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온전한 시민되기까지...질척거린 직접민주주의
[위민복의 ‘남의 나라 흑역사’] 유럽서 가장 늦게 여성투표권 인정한 스위스
[위민복 외교부 서기관] 1887년 1월, 스위스 연방대법원이 판결을 하나 내린다. 에밀리 켐핀-스피리(Emilie Kempin-Spyri, 1853-1901)가 남편의 변호인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스위스 최초의 여성 법조인(취리히 대학교 법학 박사 학위가 있었다)이었던 그녀는 어째서 남편의 변호사가 될 수 없었을까?

앞서 취리히 지방법원은 ‘완전한 시민권(Aktivbürgerrecht)’, 직역하면 활성화된 시민권을 그녀가 갖고 있지 않다고 판결했었다. 완전한 시민권이란 투표권과 피투표권을 가진 시민권을 의미하며, 당시까지 스위스는 성인 남성에게만 그 권리를 인정하고 있었다. 여기에 그녀가 이의를 제기했고, 소송은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다.
당시 스위스 연방대법원의 논리는 이랬다. 켐핀이 상소 근거로 제기한 1874년 스위스 연방헌법 제4조는 “모든 스위스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스위스에는 종속(sujet)이나 가문과 출생, 성씨의 특권(privilège)이 없다”라고 되어 있었다. 연방대법원은 제4조 및 관련 조항이 남녀 평등을 얘기하는 것은 맞다고 했다. (여담이지만 현재 스위스 연방헌법은 세번째 헌법이며, 1999년 개헌됐다. 1847년 헌법의 제4조 내용은 현재 제8조(평등)로 옮겨가 있다.) 다만 이 조항이 켐핀이 변호사 역할을 할 수 있다고까지 해석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해당 조항은 역사적 맥락에 따라 해석을 해야 하며, 여성이 변호인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개념(Auffassung)은 ‘새롭고도 과감하다(eben so neu als kühn)’고 했다. 결과는 취리히 지방법원의 변호인 자격 배제가 합헌이라는 것이었다. 여성은 완전한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투표권이 있어야 완전한 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일까? 이에 따라 또 다른 소송이 연방대법원에 제기된다. 1923년 여성투표권을 인정하라는 헌법소원(당시는 대법원에 직접 헌소 제기가 가능했지만 현재는 칸톤 행정법원을 통해야 가능하다)이었는데, 당시 스위스 연방대법원은 ‘관습법’에 따라 투표권에서 여성을 배제한다고 해버렸다. 관습에 따라 그러하니, 필요하면 헌법의 해석이 아니라 헌법 조항을 바꾸라는 의미였다.

‘직접 민주주의의 나라’ 스위스로서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국민투표를 거쳐야 하는데, 투표권이 성인 남성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연방헌법을 개정하려면 스위스 연방을 구성하는 칸톤(스위스 주)의 과반수 지지가 필요했다. 1930년대 이후 대공황과 세계대전이 있었고, 스위스는 중립을 표방하기는 했지만 이같은 국내 이슈를 다루기에 당시는 좋은 타이밍이 아니었다. 국민투표 도입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결국은 ‘나중에’가 됐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스위스와 리히텐슈타인을 제외하고 모두 여성투표권을 인정하기 시작한다. 물론 포르투갈이라는 예외가 있었지만 당시 포르투갈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서유럽에서 거의 스위스만 고립된 것이다. 그러다가 1957년, 스위스의 의무복무제 중 하나인 ‘시민보호(Zivilschutz: 소방, 구조 등의 임무를 수행)’에 여성도 의무적으로 포함시키느냐에 대한 국민투표가 있었다.(부결됐다.) 하지만 상징적으로 여성들의 투표가 발레(Valais) 칸톤의 운터백(Unterbäch)이라는 마을에서 실시된다. 여성의 투표는 따로 수집됐으며, 집계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이어 1958년에 드디어 여성의 투표권 인정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가 결정된다. 실제로는 1959년 2월 1일에 실시됐으며, 67%의 투표율을 보였지만 보(Vaud)와 느샤텔(Neuchâtel), 제네바(Genève)의 불어권 칸톤 세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니오’가 나왔다.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이 투표의 성과가 없지는 않았다. 지도에서 초록색이 나온 칸톤들을 시작으로, 연방이 아닌 칸톤/지방 선거에 있어 여성투표권을 인정하는 칸톤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각종 시위가 이어진 1960년대 이후 모든 정당과 스위스 전국노조(Schweizerischer Gewerkschaftsbund), 심지어 농부협회(Bauernverband)라는 스위스 내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들까지 여성 투표를 인정하자고 나서기 시작한다.
그래서 1971년 2월 7일 한번 더 국민투표가 실시됐으며, 이번에는 투표율 57.7%, 찬성율은 65.7% 이었다. 투표수 과반수는 물론 칸톤 과반수도 넘겼기 때문에 통과됐다.
헌법이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1874년 제정된 연방스위스헌법 제74조(투표권)에 있던 ‘모든 스위스 남성(jeder Schweizer)’이 ‘스위스 남성과 여성(Schweizer und Schweizerinnen)’으로 변경됐다.

자, 스위스가 바뀌었으니? 리히텐슈타인도 공작(국왕의 역할)까지 나서서 여성투표권를 허용하자고 호소했지만 스위스보다 더 고립적인 이 공국은 1984년 국민투표를 통해 간신히(모든 정당이 ‘예’를 호소했지만 51.3%의 찬성율에 불과했다.) 투표권을 인정했다. 실제로 헌법 조항이 바뀐 것은 1992년, 관련 법규가 제정된 것은 1999년이었다.
PS.
스위스 법 체제에서 여성의 지위에 논쟁을 일으켰던 에밀리 켐핀-스피리는 고국의 체제에 환멸을 느끼고 1888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간다. 뉴욕에서 그녀는 여성들을 위한 로스쿨인 Women Law College을 설립했다. 1891년 다시 스위스로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쳤다.
자궁암으로 사망하는 1901년까지 계속 여성 법조인 인정을 위해 투쟁했던 그녀는 결국 사망하기 3년 전 취리히 칸톤의 여성법조인 인정을 이끌어낸다. (스위스 연방에서는 1923년부터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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