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즘의 진수: 러시아 이동파의 ‘그림 앨범’②
[김희은의 울림 깊은 러시아 예술 이야기] 시대의 부조리와 싸운 러시아 화가들: 이동파 크람스코이, 니콜라이 게, 마코프스키 등 작품 러시아에서의 삶과 러시아 사람들 생생 묘사
시대의 부조리와 싸운 러시아 화가들: 이동파① 에 이어
이동파가 2차원의 화폭으로 보여주는 19세기 러시아인들의 삶은 진솔 그 자체다. 화폭 속에서 삶은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고 교훈적이기도 하다. 바탕에는 ‘삶과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이 배어 있다. 지금부터 이동파의 대표 작품을 통해 예술이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 어떻게 호흡했는지 하나씩 들여다 보기로 하자.
러시아 최고의 문화 예술 기획자 이반 크람스코이
이동파의 대표 수장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년)는 만일 21세기에 태어났다면 최고의 문화 예술 전시 기획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을 것이다. 미술계의 방시혁 쯤 되지 않았을까? 물론 카리스마적인 통솔력으로 이동파를 이끌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모두가 존경할 만한 그의 그림 실력이 화가들을 응집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크람스코이는 천재 화가였다. 특히 초상화 눈빛 표현이 대단히 뛰어나서 작품 속 모델들과 펼치는 소소한 ‘눈빛 교환’은 그림 감상의 백미 중에 하나다.

위 그림은 한국 미술애호가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러시아 그림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톨스토이’ 책 표지에도 자주 사용돼 눈에 익은 작품이다.
제목은 <미지의 여인>이지만 그림 속 미녀는 지독한 사랑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을 불사르고 생을 마감한 비운의 여인, ‘안나 카레리나’라고 한다. 톨스토이가 만들어낸 최고의 미녀다.
검은 벨벳 차림의 여인은 미녀라면 가져야 할 여러 분위기를 모두 품고 있다. 우선 신비롭고 아름답다. 특히 그윽하게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은 촉촉히 젖은 듯 깊은 우수를 띠고 있고, 무심함 표정 속에는 약간의 도도함과 냉정함까지 드러내 보는 이의 시선을 확 끌어당긴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차분하면서도 온 몸에 뜨거운 열정을 가득 숨기고 있는 듯 정열적이다. 또 우리가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생을 마감하는 여인의 마지막을 알고 있어서인지, 표현 못할 비장함까지 느끼게 하는<미지의 여인>이다.

이 그림은 모든 것을 품었으나 모든 것을 비운 듯한 눈빛, 세상 모든 이치를 통달했으나 조용히 침묵하는 듯, 그림 속 산지기의 눈빛은 한없이 맑고 깊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지금까지 본 수많은 초상화 중에 최고로 꼽는 작품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강하고, 가만히 있어도 빛난다. 세상과는 동떨어져 사는 사람이지만 눈빛에 거대한 세상이 그대로 들어있다. 그래서 마음이 산란할 때 이 그림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너무 애쓰지 말고, 너무 움켜쥐려 하지 마라. 그냥 묵묵히 가는 거야. 묵묵히”라고 산지기가 눈빛으로 말하는 듯 하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여러분도 산지기와 눈맞춤 해보시길.

만약 통곡을, 슬픔을, 고통을 그림으로 담아낸다면 어떻게 그려져야 할까? 흰 수건으로 자신의 입을 막으며 메마른 고통을 쏟아내는 그림 속 여인을 보면 내 가슴도 쿵 하고 내려앉을 수 밖에 없다.
검은 상복 차림인 것을 보니 누군가를 떠나 보냈나 보다. 그녀 옆에 놓인 영구대(시체를 놓는 탁자)의 조그마한 크기에서 어린 자식을 잃었구나를 가늠한다. 자식의 죽음은 어떤 말로도 위로가 불가능한 슬픔일 것인데 그 참혹한 상실을 견뎌내는 그림 속 여인은 이미 눈물조차 메말라 텅 비어 보인다. 자식을 잃어서 생긴 참혹한 근심, 세상 가장 혹독한 고통을 그려낸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이다.
그림으로 가르침을 주는 이동파의 철학자 니콜라이 게(1831-1894)
그림이 시가 되고, 소설이 되고, 철학이 되고, 그리고 가르침이 된다. 니콜라이 게는 이동파의 대표 화가로 2차원의 화폭을 통해 철학적 메시지를 전한다.

무언가 갈등하고 고민할 때, 특히 불의와 야합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우리 양심은 무슨 색깔일까?
누군가가 끌려가고 있다.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듯한 그림 속 사람은 무리에 선뜻 다가서지 못하고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온몸을 초라하게 웅크리고 있다. 바로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 넘기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배반자 ‘가롯 유다’다. 갈등하고 있는 그의 양심은 검은 어둠이 되어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다.
사실 우리도 일상의 갈등 속에서 ‘이번만 눈감아 버리자’ 할 때가 있다. 그때의 검게 음영진 우리의 모습은 비참하게 서 있는 구부정한 어깨의 저 가롯 유다와 같지 않을까? 또 그때 내 양심은 그림 속 색깔처럼 무겁게 가라앉은 어두운 흑색이 아닐까?
니콜라이 게는 사실 이 그림을 통해 당시 러시아 황제의 압제와 제도적 모순 속에 수난 당하는 민중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하고 눈과 귀를 닫아버린 귀족들의 몰염치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싶었다 한다. 시커멓게 그림자 진 19세기 러시아 권력층의 양심을 검은 어둠의 색깔로 조용히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진리는 무엇일까? 니콜라이 게는 「요한복음」18장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진리에 대해 정의하려 했다. 그림 속 빌라도 총독이 거들먹거리며 예수에게 “네가 말하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질문하니 예수는 답하지 않은 채 무섭고 차갑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빌라도를 쳐다본다. 빌라도의 오른손만이 민망하게 허공을 가르고 있다.(요한복음 38절: 빌라도가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냐?”하고 물었다. 빌리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 사람들에게로 나와서 말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소.”)
일반적으로 그림에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을 표현할 때 키아로스쿠로(명암 대조법)를 많이 쓴다. 대표적으로 렘브란트의 작품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선에는 밝은 빛을 주고, 악에는 어둠을 주어 극적 효과를 내는 식이다.
그러나 니콜라이 게는 반대로 어둡고 칙칙한 그늘 속에 ‘진리의 상징’ 예수를 묻어버리고 비단옷을 휘감고 있는 빌라도는 환한 빛 속에 두고 있다. 바로 버려진 듯한 예수를 표현함으로써 쉽게 얻을 수 없는 진리와 선의 성격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진리는 끝없는 노력과 연구, 자기 성찰을 통해야만 한 걸음씩 다가갈 수 있다. 아무나 순식간에 얻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빌라도들이 잘못된 선과 도덕의 잣대를 휘둘러 올바른 정신을 좀먹게 하는 현실이 얼마나 많은가! 작가는 그런 모순들을 예수와 빌라도를 통해 보여주려 했다. 그러면서 조금만 주의를 흐트려도 거짓이 참이 되는 세상이니 어둠 속에서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선과 진리를 밝은 곳으로 끌어내는 데 열(熱)과 성(誠)을 다하라 조용히 일러주는 듯하다.
시대를 보여주는 거울 – 이동파가 그리는 ‘삶과 사람’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지 마라, 노여워하지 마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올 것이니- 푸쉬킨

동생을 들쳐 업은 아이의 절박한 표정이 얼마나 생생한가. 보는 이로 하여금 소녀와 함께 폭풍우를 피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긴장감이 느껴진다. 바람이 심상치 않고 아이들을 뒤따라오는 먹구름 또한 예사롭지 않다. 발걸음을 재촉하는 소녀의 투박하고 상처 난 맨발이 남매의 혹독한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플 뿐이다.
당시 러시아는 빈곤과 전쟁, 질병으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갈 때였다. 수많은 아이들이 부모를 잃고 세상을 떠도는 불행한 신세가 되었다. 폭풍에 그대로 내버려진 듯한 그림 속 아이들도 안타깝고, 바람 앞의 등불 같은 19세기 러시아의 현실 또한 그림 속 남매 모습인 것 같아 보는 이로 하여금 한숨 짓게 되는 그림이다.

부모는 자식이 배불리 먹는 모습을 볼 때 가장 행복하다. 19세기 허울 뿐인 농노해방 후 경작할 땅을 나눠 받지 못한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거나 도시로 나와 최하층민을 형성하게 된다. 수많은 민중들이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전전긍긍 살아가는 19세기 말엽 러시아의 모습이다.
그림 속 아이도 한 끼를 얻기 위해 도시로 밀려나와 노동자가 된 듯하고 그렇게 아이를 품에서 떼어 보낸 엄마는 아들이 걱정되어 먼 길을 달려 온 것 같다. 오랜만의 상봉일텐데 아이는 엄마를 안아주기 보다는 엄마가 가져온 빵덩이를 허겁지겁 베어 문다. 그런 아들이 섭섭하기도 할 터이지만 엄마는 표현할 수 없는 애틋함을 고스란히 감내하며 쳐다보고 있다. 이들의 랑데부는 19세기 러시아의 또 다른 아픈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해 가슴이 뭉클해진다.
알코올 중독 말기 즈음으로 보이는 남자가 술집에 들어가려고 하고 아내는 필사적으로 남자를 막아선다. 아내의 절망적이고 힘든 몸짓, 엄마에게 딱 붙어 아빠를 바라보는 겁에 질린 아이, 그리고 남자의 손엔 술값으로 맡겨질 누군가의 외투가 쥐어져 있다. 혹독한 날씨의 러시아에서는 외투가 곧 생명이다. 그 생명을 술값으로 날려버리려는 남편을 필사적으로 막아서는 아내의 눈빛이 슬프다 못해 공허하다.
‘보드카는 맑고 깨끗하지만, 코를 빨갛게 만들고 평판을 검게 한다’고 한 안톤 체호프의 말처럼 지나친 음주는 자신만 병들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가족과 주변 모두를 음울하게 만든다. 술로 지쳐가는 러시아의 참혹한 현실을 꼬집고 있다.

혹독한 겨울 끝에 찾아온 봄햇살을 즐기는 두 여인. 귀족처럼 보이는 노파(왼쪽)는 그리움 가득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찬란하게 빛나던 젊음의 시간 속에 인생의 고비마다 널려있는 아련한 사연을 떠올리는 듯하다. 그런 그녀 옆에서 묵묵히 바느질하고 있는 여인은 하녀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무채색으로 이뤄진 듯한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상의 일을 하고 있다. 지금의 밝은 햇살이 고마울 따름이지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에 젖을 봄날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둘은 지금 하나의 사모바르(러시아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라 함께 마신다. 신분 차이가 엄격한 러시아지만 신분의 고하를 떠나 두 노인은 오랜 시간 함께 하며 이미 서로 의지하는 친구가 된 듯하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내려앉는 것. 이들은 평생을 함께 해온 인생의 동반자로서 순리에 순응하며 끝까지 생을 함께 할 것이다. 그림은 세상 잣대를 뛰어넘어 그렇게 함께 살아가는 삶의 가치를 조용히 보여준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는 사람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간다고 말한다.
니콜라이 야로센코는 이반 크람스코이가 세상을 달리 한 후 이동파를 이끌어가는 실질적 리더로 톨스토이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에 감동을 받아 이 그림을 그렸다.
시베리아행 열차가 간이역에 잠깐 멈춘 사이 기차 창틀 사이로 햇빛을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그림속 사람들은 러시아 혁명가와 그의 가족이다. ‘정치범’이란 죄명을 안고 ‘죽음의 땅’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그들이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나아가 수형열차가 잠깐 간이역에 정차한 사이 엄마는 하루 식량으로 쓰기에도 부족한 빵 한 조각을 떼어내 아이에게 쥐어주며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나눔의 아름다움’을, ‘생명의 귀함’을, 그리고 ‘사랑의 감정’을 가르친다.
이렇게 야로센코는 2차원의 화폭을 통해 죽음을 앞둔 혁명가들의 열차 안에도 삶과 생명이 있음을,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 있음을 빵 조각을 나눠주는 고사리손을 통해 일깨워준다. 미소 짓는 아기의 천진한 얼굴에서 순수의 절대 정의를 읽을 수 있으며, 혹한의 현실 앞에도 굴하지 않고 찰나의 여유를 즐길 줄 아는 러시아 지식인들의 풍요로운 영혼과 그들이 꿈꾸는 희망찬 미래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러시아 그림은 문학적이다. 작품마다 중요한 서사를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먼 나라 러시아의 이야기지만 마치 우리의 이야기인 양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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