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the’ 발음은 ‘더’가 아닐까
[김갑수의 외국어 사통오달] 음성학 알아가기...’ㄱ ㄷ ㅂ ㅈ의 장벽’ 음성학을 알면 정확한 발음 낼 수 있어 특히 유성음 ·무성음 차이 알면 더 잘 들려
일본인은 ‘the’를 ‘자’로 발음해?
일전에 인터넷에서 아주 흥미로운 자료를 보게 됐습니다. 한국인 남성과 일본인 여성 커플이 영어의 ‘the’ 발음에 관해 논쟁을 벌이는 모습이었는데, 우선은 한국 남성이 ‘더’라고 읽는 것을 들은 일본 여성이 “그게 뭐냐”고 묻습니다. 영어의 the라는 대답에 여성이 그게 무슨 the냐고 계속 묻자 남성이 이 여성에게 일본인들은 the를 ‘자(za)’로 읽지 않냐고 반박을 합니다. 그런 것은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여성의 황당한 표정.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요? 또 어느 발음이 맞을까요? 이 질문들에 대답을 하려면 음성학을 꼭 알아야 합니다. (이후의 일본어는 발음의 편의상 영어 알파벳으로 표기했습니다)
화제를 좀 바꿔 보겠습니다. 제 주변에서 저에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외국어가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대답은 끝없는 훈련과 연습뿐입니다. 외국어 하나를 프리토킹 하려면 하루에 최소 2시간씩 3년 이상의 공부가 필요합니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은 당연한 거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정확한 발음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발음을 잘못 배우면 아무리 공부를 해도 실력이 늘지 않고, 더욱이 듣기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정확한 발음으로 시작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것이 ‘음성학’입니다.
정확한 외국어를 구사하려면 이것부터
저는 대학 2학년 때인 1985년에 음성학을 처음으로 접했고 1년 간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 강의를 통해서 외국어 발음에 대한 저의 인식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물론, 이후의 외국어 공부에 정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들도 있고,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터득한 것들도 있고, 나이 40이 넘어서 새롭게 터득한 것들도 있고, 이렇게 음성학은 저의 외국어 공부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음성학 이론은 물론 엄청나게 방대합니다만, 우선은 외국어를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것들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우선은 조음점(調音點)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모든 언어의 발음들은 그 발음이 만들어지는 구강 내의 지점이 있는데 이것을 조음점이라고 합니다. 이 조음점을 정확히 안다는 것은 어떤 언어의 발음이건 정복할 수 있는 열쇠를 얻는 것인데, 다행히도 현대 언어학에서는 전 세계 모든 발음의 조음점에 대한 연구가 다 정리된 상태입니다. 일단 이 조음점에 맞게 발음을 연구해서 입에 배면 정확한 발음을 구사할 수가 있는 길이 열립니다.
두 번째로는 조음방식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조음점이 똑같아도 조음방식에 따라 다양한 발음의 분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의 ㄱ-ㅋ-ㄲ, ㄷ-ㅌ-ㄸ, 등은 조음점은 같지만 조음방식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b-p, d-t, g-k, z-s 등의 발음들 역시 조음점은 같지만 유성음-무성음으로 조음방식이 다릅니다. 이렇게 정확한 조음점과 조음방식을 찾아내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 알아야 하는 것이 의미 변별쌍(意味 辯別雙)입니다. 이는 의미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최소 ‘음소의 쌍’을 말합니다. 음소 하나만 달라도 다른 의미의 단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의미 변별쌍은 대립 변별쌍이라고도 하는데, 가령 영어나 일본어에서는 앞에서 말한 b-p, d-t, g-k, z-s가 유성음과 무성음의 대립으로 의미 변별쌍이지만, 우리말에서는 의미 변별쌍이 아닙니다.
또한 영어에서 b-v, p-f 역시 의미 변별쌍이지만 우리말이나 일본어에서는 의미 변별쌍이 아닙니다. 설측음인 l 사운드와 설전음인 r 사운드도 영어와 우리말, 북경어에서 의미 변별쌍이지만 일본어에서는 의미 변별쌍이 아닙니다. 이런 발음의 대립관계를 잘 알아서 발음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위에 언급한 조음점과 조음방식을 잘 몰라도 이 의미 변별쌍만 잘 구별하면 의사소통에 큰 지장은 없습니다.
저는 외국어 공부에 입문할 때는 항상 원어민이 녹음한 기본 자모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조음점과 조음방식, 그리고 의미 변별쌍을 모두 찾아내는 작업을 한 후에, 그 발음들이 입에 배게 연습을 합니다. 항간에는 언어가 다르면 성대나 구강 구조도 다르다는 인식이 많이 퍼져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현생 인류는 모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단일 종으로 성대와 구강구조가 모두 같습니다. 다만 12살이 넘으면 모국어의 발음 외에는 듣지도 따라하지도 못하도록 진화가 됐기 때문에 외국어 발음이 불가능한 장벽으로 보이는 것뿐입니다. 이 장벽은 정확한 음성학 이론을 통해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부산은 PUSAN인가 BUSAN인가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까 그 남녀의 논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이 우리말에서 ㄱ, ㄷ, ㅂ, ㅈ은 단어나 문장의 첫머리에서는 무성음인 k, t, p, tz로 발음되지만, 유성음 뒤로 가면 자동으로 유성음화 현상을 일으켜서 g, d, b, z로 발음됩니다(우리말의 ㅈ은 영어에 정확한 발음이 없어서 일단 tz와 z로 썼습니다). 이런 현상은 (제가 아는 언어 내에서는) 오직 한국어에서만 나타나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외국어를 배울 때나,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울 때 엄청난 문제를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발음하는 비어는 beer가 아니라 peer로 들리고, 디어는 tear로, 골드는 cold로, 제인은 chain으로 들리게 됩니다. 그러니 원어민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어를 공부할 때도 탁음(유성음)과 청음(무성음)을 구별해서 발음하지 않으면 일본인들은 거의 알아듣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어에서 ga는 나방, ka는 모기, do는 정도(程度), to는 문(門), 이런 식으로 한국인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의미 변별쌍이 무궁무진합니다.
이런 점에 한글의 독특한 창의성이 숨어 있습니다. 만일 음성학적인 발음만을 근거로 이 둘의 변별쌍을 다른 자음으로 만들었다면 자음이 더 많아지는 것은 물론, 무성음과 유성음이 변용돼서 나타나는 발음들은 상당한 표기의 혼란을 초래했을 겁니다. 가령 똑같은 ㄱ이라도 ‘구구’라는 단어에서 앞의 ㄱ은 무성음 k로, 뒤의 ㄱ은 유성음인 g로 발음되는데, 한국어에서는 같이 표기하는 것이 더 편리하다는 통찰력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다도, 부부, 조조 등과 같은 단어들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이런 현상 때문에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울 때 ‘왜 같은 문자를 써놓고 두 개의 발음이 있는가’라던가, ‘부산은 Pusan인가 Busan인가’ 등등의 질문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음성학적으로는 Pusan이 맞지만 앞에 유성음이 있으면 Busan으로 발음되기 때문입니다.
대신 한국어는 의미 변별쌍이 ㄱ-ㅋ-ㄲ, ㄷ-ㅌ-ㄸ, ㅂ-ㅍ-ㅃ, ㅈ-ㅊ-ㅉ로 나타나는데, 유성음과 무성음이 정확하게 구별되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이 차이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키-끼, 다-타-따, 배-패-빼, 자-차-짜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반면, 한국어를 처음 배우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의 귀에는 모두 ki-ki-ki, ta-ta-ta, pae-pae-pae, tza-tza-tza로 들려서 엄청난 혼란을 일으킵니다.
‘the’ 발음의 최종 승자는?
그렇다면 한국인은 단어의 첫머리에 오는 (이런) 유성음들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요?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 앞에 유성음을 살짝 넣어서 발음하면 됩니다. 한국어에서 유성음이란 모든 모음과 콧소리 자음인 ㄴ, ㄹ, ㅁ, ㅇ에 해당하니, 이런 발음들 중에 하나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ㄱ ㄷ ㅂ ㅈ을 발음하면 됩니다. 저 같은 경우엔 가장 간단한 ‘으’ 발음을 넣어서 해결을 하는데, 많은 일본어 교재들에서도 단어 첫머리의 탁음(유성음)을 내는 방법으로 ‘으’ 모음을 살짝 넣을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주 간단한 원리라고는 해도 처음부터 정확하게 몸에 배야 회화를 구사할 때 의미의 혼란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처음에 나왔던 커플의 논쟁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the의 발음은 / ðə/로서 흔히 말하듯 혀를 위아래 이 사이에 살짝 물고 유성음으로 내야 합니다. 그래서 어두의 유성음을 구별하는 일본인은 일본어 발음 중에 가장 비슷한 유성음인 ‘z’에 ‘a’ 모음을 붙여서 ‘za’로 발음하지만 ‘어’ 모음이 있는 한국인에게는 아주 이상하게 들립니다. 반면 한국인은 유성음 ‘ð’가 우리말 ‘ㄷ’으로 들려서 거기에 ‘어’를 붙여 ‘더’로 발음하지만, 일본인들 귀에는 ‘터’로 들려서 역시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커플의 이 간단한 논쟁 속에 이렇듯 복잡한 음성학의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그럼 논쟁의 승자는 누구일까요? 사실 두 사람 모두 정확한 발음에서는 많이 빗나갔지만, 일본인의 ‘za’가 그래도 좀 나은 편입니다. 한국인의 ‘더’는 실질적으로는 ‘터’로 들려서 계속 나올 경우 엄청난 의미의 혼란을 일으킵니다. 물론 독일인들처럼 ‘da’로 내면 큰 혼란은 없습니다. 이렇게 음성학을 잘 이해하는 것은 정확한 발음으로 의미의 혼란을 극복하는 열쇠가 됩니다. 다음에 더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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