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언론 편파성의 기원(起源)

[전우용의 역사에서 배우는 교훈] 우리 언론은 왜 이렇게 편파적일까 유신때 언론자유운동이 분기점 보신했던 언론인들, 광주항쟁 때도 침묵 군사정권 미화하고 스스로를 ‘보수우파’로

1980년 8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대통령 출마를 기정사실화하자 조선일보는 전두환 육군 대장의 전역식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1980년 8월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이 대통령 출마를 기정사실화하자 조선일보는 전두환 육군 대장의 전역식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검찰에게 압수수색 당하는 집 앞에 늘어서서 음식점 배달원을 붙잡고 “짜장을 먹었나요, 짬뽕을 먹었나요, 아니면 찌개류를 먹었나요?”라고 묻던 기자들이 있었다. 검찰 직원들의 점심 메뉴가 ‘국민의 알 권리’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 나름의 이런 중요도 판별 원칙을 다른 장면에는 적용하지 않았다.

대통령 부부와 사진찍는 기자들

윤석열 대통령이 측근들과 함께 횟집에서 회식하고 나온 뒤, 식당 종업원을 붙잡고 “양주를 마셨나요, 맥주를 마셨나요, 아니면 폭탄주를 마셨나요? 음식값은 얼마나 나왔나요?”라고 물은 기자는 한 명도 없었다. 전 정권 때에는 ‘살아있는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기자의 책무’라던 사람들이, 현 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대통령 부부 주위에 서서 사진 찍히는 것이 자기들의 책무인 양 행동한다. 현직 국회의원 소유지 주변에서 도로가 이상하게 휘어진 경위 관련 ‘의혹’과 현직 국회의원의 코인 투기 ‘의혹’에 관한 한국 언론의 보도 건수는 두드러지게 차이가 난다.

언론을 ‘사회의 목탁’이나 ‘국가의 제4부’라고들 하지만, 절대다수의 언론사는 사기업이고 기자들은 회사원이다. 종업원들이 자신의 ‘공적 책무’보다 기업주와 광고주의 이익에 더 신경 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세계의 언론지형이 ‘가진 자들’에게 더 유리하도록 기울어지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하지만 기업주와 광고주의 영향력이 크다는 사실만으로는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세계 최하위인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항거의 역사, 양심의 흔적들

1974년 1월, 대통령 박정희는 긴급조치 1, 2호를 공포하여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는 물론 헌법의 개폐를 주장하거나 발의, 제안, ‘청원’하는 행위까지 금지했으며, 그와 관련한 ‘사실’도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언론자유’라는 허울마저 벗겨버린 폭거였다.

그해 10월,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 180여 명이 사내에서 집회를 갖고 ‘언론자유는 언론인 스스로 쟁취하자’는 내용의 ‘10.24 자유언론수호선언’을 발표했다. 다른 언론사 기자 일부도 언론자유 쟁취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선언’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먼저 광고주들을 압박했고, 이어 사주들을 협박하여 기자와 PD들을 대량 해고했다. 회사에서 쫓겨난 기자들은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저항했으나, 그 회원 중 일부는 다시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유신정권의 언론탄압은 언론사들 안에서 ‘기자의 책임’과 ‘인간의 양심’을 함께 소멸시키는 행위였다.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가 열렸다. 편집국의 정중앙인 사회부장석 바로 뒷자리에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가 내걸렸다. 사진출처= 한국기자협회
19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유언론실천선언대회가 열렸다. 편집국의 정중앙인 사회부장석 바로 뒷자리에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가 내걸렸다. 사진출처= 한국기자협회

1980년 광주에서 계엄군이 무고한 양민을 학살할 때, 한국 언론들이 이 사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전두환 찬양에만 열을 올렸던 것은 언론사 안에 ‘양심’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나마 남아 있던 ‘양심의 흔적’조차도 1980년 11월의 언론 통폐합 과정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제5공화국 시절 언론인들은 정부가 내려주는 ‘보도지침’에 따라 글을 짓는 ‘초등학생 수준’의 일을 하거나, 군사독재정권을 자발적, 적극적으로 찬양하는 일만을 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제5공화국 체제는 무너졌지만, 사실상의 군사독재는 그 뒤로도 5년 더 지속되었다. 김영삼의 이른바 ‘문민정부’ 시절에도 해직되었던 기자들은 복직되지 않았다. 언론사들 안에서는 1975년과 1980년 수백 명의 기자들이 해직될 때 자리를 지켰던 사람들만이 승진을 거듭했다. 1975년의 ‘자유언론수호운동’은 한국 현대 민주화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한국 언론인들 공통의 ‘모범’이 되지는 못했다. 회사 안에서 신입 사원들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유언론수호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던 사람들뿐이었다. 신입사원들이 20년 전 회사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모범’으로 삼을 이유는 없었다.

‘참 언론’을 지우려 탄생한 보수언론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려드는 것은 사람의 습성 중 하나다. ‘언론자유’를 얻으려 싸우다 희생당한 사람들이 ‘참 언론인’, ‘양심적인 언론인’, ‘정의로운 언론인’으로 불리는 것을 보면서, 그러지 않았거나 못했던 사람들이 어떤 심사였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기가 ‘거짓 언론인’, ‘비양심적 언론인’, ‘불의한 언론인’으로 지탄받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해 보았자, 기껏 ‘비겁한 언론인’으로 격상될 뿐이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실제로 그들은 자기 행위를 강요한 ‘불의한 정권’ 자체를 정당화하려 들었다.

유신체제와 전두환 군사독재체제가 정당해지면,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그에 부역한 행위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이른바 주류언론들은 ‘자유언론 수호운동’을 포함하여 1970-80년대 민주화운동 전체를 ‘좌경용공’이나 ‘종북좌파’의 소행, 또는 그 자장(磁場) 안에서 진행된 일로 매도했고, 자기들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불의한 정권에 협력한 것인 양 행세했다. 그들은 군사독재정권의 주역들에게 ‘산업화 세력’이니 ‘근대화 세력’이니 하는 미명(美名)을 붙였다가 이윽고 그들과 자기들을 한데 묶어 ‘보수 우파’로 자칭(自稱)했다. 자기 책임을 배신하고 자기 양심을 속인 행위였지만, 자기 보호 본능의 발로라고 이해할 수는 있다.

역사는 부채를 탕감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들이 한국 언론계의 주류이자 지도자이며 권위자가 된 데에 있다. 그들의 영향력은 자기 회사 안에서만이 아니라 한국 언론계 전체에 뻗쳤다. 한 세대 안에서 일반적으로 용납되는 행위는 ‘관행’이지만, 이것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면 ‘문화’가 된다. 언론 자유와 정의, 언론인의 사회적 책무를 앞장서 주장했던 ‘선배’들은 고생만 하고 사회로부터 적절한 보상도 못 받았는데, ‘불의한 정권’에 협력했던 ‘선배’들은 사회의 ‘지도층’이자 ‘부자’가 되었다면, 신입 직원들은 누구를 본받는 게 낫다고 생각할까?

한국 언론지형의 ‘극단적인 기울어짐’은 사회적 보상의 ‘극단적인 기울어짐’을 반영할 뿐이다. 식민지 시기는 진즉에 끝났지만, 식민지 잔재는 청산되지 않았다. 군사독재 시대도 끝났지만,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다. 오늘날 한국의 언론문화가 ‘군사독재 시대의 언론문화’와 흡사한 이유다. 역사는 부채를 탕감해 주는 법이 없다. 그래서 과거를 청소하지 않으면, 미래가 더러워지는 법이다.

글쓴이

전우용 역사학자

필자인 전우용 교수는 우리 시대의 역사의식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 현안에 대해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는 역사학자다. <우리 역사는 깊다>, <내 안의 역사>, <민족의 영웅 안중근> 등의 저서를 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