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괴한 애도, 희한한 조문
[전우용의 역사에서 읽는 지혜] 합동분향소 설치, “공동체 책임” 인정하는 것 행안부, 이태원 참사 2차가해 서슴지 않아 희생자에 ‘사회적 린치’하는 짐승들 부끄러워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사례(四禮)는 본디 사생활 공간에서 가족 단위로 치르는 의례다. 그래서 이를 ‘가례(家禮)’라고도 했다. 옛날에는 역병이나 전쟁, 자연재해 등으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는 일이 생겨도 장례는 각 집에서 따로따로 치렀다. 조문(弔問) 또는 문상(問喪)이란 가족을 잃은 집, 즉 상가(喪家)에 방문하여 망자(亡者)가 죽은 이유를 묻고 유족을 위로하는 행위였다. 상가는 병원 영안실이나 공사립 장례식장이 아니라 망자가 살던 ‘집’이었다. 한 마을에서 거의 동시에 여럿이 사망하는 일이 생기면, 여러 집이 동시에 상가가 되었다. 망자들의 위패를 한 집에 모아놓고 ‘합동장례’를 치르는 법은 없었다. 다만 전사(戰死)한 장병들이나 아사(餓死)한 백성들의 위패를 한 곳에 모아 놓고 치제(致祭)하는 일은 더러 있었다. 이를 ‘위제(慰祭)’라고 했다.
근대 이후 의례 전반이 급변하는 과정에서 ‘위제’에도 ‘위령제’나 ‘추도식’이라는 새 이름이 붙었다. 일제강점기, 특히 태평양전쟁 중에는 ‘합동위령제’나 ‘합동추도식’이라는 이름의 관제 행사가 자주 열렸는데, 이는 일본 군국주의의 대외 침략 과정에서 죽은 자들에 대한 집단적 애도(哀悼)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려는 ‘정치 행위’였다. 물론 이런 ‘감정 동원’ 방식을 일본이 창안한 것은 아니다. 죽은 자에 대한 애도는 종종 복수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옛날부터 순국자나 순교자에 대한 추모는 애국심이나 호교심(護敎心)을 고취하는 용도로 활용되었다. ‘추모의 감성’을 동원하는 기법은 근대 이후에 한층 세련화, 정교화했고, 순국자들의 유해나 위패를 모아둔 곳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 ‘성소(聖所)’로 자리 잡았다. 그러니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순국 장병 합동 위령제’ 같은 행사가 자주 열린 것을 두고 ‘식민지 잔재’라고 할 이유는 없다.
우리나라 ‘합동분향소’의 흑역사
우리나라에서 ‘합동분향소’라는 말은 장례식 장소가 집에서 병원 등의 ‘공공장소’로 옮겨가기 시작하던 무렵인 1982년에 처음 사용되었다. 이 해 4월 26일, 경남 의령경찰서 궁류지서에 근무하던 순경 한 사람이 4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총을 난사해 62명을 죽이고 33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유족들은 관례대로 각자 자기 집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를 치렀다. 장례가 끝난 뒤, 궁류면사무소 옆 새마을회관에 ‘합동분향소’가 마련되었고, 해인사 스님 30여 명이 독경(讀經)을 하여 망자의 명복을 빌었다. ‘합동분향소’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합동위령제’였던 셈이다.

이듬해 9월 1일, 대한항공 여객기 007호가 소련 공군 전투기의 공격을 받아 사할린 서쪽 해상에 추락했다. 이 공격으로 한국인 76명, 미국인 62명, 일본인 28명 등 총 16개국 국민 269명이 사망했다. 정부는 김포공항에 희생자 전원의 위패를 안치한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그 바로 다음달에는 미얀마 아웅산에서 북한의 테러로 대통령 수행원 17명이 사망했다. 이번에도 정부는 국립묘지에 ‘순직 외교사절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는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합동분향소를 차리는 것이 관행화됐고, 2000년대 이후로는 그 빈도가 크게 늘었다.
115명이 사망한 1987년의 KAL 858기 폭파 사건, 292명의 사망 실종자를 낸 1993년의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사망 502명, 실종 6명의 피해를 낸 1995년의 삼풍백화점 붕괴, 228명이 사망한 1997년의 KAL 801기 괌 추락 사고, 유치원생 23명이 사망한 1999년의 씨랜드 청소년 수련원 화재, 한국인 111명이 사망한 2002년의 중국 민항기 김해 추락 사고, 192명이 사망한 2003년의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한국인 20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된 2004년의 남아시아 해일, 6명이 사망한 2006년의 용산참사, 해군 46명이 사망한 2010년의 천안함 침몰, 안산 단원고 학생 등 304명의 사망 실종자를 낸 2014년의 세월호 참사, 29명이 사망한 2017년의 제천 스포츠 센터 화재, 47명이 사망한 2018년의 밀양 세종병원 화재, 38명이 사망한 2020년의 이천 물류센터 공사장 화재, 158명이 사망한 2022년의 10·29 이태원참사...대중의 기억 속에 남은 굵직굵직한 사건들만 나열했지만, 1987년부터 현재까지 ‘합동분향소’는 197회나 설치되었다. 평균 두 달에 한 번꼴로 ‘합동분향소’를 마련해야 할 사고가 났던 셈이다.
합동분향소는 많을 때 500여 명, 적을 때는 2명 단위로 만들어졌는데, 설치 주체는 사고의 경위와 규모에 따라 유족협의회, 지역사회, 기업, 학교, 사회단체, 국가 등 다양했다. 복수의 군인이나 소방관, 공무원이 사망하면 국가가 합동분향소를 차렸고,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중에 학생들이 사망하면 학교에, 산악인이 등반 중 조난당하면 산악문화회관 등에 합동분향소가 마련되었다. 작업 중 사망한 산재 노동자들의 합동분향소는 주로 해당 기업체가 만들었다. 민간인이 대형 사고 등으로 사망하면 유족들이 자체적으로 합동분향소를 차리거나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합동분향소 설치를 요구했다.
‘공동체 전체의 책임’으로 바꾸는 의례
합동분향소는 일차적으로 같은 일을 겪은 유족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함께 대책을 논의할 수 있게 해주는 공익 시설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이는 망자의 죽음을 ‘사적 영역’에서 끌어내 ‘공적 영역’으로 이동시켰다. 합동분향소에 안치된 영정과 위패는 그들에 대한 애도가 ‘가족과 친척 친지의 일’만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합동분향소는 죽음에 대한 ‘공적 책임’을 표상하는 시설이었다. ‘공적 책임’은 ‘정치적 책임’과 같은 의미다. 합동분향소가 ‘정치적 동원’이나 ‘정치적 요구’와 결합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로 46명의 해군 장병이 희생되자 정부는 전국 16개 광역시도, 32곳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했다. 4월 25일부터 5일간이 ‘국가 애도 기간’으로 지정되었고,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합동영결식에서 희생된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천안함의 ‘영웅’들을 기리는 합동분향소는 이후 2015년까지 매년 설치되었다. 전형적인 ‘추모의 정치’였다. 물론 반대 방향의 정치적, 사회적 추모도 있었다. 2008년의 ‘제주 4·3 행방불명자 합동분향소’, 2012년의 ‘쌍용차 해고 희생자 합동분향소’, 2017년의 ‘대구 희망원 사망자 합동분향소’, 2019년의 ‘가습기 살균 피해자 합동분향소’, 2021년의 ‘코로나 19 피해 자영업자 합동분향소’와 ‘코로나19 백신 피해자 합동분향소’ 등은 모두 ‘정치적 요구’와 결합해 있었다.

2014년의 세월호참사는 ‘합동분향소’의 역사에 뚜렷한 획을 그었다.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날부터 목포 한국병원, 안산 고려대병원, 수원시 연화장, 인천 국제성모병원 등에 임시 합동분향소가 설치되었고 4월 23일에는 안산 올림픽기념관에 통합 임시 합동분향소가 마련되었다. 정부 장례지원단이 구성된 4월 25일부터는 전국 곳곳, 나아가 해외 각 도시에도 합동분향소가 만들어졌다. 4월 29일에는 안산 화랑유원지에 정부합동분향소가 설치되어 2018년 4월 19일까지 운영되었다. 유족들이 서울광장에 만들었던 ‘천막 분향소’는 2019년 2월에야 철거되었다. 우리 역사상 최장기간 존속한 합동분향소였다. 이 분향소가 존속하는 동안 수백 만 명이 애도와 추모의 마음으로 분향, 헌화했지만, 우리 사회 ‘인간성의 최저선’을 끌어내리는 일도 적잖이 발생했다. 희생자들을 조롱하고 유족들을 비난하는 반인간적 언행들이 무시로 벌어졌다. 당시 정부와 유력 언론사들은 이런 ‘반인간적 언행’을 규탄하기는커녕, 그들의 주장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했다.
세월호참사 반 년 뒤인 2014년 10월 17일, 판교 테크노밸리 축제 중 공연 관람자들이 올라섰던 환풍구가 무너져 16명이 사망했다. 그런데 관행과는 달리 유족들은 합동분향소 설치를 요구하지 않았다. 일차적으로는 관할 행정기관인 경기도가 유족들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했기 때문이지만, 세월호참사 희생자 유족들에게 가해진 ‘사회적 린치’에 대한 두려움도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 등은 합동분향소를 설치하지 않겠다는 유족들의 결정을 ‘극찬’하며, 합동분향소 일반을 ‘유족들이 떼법을 실행하는 기관’인 양 묘사했다. ‘보상 받고 입 다무는 게 최선’이라는 주장이었다.
‘2차 가해’ 서슴지않는 정부
10·29 이태원참사가 일어난지 이제 한 달 정도 지났다. 40년 남짓 된 ‘참사와 합동분향소’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이 참사에 대한 정부의 대처와 합동분향소 운영은 특이함을 넘어 해괴할 정도다. 우선 영정도 위패도 없는 합동분향소는 역사상 처음이다. 2002년 군산 유흥업소 화재와 2005년 미아리 집창촌 화재로 희생된 성매매 여성들을 추모하는 합동분향소에는 영정이 생략된 사례가 있으나, 그래도 위패는 두었다. 현재 서울시의회 옆에 설치된 ‘코로나19 백신 피해자 합동분향소’에도 영정들이 놓여 있다. 우리 문화에서 위패와 영정은 희생자들의 ‘혼(魂)’을 모시는 물건이자 망자의 ‘실존 사실’을 증거하는 물건이다. 반복하거니와, 합동분향소는 희생자의 죽음을 ‘공적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시설이다. 분향소에 찾아가는 사람들은 가족, 친척, 친구와 같은 마음으로 분향, 헌화한다. 희생자들을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존재’로 취급하여 떠나 보내는 것은 산 자의 도리가 아니다. 그런데도 행안부는 각 시도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할 때 ‘영정사진 및 위패는 생략’하라고 지시했다. 한 언론사가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자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당 차원에서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밝혔고, 법무부 장관은 ‘법적으로 큰 문제’라고 주장했다. 죽은 이의 ‘이름’만 공개하는 것조차 ‘패륜’이자 ‘2차 가해’라는 해괴한 주장이 ‘진실’처럼 유포되었다. 그 이전까지 합동분향소는 196번이나 설치되었지만, ‘명단 공개는 2차 가해’라는 주장은 단 한 차례도 나온 적이 없었다. 유족 중 한 사람은 “영정도 위패도 없는 분향소가 나에게는 2차 가해였다”며 오열했다. 패륜이라고 비난해야 마땅한 것은, 억울하게 희생된 망자의 존재를 지우는 행위다.
얼마나 더 반인간적이고자 하나
애도 방식도 희한했다. 합동분향소 설치 직후, 정부는 ‘근조’ 글자가 보이지 않게 검은 리본을 패용하라고 지시했다. 세월호참사 직후 뉴스 진행자에게 ‘검은 옷 입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모 방송사 간부가 연상되는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매일 분향소에 찾아갔는데, 언론들은 이 행위를 ‘조문(弔問)’이라고 표현했다. 조문 또는 문상이란 문자 그대로 유족을 찾아가 죽음의 진상에 대해 묻고[=문(問)] 위로하는 일이다. 유족이 없는 곳에서는 참배나 분향, 헌화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합동분향소 설치와 관련해 유족들과 협의조차 없었다는 사실도 추후에 밝혀졌다. 정부는 합동분향소의 설치, 운영에서 유족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일부 유족은 정부 당국이 유족들 사이의 연락을 원천봉쇄했다고까지 주장했다. 최근에는 경찰이 경황 없는 유족들에게 ‘마약 부검’을 제안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정부가 의도적으로 유족들을 고립시킨 사이에, 죽은 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적 린치’는 기승을 부렸다. 이런 행위야말로 진짜 2차 가해지만, 이를 비난하는 유력 언론은 거의 없었다. 언론들은 오히려 ‘추모의 비정치화’를 선동하면서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사회적 린치’를 부추겼다. 희생자들을 ‘부끄러운 존재’나 ‘지워야 할 존재’로 취급하는 패륜 담론이 횡행하는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그 ‘존재’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기 마련이다.
세월호참사 이후에 우리 사회 일각에서 드러났던 ‘반인간성’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가 이 사달을 빚었나”라는 말은 “서양귀신 놀이에 갔다가 죽은 건 본인들 책임”이라는 말로 되살아났다. “하나님이 꽃다운 애들 침몰시켜 국민에게 기회 준 것”이라는 말은 “이태원 참사는 큰 기회, 큰 질량으로 희생해야 세계가 돌아 봐”라는 말로 반복되었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뒤르켐의 말을 원용한다면, ‘모든 참사는 정치적 사건’이다. 홍수로 인한 산사태나 지진으로 인한 건물 붕괴에도 정부의 책임을 묻는 것이 현대의 상식이다. 1998년 10월 단풍 놀이 관광버스 충돌로 1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났을 때 합동분향소는 한국도로공사 대관령지사에 설치되었다. 도로공사가 일부 책임을 인정하는 조치였다. 그 때는 “놀러간 사람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었다.
세월호참사 이후, 어떤 이는 SNS에 이렇게 썼다. “전에는 우리 사회가 진보와 보수로 나뉘는 줄 알았는데, 세월호를 겪고 보니 인간과 짐승으로 나뉘더라.” 그로부터 8년.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적 인성은 그때보다 나아졌는가? 질문하는 것조차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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