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범기업에 준 면죄부와 대한민국 헌법정신

[전우용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윤석열, 3·1절 ‘피해자 책임론’인정 이어 징용해법, 자국민을 ‘돈의 노예’로 전락시켜 ‘정의·인도·동포애’라는 헌법정신 망각하고 화해는 ‘가해자의 인정과 사과’에서 시작해야

제3자 변제를 골자로 한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해법이 발표되자 피해당사자 양금덕 할머니가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3자 변제를 골자로 한 정부의 일제 강제동원 해법이 발표되자 피해당사자 양금덕 할머니가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제헌헌법 전문 앞 부분이다. 제헌헌법 이후 현행 제6공화국 헌법에 이르기까지 ‘삼일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대목은 단 한 차례도 빠지지 않았으며, ‘정의 인도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는 대목은 유신헌법에서만 빠졌을 뿐이다. ‘삼일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 것은 ‘우리 대한국민’이 나라를 운영하고 세계와 교류하는 헌법적 원칙이다.

헌법의 핵심가치 ‘정의, 인도, 동포애’

우리 민족이 공유해야 할 헌법상의 핵심 가치가 ‘정의 인도 동포애’인 것은, 이것이 바로 ‘삼일정신’의 정수(精髓)이기 때문이다. 기미독립선언서는 독립선언의 목적으로 ‘세계만방에 고(告)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克明)하는 것’과 ‘자손만대에 고(誥)하여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正權)을 영유(永有)케 하는 것’을 들었다. ‘인류평등’이라는 범 세계적 ‘대의(大義)’를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보다 앞에 둔 것이 중요하다. 한 민족, 한 집단, 한 인간이 다른 민족, 다른 집단, 다른 인간을 억압, 수탈, 모욕, 학대하는 것이 ‘불의’이며, 이 불의에 맞서는 것이 ‘정의’다. 약소민족이나 사회적 약자의 ‘정당한 권리’는 정의가 구현된 상태에서만 보장될 수 있다. 기미독립선언서는 이 선후관계를 분명히 적시했다. 공약삼장 첫 번째가 ‘금일(今日) 오인(吾人)의 차거(此擧)는 정의, 인도, 생존, 존영(尊榮)을 위한 민족적 요구이니’로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정의가 구현되고 인도(人道)가 살아나야만이, 비로소 생존할 수 있고 존영(尊榮)을 누릴 수 있다.

‘동물적 생존’을 요구했던 일본 군국주의

지난 2019년 대한민국 대법원이 ‘일본 전범기업은 한국인 징용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한 행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최종 판결하자, 일본은 반도체 생산 관련 소재 부품 장비 등의 대한(對韓) 수출 규제를 시작했다. 그 때 국내의 유력 신문에는 ‘자존(自尊)보다 생존(生存)이 먼저다’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논설이 실렸다. 얼핏 보기에는 맞는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자존(自尊) 없는 생존은 동물적 삶이며, 인간답지 못한 삶은 무의미하다는 인류 보편의 대의(大義)에 한참 어긋나는 망발이라 해야 옳다. 타인의 자존(自尊)을 짓밟아 ‘동물적 생존’을 강요하는 행위는 불의(不義)하고 반(反) 인도적(人道的)이다. 삼일운동 당시 우리 선조들은 절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동물적 생존’을 요구했던 일본 군국주의의 불의와 반인도에 맞서 목숨을 걸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니, 이것이 현대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기초가 된 것이다.

‘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복귀할 꿈을 꾸면서 과거의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일본 정부의 무도한 도발에 대해 당시 문재인 정부는 우리 헌법정신을 지키면서 당당하게 대처했다. 무역 상품을 이용한 일본의 경제 도발이 국제 무역 규범에 위배되는 부당한 행위라는 점을 들어 WTO에 제소하는 한편, 소재 부품 장비 산업의 국산화에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소재 부품 장비 산업의 자급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졌으며, 일본 국내에서조차 ‘자해(自害) 공격’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일본 정부의 경제 보복에 맞서는 것이 대의(大義)라는 확신과 이제는 맞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대통령의 말이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입니다”였다.

2019년 8월2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KBS 캡쳐
2019년 8월2일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긴급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KBS 캡쳐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않을 것”이라던 나라

하지만 현 대통령 윤석열은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이 한국인들을 학대하고 수탈한 책임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전형적인 ‘피해자 책임론’을 내세웠고, 다시 6일에는 ‘국익을 위해서’라는 미명 하에 ‘일본 전범기업은 한국인 징용 노동자들에게 배상할 의무가 있다’는 한국 대법원 판결에 배치되는 ‘해법(解法)’을 내놓았다. 한국 기업들이 자금을 갹출하여 일본 전범기업 대신 강제 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에게 ‘보상’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의 요지는 일본 전범기업이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인권을 유린한 행위는 ‘반인륜적 범죄’이며, 이와 관련한 사과와 배상 문제는 19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정부가 발표한 ‘해법’은 일차적으로 ‘가해자’의 실체를 지워버림으로써 대한민국 사법부의 판결을 묵살한 불법적 결정이다. ‘인간 존엄성’의 문제를 ‘돈’의 문제로 치환해버린 속물적이며 반(反) 인도적인 결정이기도 하다. ‘가해’에 사과하기는커녕 그 사실을 인정조차 않는 가해자에게 피해자를 대변해야 할 정부가 마음대로 면죄부를 주는 행위는 정의롭지 않다. 70년이 넘도록 학대받은 사실을 잊지 못하는 자국민을 ‘돈의 노예’로 취급하는 것도 결코 동포애의 발로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정부가 발표한 일제강제징용 해법이 한일 양국 공동이익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TV캡쳐
윤석열 대통령은 “정부가 발표한 일제강제징용 해법이 한일 양국 공동이익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사진=연합뉴스TV캡쳐

가해사실조차 인정않는 일본에 면죄부를 주다니

게다가 일본 전범기업들은 태평양 전쟁 중 중국 땅에서 강제동원됐던 중국인 노동자들에게는 이미 사과와 배상을 했다. 일본 정부가 유독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만 고압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정부의 ‘해법’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는 기간 동안 저지른 모든 반인륜적 만행에 공식적 면죄부를 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이번 조치에 대해 일본 정부 인사들은 ‘강제동원과 학대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발언을 내놓고 있다.

더구나 윤석열 정부가 말하는 ‘국익’의 실체도 분명치 않다. 일본 상품 수입량을 다시 늘리는 것이 국익인가? 아니면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를 지지, 성원하는 것이 국익인가? 설령 대통령과 그 주변 인사들이 생각하는 국익이 따로 있다 하더라도, 그를 위해 정의롭지도 인도적이지도 않은 해법을 내놓은 것은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송두리째 부정한 행위다. 정의와 인도를 무시하는 자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인지하지 못한다.

헌법정신 위반만이 문제는 아니다. 사람들이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극복하고 진정으로 화해하기 위한 첫걸음은 언제나 ‘가해자의 인정과 사과’다. 그런 점에서 ‘미래를 향한 화해’라는 허울 좋은 구호의 토대는 ‘몰상식’일 뿐이다.

글쓴이

전우용 역사학자

필자인 전우용 교수는 우리 시대의 역사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 현안에 대해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는 역사학자다. <우리 역사는 깊다>, <내 안의 역사>, <민족의 영웅 안중근> 등의 저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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