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속에 숨겨진 개인주의

[김갑수의 외국어 사통오달] 속마음을 철저하게 숨긴 채 모나지 않게 행동하는 일본인 언어에도 자신을 꼭꼭 숨기는 표현들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 가족. 가족에서도 개인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 전통의상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 가족. 가족에서도 개인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인들이 개인주의자가 된 배경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간사하다, 믿을 수가 없다, 신의가 없다, 알랑거린다 등등. 다들 무척 가볍다는 쪽으로 결론이 납니다. 문화가 다른 사람들을 타자화하는 것은 한국인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과 엄청나게 다른 것도 사실입니다.

일단 일본인들은 뼛속까지 개인주의자들입니다. 일본인들의 개인주의는 한국인들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제가 일본인 친구들을 처음 알게 됐을 때, 친구가 자신의 친구들을 데리고 나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처에 사는 친구들이라고는 하지만 서로의 집에 가본 적도 없고, 서로의 부모님을 만났다거나 통화를 해본 적도 없고, 심지어는 서로의 집이 어디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처럼 친구의 집에 놀러가 어머니께서 정성껏 차려주시는 밥상을 같이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이런 게 무슨 친구인가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인들은 철두철미 개인주의자들입니다.

이런 개인주의는 일본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일본의 봉건시대는 진짜 살벌한 시대였고, 무사들은 칼 두 자루를 차고 다니면서 그 자리에서 서민들을 즉결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물론 에도시대 이후에는 이런 권한에 대한 법적 제한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늘 그렇듯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입니다. 일단 칼을 휘둘러서 목이 날아가면 그 뒤에 무슨 조치를 취하든 다 소용없는 일입니다.

이런 무시무시한 분위기에서 사람들이 극도로 행동을 조심하고 자신의 속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게다가 옆 사람과 잘못 엮이면 나와 내 가족의 목숨도 보장할 수가 없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도 철저하게 거리를 지키는 것이 몸에 뱄습니다. 이 점은 가족끼리도 마찬가지입니다.(이후에 나오는 일본어들은 저자의 편의에 따라 한글로 표기한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혼네(속마음)와 다테마에(보여주는 예의)의 문화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속마음은 철저하게 숨긴 채 누가 보더라도 모나지 않게 행동하는 거죠.

일본어에서는 어떻게 반영돼 있을까

이러한 문화는 언어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서 일본인들은 외국인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은 수동형을 사용합니다. 가령 ‘친구가 놀러 와서 숙제를 하지 못 했다’라는 표현을, 일본어로는 ‘친구에게 놀러와져서 숙제를 하지 못했다’라고 합니다. 또 ‘아이가 울어서 잠을 자지 못 했다’ 하는 표현은, ‘아이에게 울어져서 잠을 자지 못 했다’라고 합니다. 이런 수동형은 동사의 어간을 ‘--아레루’로 바꿔서 간단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정말 많이 사용합니다. 특히나 일반적인 언어에서 ‘놀러 오다’나, ‘울다’ 같은 자동사는 수동태가 불가능한 반면 일본어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예가 ‘말하다(이우)’의 수동형인 ‘이와레루’입니다. ‘말하다’의 수동형이라면 당연히 ‘말해지다’가 맞겠지만, 일본어에서는 ‘듣다’, 또는 ‘시켜지다’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청소를 하라고 시키셨다’가 아니라 ‘선생님께 청소를 하라고 들었다’ 또는 ‘선생님께 청소를 하라고 시켜졌다’ 이런 의미가 됩니다. 그나마도 말을 다 하지 않고 ‘청소하라고 들어서...,’ 이렇게 끝나는 게 보통입니다.

이런 수동태를 자주 사용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행동의 결과에서 내 책임을 빼겠다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놀러와진 것, 아이에게 울어진 것, 선생님께 들은 것까지만 말하지, 거기에 대한 나의 태도는 전혀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나의 책임을 빼는 것입니다. 사실 수동태를 너무 자주 사용하면 주체적이지 못하고 나약한 사람의 정체성이 몸에 뱁니다.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간사하다거나 아양을 떠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나’라는 주체와 책임이 사라진 문장들

이런 수동태가 좀 더 심해진 것이 사역형입니다. 사역형은 동사 어미를 ‘--아세루’로 변화시켜 만드는데 ‘--하게 시키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동사 자체가 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두 단어가 필요한 우리말이나, 사역동사를 써야하는 서양어하고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이렇게 ‘아세루’ 형을 사용해서 사역형을 만들면, 남이 시켰다는 정보만 남고 나의 의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가령 ‘노무(마시다)’를 ‘노마세루’라고 하면 ‘마시게 시키다’의 의미로, 일본 유행가에서 흔히 나오는 표현이 ‘노마세테’입니다. ‘술 마시게 해 주세요’라는 의미지만, 일본어 문장에는 술이라는 단어도 없고 말도 줄임말입니다(원래는 노마세테 구다사이). ‘노마세테’는 말 그대로 ‘마시게 해 주세요’라는 의미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술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해석을 해도 ‘술 마시게 해 주세요’인데,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술을 사달라는 의미인지, 술을 따라달라는 의미인지, 술동무가 돼달라는 의미인지, 취하고 싶으니 곱게 봐달라는 의미인지, 정말 수많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다테마에로 술을 마시고 싶다는 말을 살짝 하기는 하지만 술이라는 단어도 없고, 게다가 무슨 의미인지도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혼네를 철저하게 숨기는 거죠. 이 점에 대해 제가 일본인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자기들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정말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그럴듯하게 한국어로 직역을 하면 ‘한 잔 하게 해 주세요’ 정도가 되지만, 이렇게 말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거니와 이렇게 말하면 상대가 바로 얘기할 겁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이런 점에서 한국인들과 일본인들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여기서 좀 더 나가면, ‘노마세테’ 앞에 존칭 접두어 ‘오’를 붙여 극존칭인 ‘오노마세’를 만들고, 여기에 ‘받다’의 극존칭인 ‘이타다키마스’를 붙여 ‘오노마세 이타다키마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역하면 ‘마시게 해 주심을 (감사히) 받겠습니다’인데, 역시 술이라는 단어도 없고 내가 마신다는 표현도 없습니다. 그냥 상대에게 술을 마실 기회를 받아서 감사하다는 말을 돌리고 또 돌려서 하는 것 뿐입니다. 결국 상대가 나에게 (술을) 마시게 했다는 의미만 남게 됩니다. 이런 형태는 ‘오우타와세 이타다키마스(노래)’, ‘오하나사세 이타다키마스(말씀)’ 등등 아주 다양하게 응용할 수가 있습니다만, 결론적으로 말 속에 나의 의지와 책임은 사라지고 오로지 상대의 의지와 책임만 남게 됩니다.

일본어 속의 개인주의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 어머니를 이해해주세요’는 ‘하하오 와카떼 아게테 구다사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하하오(우리 어머니를) 와카떼(이해해) 아게테(드림을) 구다사이(나에게 해주세요)라는 의미입니다. 즉 어머니를 이해해드리는 것과, 그 행동을 나에게 해주는 것을 분리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로 옮기면 Please, understand my mother for me 정도가 되지만, 영어는 어머니와 나의 존재를 분리해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또 ‘제 딸을 보살펴주세요’라는 말도 일본어로는 ‘무스메오 미테 야떼 구다사이’라고 하는데, 무스메오(제 딸을) 미테(보살핌을) 야떼(해주다의 낮춤말) 구다사이(나에게 해주세요), 이런 의미입니다. 딸을 보살펴주는 것은 낮춤말로, 나에게 해주는 것은 높임말로 표현함으로써 딸과 나의 존재를 별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나에게 해주는 것에 대한 표현(구다사이)이 따로 있을 정도로 개인주의자들입니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개인주의는 가족도 엄격하게 분리해서 생각할 정도로 철저하고, 오랜 역사와 더불어 언어 속에도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거의 바꿀 수가 없는 문화입니다. 이런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한국인과 일본인이 친해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자유분방한 패선스타일의 일본 젊은이들.
길거리에서 만나는 자유분방한 패선스타일의 일본 젊은이들.

다름을 알면 더 잘보이는 일본인들

한국인들은 친해질수록 사이가 점점 좁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일본인들에게 친해진다는 의미는 서로의 거리를 정확하게 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 거리는 절대 넘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친해지는 표시로 자꾸 이물 없이 행동을 하면 일본인들은 불쾌함을 넘어서 일말의 공포를 느낍니다. 반면 한국인들은 아무리 친해져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에서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믿을 수 없고 신의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고, 반면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이 적정선을 모르는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의 문화는 철저하게 ‘기브 앤 테이크’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이건 마음이건 행동이건 무언가를 줄 때는, 상대도 똑같은 정도의 답례를 할 것으로 예상을 해야 합니다. 상대가 답례를 하지 못할 정도로 과도할 경우 엄청난 부담과 불쾌감을 유발합니다.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받았으면 비슷한 정도로 꼭 답례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일본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대해 공부를 하면 물론 도움이 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일본어 실력이 쌓이면서 일본인들에 대한 지식도 늘었습니다. 언어가 몸에 배면 확실히 그 사람들이 더 많이 보입니다.

글쓴이

김갑수 소설가

김갑수는 서울대 불어불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한 소설가이면서 언어 연구자다.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독일어, 이태리어, 아랍어, 러시아어, 터키어도 구사가 가능하다 그 외에 10개 정도의 외국어를 더 공부했고, 지금은 중국의 방언인 광둥어, 민난어, 하카어 공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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