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지상주의는 위험해요
[송광용의 밤마다 카페테라스] 공감이 과잉일때는 어떻게 될까 누군가에게 ‘그들만의 공감’될 수도 소금처럼 적당할 때 맛있고 아름다워
누군가와 온전한 공감을 주고받았다고 느낄 때, 그 순간은 마법처럼 우리들을 둘러싼다. 우리는 마음의 손을 잡고 여름 밤하늘을 비행한다. 우리 주변에 얇은막이 생겨 세상의 추위는 감히 범접하지 못한다.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알아주고, 내 감정을 함께 느끼고 있다. 그 외의 사람들은 필요 없다. 우린 서로의 편이 되어 세상의 소외로부터, 공격으로부터, 질시와 푸대접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공감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늘 그립고 우리가 갈망하는 세계다.
동물행동학자 프란스 드 발은 <공감의 시대> 라는 책에서, 여러 동물들의 공감 행동을 제시하며 공감은 동물적 본능이라 밝히고 있다. 프란스 드 발의 책 제목처럼 우린 공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공감은 인간이 가진 본성중 높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한편으론 키워야 할 능력으로 인식되고 있다. 창의력의 발현 통로중 하나는 공감이라는 이론도 있다. 특정한 사람이나 더 나아가서 인류의 문제에 깊이 공감한 사람들에 의해 많은 발명들, 정책들, 제도가 생겨났다. 공감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왔다. 사람들은 온전히 관계 맺기 위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사려깊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공감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공감은 동화 책에 예쁘게 그려진 2차원 단면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필자가 공감에 관한 몇몇 저작들을 읽고서 든 생각은, 공감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장단점이 공존하는 입체물에 가깝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모두 마음을 나누고 서로 공감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이 공감이란 건 ‘절대선’이 아니다.
공감의 다른 얼굴
학교에서 생활하며 아이들의 다툼과 갈등을 꽤 오래 지켜봤다. 다툼과 갈등의 원인은 무척 다양하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가 다른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 싸움이 벌어진다. 반대로 편향적인 공감이 갈등과 싸움의 원인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필자가 그간 지켜본 학교 폭력 신고 사례 중 몇몇 건은 비슷한 패턴이었다. 여러 아이가 한 아이를 공격하거나 비방하고 위협한 경우다. 대체로 과정은 이렇다. A와 B사이에 갈등이 생겨 다툼이 벌어진다. A는 마음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다. B를 그 친구들에게 욕하고 자신의 힘듦을 토로한다. 친구들은 A의 마음에 깊이 공감한다. A의 친구들도 B를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 사이에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긴다.
어느 날 A와 친구들은 B를 단톡방에 초대하거나, 따로 불러내어 함께 욕하고 비방한다. 학교 폭력 건이 아니라도, 학급에서 이런 일은 꽤 자주 일어난다. 고학년이 될수록 아이들은 친하게 지내는 그룹이 생기는데, 그룹 안에서 우정과 공감을 나누는 아이들이 그룹 밖의 아이들에겐 배타적으로 행동하거나 차별하는 경우가 있었다. 누군가에게 공감하면 그 사람들 둘레엔 울타리가 생긴다. 그 안에 있으면 안전하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공감은 일방향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울타리 밖의 사람들에겐 냉담하거나 무관심해지곤 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사람들의 에너지는 한정적이니 모든 사람들에게 다 줄 순 없지 않냐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편향된 공감 때문에 울타리 밖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되거나 차별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종종 특정 친구를 부당하게 대하는 아이들에게 이런 얘기를 해야 했다. “너, 이 친구를 네가 친한 00처럼 대했니? 이 친구와 친하지 않은 건 알지만, 차별하면 안 돼. 동등하게 대해 줘.”
학교에서 아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미숙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꾸짖고 교육하지만, 실은 사회에서 어른들도 비슷하게 행동한다. 많은 이들은 아마 자신의 친구를 공감하느라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함께 욕한 적이 있을 것이다.
나와 친한 사람의 적은 나의 적이 되기 쉽다. 거기엔 어떤 객관성이나 합리성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합리적인 관점으로 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대번에 이런 말이 나온다. “당신, 지금 누구 편이야?”
나가이 요스케는 테러범의 재활을 돕는 일을 하는 운동가다. 그는 공감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룬 <공감병>이라는 책에서 “공감은 과잉 동조하게 한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공감하면 폭력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과도한 공감에 의한 폭주란, 피해자의 보복 감정에 너무 이입한 나머지 그들의 슬픔이나 분노를 제멋대로 대변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 나가이 요스케 <공감병>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도, 내가 공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어떤 피해를 입었을 때 우린 눈앞에 가해자가 있다면 당장에 달려들 것처럼 반응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때로 이런 공감이 폭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 들기도 한다. 또한, 사람들이 특정한 대상에게 더 공감한다는 사실은, 공감이 공정성을 훼손시킬 가능성을 높이는 이유가 된다.
‘검은 개 증후군’ 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검은 색 털을 가진 개의 입양을 기피하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크고 검은 개’에 대한 공감이 ‘작고 귀여운 개’보다 대체로 떨어진다는 걸 보여준다. 우린 저마다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이 있고 그밖의 다른 존재의 고통엔 둔감하다. 그래서 ‘공감’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은 우리의 도덕적 행동, 결정 등은 공감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폴 블룸은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공감은 지금 여기 있는 특정 인물에게만 초점이 맞춰진 스포트라이트다. 공감은 그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쓰게 하지만, 그런 행동이 야기하는 장기적 결과에는 둔감해지게 하고 우리가 공감하지 않거나 공감할 수 없는 사람들의 고통은 보지 못하게 한다. 공감은 한쪽으로 편향되어 있어서 지역 이기주의와 인종차별주의 쪽으로 우리를 몰고 간다”- 폴 블룸 <공감의 배신>

나의 공감을 돌아보고, 그 너머를 보기
그럼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앞서 언급했던 나가이 요스케는 이성과 권리를 내세우며, 지나친 공감의 폐해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증오가 휘몰아치는 지금의 세계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열쇠는 공감이 아닌 권리에 대한 이성적 시선이다.”- 나가이 요스케 <공감병>
우리는 저마다 나의 공감은 어떤 모양인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울타리밖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타자화하는 공감인지, ‘공감대’를 참호 삼아 누군가를 폭력적으로 대하고 있진 않은지. 입장을 바꿔서, 우리가 누군가들의 공감의 바깥에서 부당한 공격을 받거나, 응당 누려야 할 권리를 빼앗긴다면 ‘그들만의 공감’에 치가 떨릴 것이다.
공감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이고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것은 소금과 같다. 적당량이 들어가면 맛을 살리지만 과도하게 들어가면 요리를 망치고 사람을 해친다. 공감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공감 지상주의는 위험하다. 공감은 절대선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을 행동에 옮기는 건 결코 쉽지 않다. 나와 아름다운 신념을 함께 하는 사람들, 나와 마음의 온기를 나눈 사람들, 함께 부당한 뭔가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 동지, 친구... 그 너머를 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공감의 폐해를 경계할 때 공감은 더 아름다운 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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