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영 사랑할 가황 인생콘서트

올해 4월 인생 마지막 콘서트 개최 예고 “마이크 내려놓기까지 큰 용기 필요” 고교 2학년 때 마이크 잡고 첫 음반 취입 이후 파란만장한 가요계 ‘가황’ 인생 펼쳐져

콘서트중인 나훈아.
콘서트중인 나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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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황’으로 불리는 나훈아가 마지막 콘서트 계획을 발표하며 가요계 은퇴를 시사했다. 나훈아는 2월 27일 ‘고마웠습니다!’라는 제목의 편지에서 “마이크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렇게 용기가 필요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쉽고 간단한 말의 깊은 진리의 뜻을 저는 따르고자 한다”라고 적었다.

그는 편지 끝에 ‘마지막 콘서트를 준비하면서’라는 문구를 추가해 이번 공연이 그의 마지막 무대임을 밝혔다.

국민학생 때 접한 나훈아 노래

내가 ‘나훈아’ 노래를 처음 접한 건 시골에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담임선생님 제안으로 학급 노래자랑을 했다. 제대로 된 노래자랑이라기보다는 노래 좀 하는 몇 명을 뽑아 순번을 정해서 노래 실력을 겨루는 그런 자리였다. 입상자에 대한 상품은 연필세트, 크레파스, 공책 등 학용품이었다.

국민학교 저학년이던 1970년대 중반이었는데, 주로 이미자, 남진, 나훈아, 배호, 문주란, 조미미 등의 노래가 주요 레퍼토리였다. 동요를 부를 나이였지만 대부분의 친구들은 주로 유행가를 불렀다. 특히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가지마오’, ‘임 그리워’와 남진의 ‘님과 함께’, ‘그대여 변치마오’ 등은 당시 최고의 인기곡이었다.

그 무렵 나는 TV도, 전축도 몇 대 없는 시골에 살아서 이런 가수들의 노래를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읍내 친구들은 TV나 전축으로 유행가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학교에서 흥얼거리기도 하고 소풍 장기자랑 등에서 부르기도 했다.

지금은 이름도 가물가물한 읍내 고깃집 친구는 나훈아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기똥차게 불렀다. 그 당시 ‘미스터 트롯’이 있었다면 이 친구가 지금의 ‘트로트 신동’ 정동원처럼 성공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라이벌 남진 의식해 나이 올렸다?

나훈아(본명 최홍기)는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아버지 최영석과 어머니 홍성염 사이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공식 프로필상의 출생연도는 1947년이지만 실제 태어난 해는 1951년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어린 시절의 나훈아.
어린 시절의 나훈아.

나훈아는 부산 대동중 시절 야구선수를 했다. 당시 같이 선수생활을 했던 같은 학교의 18회 동기 유태중, 경남중의 허구연(현 KBO회장) 등이 모두 1951년생이다. 나훈아는 실제 음반 발매 초기엔 자신의 출생연도를 1951년생으로 기재했었다. 허구연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중학교 때 나훈아가 야구선수로 뛰었다. 포지션은 포수였다. 같은 학년으로 나는 경남중, 나훈아는 대동중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나훈아는 야구를 오래 하지는 않고 중도에 그만 뒀다. 당시 야구단 장기자랑을 할 때 노래를 정말 잘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과거 ‘연예인 나이는 고무줄 나이’라는 말이 있었다. 음반사 측에서 신인가수 나훈아의 나이를 네 살 높여 홍보했을 수도 있다. 한때 1946년생인 라이벌 남진을 의식해 나이를 올렸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나돌기도 했다.

남진 역시 과거 한 방송에서 “나훈아의 실제 출생연도는 1951년으로 알고 있다. 나보다 무려 다섯 살이나 적은데 ‘형’이나 ‘선배’라고 부르지 않아 서운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부산 소년, 가수의 꿈 안고 상경

나훈아의 아버지는 대형 무역선을 타고 유럽과 아프리카 등을 운항하는 마도로스였다. 나훈아가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으나, 알려진 것처럼 그리 어렵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목포 부잣집 아들인 남진과 비교하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 같다.

나훈아 집에는 아버지가 무역선을 타다 보니 당시로서는 귀한 ‘유성기’도 있었다. 그는 이 ‘유성기’를 통해 많은 노래를 접하면서 어릴 때부터 가수를 꿈꿨다. 국민학교 5학년과 6학년 때, 부산시 교육위원회에서 개최한 콩쿠르에서 두 번 연속으로 1등을 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초량국민학교와 대동중학교를 졸업한 나훈아는 가수의 꿈을 안고 상경해 서라벌예고에 진학한다. 당시 친형이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는 형과 함께 성북구 장위동에서 하숙을 했다.

고등학생인 나훈아에게 가수가 될 기회가 찾아온다. 나훈아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작곡가 심형섭이 학교 바로 옆 정릉에서 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훈아는 그 학원에 친구를 따라 놀러 다녔는데 거기서 가끔 노래를 했다. 작곡가 심형섭은 오아시스레코드사의 손진석 사장과 친분이 있었는데, 그에게 나훈아를 소개한다. 2002년 한 월간지 인터뷰에서 나훈아가 밝힌 데뷔 경위다.

“심 선생님이 손 사장에게 어린애가 하나 있는데 이게 아주 쥑인다, 물건이 될 것 같다 이랬다는 거요. 그러면서 ‘모른 척하고 한번 와서 보실랍니까?’ 이래 됐나 봅니다. 말하자면 선보러 오라한 거지요.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거기서 놀러 오라고 해서 갔어요. 갔더니, 그 분(심형섭)이 ‘노래 한번 해 볼래?’ 그래요. ‘어 좋지!’ 뭐 뺄 것도 없어서 노래를 몇 곡 불렀어요. 그러면서 뒤를 보니까 나이 먹은 분들이 두세 분 앉아 계시더라구요.

그때 내가 당시 유행하던 ‘라노비아’도 불렀어요. 그랬더니 손 사장님이 내 노래를 듣고 시쳇말로 그냥 뺑 돌아버린 겁니다. 생긴 것도 시커멓고, 눈썹도 시커먼 놈이, 아, 부르는데, 그기 아닌기라!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어느 날 손 사장님한테서 ‘취입 한번 안 해 보겠느냐’라는 얘기가 왔어요. ‘취입하자’ 해서 ‘그래 뭐 해 보지!’ 한 겁니다.”

여러 가수의 노래가 같이 들어가는 오아시스레코드 음반에 나훈아의 ‘천리길’ 한 곡을 끼워 넣은 것이다. 앨범 발매 후 ‘천리길’은 바로 히트했다. 이어지는 수많은 히트곡을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나훈아의 데뷔곡에 대해서도 논란이 좀 있다. ‘천리길’이 1966년 발표된 데뷔곡으로 알려졌으나, 음반의 실체가 확인된 적이 없다. ‘천리길’의 첫 버전은 1969년 5월 29일 오아시스레코드에서 제작한 컴필레이션 앨범에서 확인된다.

음반으로 확인되는 나훈아의 데뷔 연도는 1968년 8월 16일이다. 데뷔곡은 앨범의 타이틀곡인 ‘내 사랑’과 ‘약속했던 길’ 두 곡으로 봐야 한다. 모두 작곡가 심형섭의 작품이다.

‘남진’ vs ‘최훈’ 될 뻔

나훈아는 음반 취입을 앞두고 예명을 짓기로 한다. 아무래도 본명인 최홍기는 가수 활동을 하기에는 적합지 않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본명인 최홍기가 그냥 보통 사람 이름 같아서 최훈(崔勳)이라고 하려고 했죠. 그런데 최 씨가 영 예술하는 사람의 성 같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좀 기억하기 쉬운 성을 찾은 게 나(羅) 씨예요. 그다음에 훈(勳)자를 붙이니까 아(兒)자는 그냥 나오더라구요. 이름이 ‘훈’이라면 부를 때 ‘훈아’하고 부르잖아요. 그래서 나훈아가 된 겁니다. 한자로 써 놓고 보니까 기가 막혀요. 어린 아이(兒)가 훈장(勳)을 받는 것 같은 이름이잖아요.”

나훈아의 앨범 표지.
나훈아의 앨범 표지.

‘천리길’ 성공 이후 발매하는 노래마다 히트를 쳤다. ‘천리길’이 ‘표절’을 이유로 금지곡이 되면서 방송에 못나오게 되자, 손진석 사장은 미리 준비해두었던 회심의 2탄을 터뜨렸다. 지금도 트로트 경연 등에서 많이 불리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다. 가요계는 다시 한 번 요동쳤다. 더욱이 이 노래는 당시 유명한 사건이었던 이른바 ‘정인숙 사건’과 맞물려 개사곡으로 많이 불리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청와대 미스터 정이라고 말하겠어요

어느 날 누군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영원히 우리만 알았을 걸

죽고 보니 억울한 마음 한이 없소

모델과 배우 지망생이었던 정인숙은 당시 서울 시내 고급 요정에서 활동하던 접대부였다. 그녀는 1970년 교통사고를 가장한 총격으로 살해되었고, 지금도 미스터리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청와대 미스터 정’은 당시 국무총리이던 정일권을 가리킨다. 정인숙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당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은 세월이 많이 지난 후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소송 진행 중 정일권의 사망으로 무효화 되었다.

군대 복무중에 위문공연에 나선 나훈아.
군대 복무중에 위문공연에 나선 나훈아.

아들의 가수활동 반대한 아버지

‘사랑은 눈물의 씨앗’ 정도에서 그의 대박 퍼레이드가 멈추었다면, 오늘날의 나훈아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훈아발(發)’ 메가톤급 핵폭탄은 이후로도 연발로 터졌다. ‘임 그리워’와 ‘가지마오’가 그것이었다. 나훈아는 이렇듯 히트곡을 잇달아 터뜨리면서 단번에 톱 가수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발표하는 노래마다 빅 히트를 기록하자, 오아시스레코드 손진석 사장은 나훈아에게 ‘부산의 아버지에게 인사를 가자’고 했다. 쌀 한 가마를 지프차에 싣고 돈 50만 원을 봉투에 넣어 가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당시 50만 원은 지금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천만 원’ 쯤 된다.

나훈아와 손진석 사장은 부산 집에 들어가자마자 아버지에게 큰절을 했다. “무슨 일로 왔냐?”라며 아버지가 물었다. 손진석 사장은 “사실은 아드님이 인기가수가 돼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라며 50만 원이 든 봉투를 내밀었다. 쌀은 운전기사가 집 마당에 내려놨다. 그러나 아들의 가수 활동을 반대하던 나훈아의 아버지는 “돈 집어넣어라, 쌀도 도로 가져가라”라며 난리를 쳤다. 손 사장은 할 수 없이 돈과 쌀을 가지고 서울로 돌아갔다.

손 사장을 돌려보낸 나훈아의 아버지는 아들을 친구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켰다. 폐가 안 좋아 치료를 받자는 게 표면적 이유였지만, 사실은 아들이 서울 가서 가수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②에서 계속

글쓴이

이영훈 가요연구가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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