 이중고를 겪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성균관대 윤승호 교수가 아내이자 방송인 김미화 씨에게 부탁했고, 이에 김 씨가 9백만 원이 넘는 치료비 전액을 쾌척했다. 필자도 이에 동참해 동생(최경호)에게 2백만 원을 전달하며 쾌유를 빌기도 했다.

그러나 최요삼은 결국 깨어나지 못하고 32승(19KO) 5패의 전적을 남기고 2008년 1월 3일 34세의 일기로 하늘의 별이 되었다. 링 위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최요삼. 편히 영면하길...

※ 조영섭 복싱전문기자는 전북 군산 출신으로 1980년 복싱에 입문했다. 그 전에는 5년동안 야구선수 생활을 했는데, 전국 초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에서 조계현, 백인호 등 동료들과  우승한 경력도 있다. 1983년 복싱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 상비군을 거쳤으며 1989년 지도자로 변신했다. 용산공고, 서울체고를 거쳐 천안 충의소년원,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복싱강사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문성길 복싱클럽 관장을 맡고 있는 정통복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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