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과 혐한의 한일 우호
[전우용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라인 사태’의 근원인 혐한 감정 한국을 만만한 상대로 보는 일본 ‘혐한’을 수용하는 부일 모리배 우리 정부 또 “반일 안된다” 훈계
조선박람회
”종로 네거리 우리 동포들의 상점지대로부터 북촌 일대의 휑뎅크렁하며 비인 듯하며 어둠침침한 그것에 비하여 모든 사람의 눈을 현혹케하여 마지 않는 그 광경에 우리 정신까지도 전부 거기에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지방에서 올라온 우리 동포들이 한 번 이곳을 구경하고 이 땅을 밟을 때에 얼마나 찬란할 것인가. 이 놀람과 찬란이 드디어 부러움과 동경(憧憬)의 표적으로 변하여 그네들의 머리 속에다 깊고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별건곤』 1929.10.)
1929년 9월 12일부터 10월 31일까지,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에서 ‘조선박람회’를 개최했다. 조선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취지의 대규모 행사였다. 50일 동안 진행된 이 행사를 100만 명 이상이 관람했다. 당시 한글 잡지 『별건곤』은 한 촌로(村老)의 소감을 이렇게 소개했다. “거 참 흉악한 놈들일세, 조선 사람의 흉거리란 흉거리는 다 모아 놓았네 그려.” 사실 조선박람회는 ‘조선의 모든 것’이 아니라 ‘조선의 모든 흉거리’를 전시한 행사였다. 그러나 이 촌로(村老)처럼 조선박람회의 본질을 꿰뚫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 대한 ‘부러움과 동경’을 마음에 담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이 훨씬 더 많았다. 조선총독부가 이 행사를 기획한 이유는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하다’는 생각을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에게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조선인은 열등하다
어느 나라에서나 근대국가가 형성될 무렵에는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여러가지 상징과 담론을 동원하여 자민족의 우수성과 자국사의 특별함을 강조했다. 그런데 ‘자국사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타국사’와 비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인들은 자국사를 ‘독창적이고 선진적이며 위대한’ 역사로 꾸미기 위해 인접국인 한국 역사를 ‘사대주의적이고 후진적이며 미개한’ 역사로 정리했다.
자기들이 ‘잘났다’는 증거를 만들려면 한국인들에게 ‘못났다’는 낙인을 찍어야 했다. 메이지유신 무렵부터 일본의 신문잡지들에는 한국에 관한 기사들이 자주 실렸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는 주로 노인과 기생이었다. 반면 일본인은 흔히 사무라이로 묘사했다. 당시의 일반적인 관념을 동원하여 강인한 일본인이 노쇠하고 연약한 한국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본인들의 잠재의식에 심어놓으려 한 것이다. 한국과 한국인을 멸시하는 관념은 일본 근대 국민교육의 바탕에 깔린 기본 정서였다.
일본인들의 혐한감정은 한국을 식민지화한 이후 더 강화, 확산했다.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선입견에 따라 한국의 문화와 역사, 풍속 등을 조사했다. 1927년 조선총독부에서 비밀리에 발간한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이라는 책은 조선인의 일반적 성격을 다음 14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①방종, 사치, 낭비, 사행(射倖), ②표면적이고 형식적인 것을 좋아함, ③부화뇌동, ④모방성, ⑤무기력, ⑥겁이 많고 나약함, 회색, 보신술, ⑦이기적 판단, ⑧진지함이 없음, ⑨감격성이 없음, ⑩의뢰심이 많고 은의감(恩義感)이 없음, ⑪독립심이 없음, ⑫감각이 둔함, ⑬불평이 많음, ⑭자살을 경시함.
내용 자체도 편파적이고 왜곡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 인해 생긴 성향까지 ‘선천적 성격’으로 매도한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조선인관은 일본인들뿐 아니라 조선인들에게도 널리 공유되었다.
혐한감정과 반일감정
나치의 유대인 혐오가 홀로코스트를 낳았던 것처럼, 일본인들의 혐한감정도 종종 대량학살로 이어졌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의 학살, 1905년 이후 의병전쟁 때의 학살, 1920년 일본군이 간도 일대에서 자행한 한국인 학살, 1923년 일본 관동 대지진 당시의 한국인 학살 등에 모두 혐한감정이 작용했다. 태평양전쟁 시기 한국인 강제징용과 일본군 성노예 강제동원 등에도 혐한감정은 여지없이 작동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과 접촉하는 한국인들에게 ‘혐한’은 햇볕이나 공기와 같았다. 교과서들은 ‘혐한’의 근거들을 제시했고, 교사들은 혐한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혐한의 부당성을 인식하는 한국인들, 혐한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은 독립운동을 하거나 지원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만든 담론이자 정서인 ‘혐한’을 수용, 공유하는 한국인도 있었다. 3.1운동 때 이완용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에 반항하지 말라’고 훈계했다. 중일전쟁 이후 이광수는 동포들을 향해 ‘뼈와 살과 피까지도 일본인이 되자’고 촉구했다. 그들에게 일본인들의 ‘혐한’은 당연한 것이었고, 한국인들의 ‘반일’은 무모한 것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혐한’을 공유했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지배, 압박하는 상황에서 ‘친일’과 ‘혐한’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짝이었다.
혐한의 라인 사태
일본 정부가 한국 기업에 일본인들의 ‘국민 메신저앱’인 라인의 지분을 팔라고 음으로 양으로 강요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일본 정부는 미국 기업을 상대로는 절대로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아베 정권 기간 중 일본 내 극우 혐한 세력이 크게 늘어났으며, 이들은 한국 기업이 일본 ‘국민 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들 식민지였던 한국이 자국을 추격하는 것에도 불만을 느끼고 있다.
패전 후 일본 내에서도 근거 없는 일본 민족 우월의식과 주변 민족에 대한 혐오감을 청산하자는 문화운동이 벌어지기는 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1980년대 말 경쟁 만능의 신자유주의 사조가 확산하자, 일본 내에서도 군국주의 시대를 반성하기 보다는 ‘영광으로 기억하자’는 담론이 공공연히 유포되었다.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한 것은 일본인에게 자랑스러운 일이지 반성할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이 힘을 얻자, ‘혐한의식’도 다시 공개적으로 표출되었다.
일본 도처에서 혐한시위가 벌어지고 한국인 학교 학생들이 폭행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 지인(知人)은, 일본 정부의 이번 처사가 극우 혐한주의자들의 여론을 수용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 번의 대한 수출규제나 이번의 라인 지분 매도 압박은 일본 정부가 한국을 ‘기본가치를 공유하는 우방’이 아니라 ‘만만한 상대’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부일 모리배들
한국 정부와 여당은 이 사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를 두고 “반일 프레임은 국익에 도움되지 않는다”거나 “반일선동이 문제”라고 주장한다. 일제강점기 부일(附日) 모리배들의 주장과 똑같아서 너무도 익숙한 레토릭이다. 일제강점기 부일(附日) 모리배들은 ‘힘’을 ‘절대선’으로 숭배한 나머지 힘 있는 자가 지배하고 힘 없는 자가 지배 당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들은 처음 한국이 독립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은 한국인의 나쁜 습성 때문이라고 주장했고, 이어 한국인의 나쁜 습성 버리기 운동에 나섰다. 그들에게 한국인이 ‘나쁜 습성’을 버리고 대신 채워야 할 것은 일본인의 ‘좋은 습성’이었다.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한국 민족 자체를 일본 민족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부일(附日) 모리배들이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다워진 이유다.
윤석열 정부는 들어서자마자 일본의 강제동원 배상 책임을 일방적으로 면제해 주었다. 그때 외무부 장관은 “우리가 물컵의 반을 채웠으니 나머지 반은 일본이 채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오히려 우리 정부를 향해 “어서 나머지 반을 마저 채우라”고 계속 요구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일본 후쿠시마 핵폐기수가 안전하다고 대신 홍보해주었고, 욱일기를 게양한 일본 자위대함의 국내 입항을 허용했으며, 심지어 독도를 ‘영토분쟁지역’이라고 표기해 주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일본에 굴욕적인 태도를 보이면 보일수록 일본은 더 의기양양하다. 엊그제는 한국 정치인의 독도 방문에 ‘강력한 항의’ 성명을 내기까지 했다. 이러다 독도마저 내주는 건 아닌지 불안하기 그지 없다. 이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혐한 정책’을 펴는 일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못하면서 자국민을 향해서만 ‘반일은 안 된다’고 훈계한다. 일본을 향해 ‘정당한 항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불령선인(不逞鮮人)’ 취급하는 건, 식민지 총독부가 할 일이지 독립국가 정부가 할 일이 아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