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부조리와 싸운 러시아 화가들: 이동파 ①
[김희은의 울림 깊은 러시아 예술 이야기] 크람스코이 등, 황제 칙령 반발해 전국 순회展 대부호 트레차코프, 비평가 스타소프의 ‘후견’ ‘삶과 사람’ 직시하며, 민중들 의식화 이끌어 50년간 수만 점 남겨...세계 최장 미술화파로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 하소서
-김지하 시, 김민기 곡 ’금관의 예수’ 중에서
러시아 지식인들의 특별한 각성
19세기 참혹한 러시아 현실을 고뇌하는 지식인들은 그들의 개혁 열망을 황무지 돌산에서 웅크리고 있는 예수의 깍지 낀 두 손에 실었다. 러시아는 무엇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조국을 걱정하고, 나아가 개혁의 소망까지 실려 있는 그림 <광야의 그리스도>는 당시 러시아를 고민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을 일깨우는 지표가 된 작품이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은 가벼울 수 없었다. 바위에 주저앉은 예수의 상처투성이 발은 당시 시대를 위해 희생했던 수많은 혁명가들의 고난의 행보를 그대로 대변했다. 가시밭길 같은 현실이지만 어떤 불의에도 굴하지 않겠다는 19세기 러시아 지식인의 결연한 의지가 그림에 배어 있다.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은 시대와 현실을 고민하지 않는 지성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무에 충실하고 일신의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의 싸움을 펼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지식인들을 ‘러시아 인텔리겐챠’라 부르는데, 이들의 힘은 곧 19세기 러시아 역사를 발전시키고 미래를 이끌어 내는 원동력이 된다. 일반적으로 전문 지식인이라 일컫는 인텔리겐챠와는 명백히 구분된다. 이들은 19세기 러시아 사회 전반에 자리하고 시대의 목소리가 되어 활동하던, 러시아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계층이었다. 러시아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들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화가는 사회현상의 비평가들”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러시아 인텔리겐챠 화가들은 민중의 눈과 귀가 되어 그들을 대변하며, 19세기 현실을 화폭에 담아낸다. 그 중심에 위치한 <이동파 Передвижники>는 미술계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을 펼쳤으며, 그림의 주제는 물론 그림 향유 대상까지 민중이 주인공이 되도록 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러시아만의 독특한 예술 혁명이며, 그 처음을 연 사람이 바로 이동파의 수장 ‘이반 크람스코이’다.
러시아는 샤갈, 말레비치, 칸딘스키의 조국이며 현대 모더니즘 생성에 뿌리 역할을 한 나라다. 20세기 초 세계 미술계의 판도를 바꿀 정도로 대단했던 러시아 미술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분명 어느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요행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일궈낸 예술적 성과가 그 밑거름을 이루었다. 바로 ‘19세기 이동파’가 일으킨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의 폭발적 발전이 바탕이다.

1864년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를 주축으로 형성된 <이동파>는 기득권의 부패에 저항하고 러시아 현실을 고발하는 사실주의적 화풍을 기치로 내걸고 1871년부터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도시별 순회 전시회를 연다. 예술의 현실 참여를 중시하며 동시대 모든 사람에게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이동파의 최고 목표였다.
이동파가 결성될 당시 러시아 미술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황실 기구인 ‘예술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전개됐고, 이 시기 그려진 교회화나 역사화, 신화 등은 귀족을 위한 주제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격변중이었다. 1863년 러시아 철학자 체르니셰프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발표하며 당시 지식인들이 역사적 진일보의 열망에 들끓게 만들었고 문학, 미술, 연극 등 전반에 걸쳐 사실주의 예술 제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체르니셰프스키 (1828-1889)는 1860년대 러시아 혁명의 민주주의 지도자로서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성서가 된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집필, 레닌을 포함한 러시아 혁명가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러시아 철학자 헤르첸과 함께 러시아 나로드니키주의(인민주의)를 창시한다. 1853~1862년 잡지 『동시대인』의 주편집자로 활동하며 날카로운 필봉을 휘두르며 전제 정치와 농노제를 비판하고 러시아의 지성계에 혁명 정신을 불어넣었다.-필자 주)
‘이동파 탄생’ 도화선 된 황제 칙령
그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예술 아카데미’는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사건을 일으켰다. 1863년 예술아카데미는 졸업 작품전 주제로 1861년에 발표된 ‘반쪽자리 농노해방법’을 찬양하라고 발표했다. 예술 창작의 자유를 말살한 것도 말이 안될 뿐더러 현실적으로 절대 수용할 수 없는 황제 칙령을 옹호하라고 한 것이었다.
이에 크람스코이를 포함한 14인의 예술아카데미 졸업생들은 예술 작품 주제 선정의 자유를 요구하며 학교를 자퇴해 버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늘을 찌르던 예술아카데미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예술가들로부터 외면 당하는 교육기관으로 전락했다.
우선 학교를 자퇴한 졸업생 14명은 생활 공동체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이동파 전신)’을 결성하고 광범위한 활동을 통해 조직적인 전시 공동체를 꾸리며 이동파 탄생의 밑바탕을 다졌다. 이렇게 싹을 틔운 러시아 이동파는 기득권에 정면 도전하는 세계 최초의 반체제적 성격의 미술운동으로 거듭났다. 이로써 그들은 그림으로 세상을 보여주는 거대한 ‘시대 앨범’을 하나씩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러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전시회를 연다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동파>라 불리는 이 운동의 목표는 예술을 관료·행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러시아 민중을 교화시키는 데 있었다. 따라서 미에 대한 탐구보다 사회적, 윤리적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졌고 ‘삶과 사람’이라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적 문제의식을 극대화하는 데 앞장섰다.
그들은 1871년부터 1923년까지 약 50년 동안 48회의 이동전을 개최하였고 수만 점의 시대상을 담은 사실주의 회화 작품을 배출했으며, 세계 미술사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최장수 미술화파의 역사를 쓰게 된다.
하지만 이까지 읽은 독자라면 의구심이 생길 수 있다. 러시아는 계급 차별이 명백하고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전제정치가 유지된 나라 아닌가. 그런 나라에서 <이동파>가 탄생한 것도 의아하지만, 폭발적으로 그려졌다는 현실비판적 작품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한줌의 재가 되지 않고 민중들의 삶으로 파고들어 시대의 언어가 될 수 있었는지가 궁금할 것이다.

‘트레차코프’와 ‘스타소프’라는 후견
바로 이들 <이동파>의 활동에 밑거름이 되어 주고 힘이 되어준 이들이 있었으니, 사업가 파벨 트레차코프와 비평가 스타소프다. 예술계에서 파벨 트레차코프는 ‘황제 위의 권력’이라 불릴 정도로 러시아 최고의 부호였다. 또 스타소프는 ‘시대의 목소리’라 불리던 최고 비평가였다. 즉 <이동파>가 전국 순회 전시회를 열면 돈 많은 트레차코프가 방문해 그림을 사주고, 스타소프는 언론을 통해 그림에 대한 예술적 명분과 가치를 적극 부여해 주었다.

19세기 말엽 러시아 화가들로서는 전시할 공간이 전국에 충분했고, 그림을 사 줄 부호가 있었으며, 또 최고 비평가가 권위까지 부여해주는 그야말로 ‘완벽한 예술 시스템’을 향유할 수 있었다. 때문에 진심으로 예술 창작에만 몰두하면 걱정할 게 없었다. 이런 현실 아래에서 이동파 전시가 회를 거듭하면 할수록 수준 높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고,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풍속화는 푹풍 같은 발전을 하게 된다.
또 <이동파>의 비판적 리얼리즘 회화는 시대를 보여주는 커다란 거울로서 민중들의 가슴에 파고들어 읽지도 쓰지도 못하던 수많은 민중들을 의식화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예술이 제대로 대중과 호흡하며 그들의 목소리가 되는 혁명적 시스템, 그것이 <19세기 러시아 이동파>의 활동이었다.
트레차코프를 중심으로 이뤄진 러시아 미술은 다음 편 칼럼에서 다시 상세히 이야기 나눠보려 한다. 기대해 주시길 바란다.
<이동파>의 수장, 이반 크람스코이는 “화가는 사회 현상의 비평가다. 사회의 중요한 장면들을 표현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주도하에 이뤄진 이동파 화가들이 그려낸 ‘사람과 삶’의 단편들이 어떠한지 지금 바로 이어진다. 하나씩 함께 음미해 보자. ②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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