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을 노래하다...베델 우즈 박물관

[정연복과 손잡고, 세계의 미술관으로] 킹 목사 앞장선 ‘흑백 인종차별 폐지’ 운동 이어 반전운동, 기성세대 반발로 ‘히피문화’ 지미 핸드릭스 등 참여 축제 40만명 몰려 실제는 우드스탁 아닌 베델의 한 농장에서 기념하는 베델 우즈 박물관과 예술센터

1969년 8월 15일 베텔에서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한 젊은이들.
1969년 8월 15일 베텔에서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에 참가한 젊은이들.

“나는 꿈이 있습니다”

그 어느때보다 불안하고 심란한 세밑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해마다 한 해를 보내며 아쉬움과 새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희망을 꿈꾸지만, 작년만큼 힘든 시절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은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을 품도록 합니다. 오늘, 절망적인 시대에 저항하면서 희망을 꿈꾼 1960년대로 달려가보려고 합니다.

1963년 8월 28일. 미국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에는 약 25여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그날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로 유명한 연설이 있었던 날이었지요. 그는 1백여 년 전 링컨 대통령이 서명한 노예 해방 선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족쇄와 차별의 고통을 겪는 흑인들의 상황을 만천하에 알리고 저항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정의가 실현될 때까지는 절대 만족할 수 없음을,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진리가 실현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을 역설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흑인의 인권과 자유, 일자리를 요구하는 역사적인 대행진이 시작된 날입니다. 이 행진은 그 이듬해인 1964년,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됨으로써 ‘흑백 인종 분리법’이 존재하던 나라에서 공공장소, 고용, 투표권에서 인종차별이 금지되는 성과를 일궈냅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에는 약 25여 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D.C.의 링컨 기념관에는 약 25여 만명의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나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 당시 흑인은 버스나 식당에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앉거나 들어갈 수 없었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투표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했고요. 절망과 분노로 폭력적이고 비합법적인 방법에 호소하거나 한풀이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킹 목사는 저항과 투쟁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적의나 증오가 아니라 형제애와 희망에 토대를 둔 운동의 방향을 명확하게 합니다. 이 연설은 흑인인권운동사뿐만 아니라 저항의 시대인 1960년대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연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화를 추구한 히피 문화

1960년대는 흑인인권운동 뿐만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운동, 말콤 엑스와 마틴 루터 킹 암살 사건이 일어나면서 정부의 정책과 모든 기성 세대에 대한 반발에서 ‘히피문화’가 발달합니다. ‘히피’는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를 거부하고 안정과 도덕과 이성보다는 방랑과 자유와 감성을 중시합니다. 히피들은 평화와 자유를 추구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면서 알록달록하게 염색한 옷을 주로 입고 샌들을 신고 기성의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죠. 총 대신 꽃을 든 히피의 모습은 바로 전쟁과 대결의 시대에 맞서 평화와 사랑, 자연을 주장한 그들의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히피들은 샌들과 머리띠, 긴 머리, 타이 다이(Tie-Dye: 천을 묶거나 접어서 염료가 특정 패턴으로 스며들게 하는 염색 기법으로, 1960년대 히피문화의 상징이었다) 기법의 염색 의상으로 그들의 자유와 평화, 자연을 사랑하는 정신을 표현했다.
히피들은 샌들과 머리띠, 긴 머리, 타이 다이(Tie-Dye: 천을 묶거나 접어서 염료가 특정 패턴으로 스며들게 하는 염색 기법으로, 1960년대 히피문화의 상징이었다) 기법의 염색 의상으로 그들의 자유와 평화, 자연을 사랑하는 정신을 표현했다.

이들의 정서는 밥 딜런, 제퍼슨 에어플레인, 제니스 조플린, 지미 핸드릭스와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으로 나타났는데요. 이들을 중심으로 1969년 열린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모든 과정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곳을 다녀왔습니다. 바로 미국 뉴욕 주의 베델에 있는 “베델 우즈 박물관”입니다. 1960년대 저항정신의 상징이자 성공적인 문화축제의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곳으로 함께 가보겠습니다.

우드스탁이 아닌 베델?

베델은 뉴욕 주에 위치한 인구 4,000 명 정도의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게다가 ‘우드스탁’이라는 마을과는 직선거리로 70㎞정도 떨어져 있는데요. 왜 박물관이 우드스탁에 있지 않고 베델에 있을까요? 박물관은 드넓은 평지 한 가운데에 있어 뜬금없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겉으로 보이는 외관으로는 이 곳이 우드스탁 록 페스티벌과 무슨 상관이 있나 추측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박물관은 텍스트로 이루어진 설명과 사진, 영상자료, 사이키델릭한 자동차 등을 활용한 디스플레이로 시대적 배경과 페스티벌 뒷 이야기를 재미있게 펼쳐주었습니다.

베델 우즈 박물관 건물은 유목민들의 천막 숙소나 군대 병영처럼 생겼다. 사진=정연복
베델 우즈 박물관 건물은 유목민들의 천막 숙소나 군대 병영처럼 생겼다. 사진=정연복

1969년 2월, 아티 콘필드, 존 로버츠, 조엘 로슨맨, 마이클 랭, 이 네 사람이 음악 페스티벌을 열기로 기획합니다. 정식 명칭은 ‘우드스탁 뮤직 앤 아트 페어(Woodstock Music ans Art Fair). 지미 핸드릭스, 더 후, 제퍼슨 에어플레인, 산타나, 존 바에즈 등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을 초청해 사흘 밤낮을 공연한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이었습니다. 장소는 뉴욕주의 우드스탁. 밥 딜런을 비롯한 뮤지션들이 살고 있던 우드스탁이 록 페스티벌이 개최될 최적의 장소라고 생각한 거죠. 무엇보다 주최 측은 ‘우드스탁’이라는 마을 이름이 ‘시골’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평화와 음악의 사흘(3 Days of Peace & Music)’을 내세운 페스티벌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 예상한 관객수는 15만명 정도. 그러나 우드스탁에서는 이렇게 많은 관중을 수용할 만한 장소를 찾지 못해 행사진행 여부가 불투명해집니다. 이때 두 번째로 거론되는 도시가 월킬이었는데요.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던 7월 15일, 주민들의 반대로 행사 허가가 취소됩니다. 페스티벌은 8월 15일부터 사흘간 진행되기로 예정되었는데 한 달 정도 남은 상태에서 난감한 상황에 처한 거죠.

우드스탁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은 여러 공간에서 1969년 당시 상황과 공연을 볼 수 있다. 바닥에 보이는 기호는 영국의 반핵 평화 단체인 CND의 소속 디자이너 제럴드 홀톰이 만든 평화를 나타내는 기호이다. 1960년대 히피와 베트남 반전 운동을 중심으로 전파되어 오늘날까지도 평화의 상징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사진=정연복
우드스탁 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은 여러 공간에서 1969년 당시 상황과 공연을 볼 수 있다. 바닥에 보이는 기호는 영국의 반핵 평화 단체인 CND의 소속 디자이너 제럴드 홀톰이 만든 평화를 나타내는 기호이다. 1960년대 히피와 베트남 반전 운동을 중심으로 전파되어 오늘날까지도 평화의 상징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사진=정연복

40만명 이상이 운집한 문화 축제

이때 베델의 농장주 맥스 야스거가 자신의 농장을 공연장소로 제안하면서 극적으로 공연이 성사됩니다. 행사는 베델에서 진행되지만 ‘우드스탁’이라는 이름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앞에서 말한 이유 이외에도 오래 전부터 홍보를 해온 터라 공연을 한 달 앞두고 이름을 바꾸기는 곤란했던 거죠. 결과적으로 베델은 페스티벌이 개최된 장소로 기억되지 못한 채 우드스탁은 영원히 이름을 남기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베델은 박물관과 넓은 평원만 펼쳐진 다소 외진 느낌이라면 우드스탁은 서점과 카페, 선물 가게들이 성업을 하면서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예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우드스탁은 우드스탁 페스티벌과 관련이 없는 도시이면서도 최대의 수혜자가 된 셈입니다.

조용한 시골 마을 베델에 40여만 명의 군중이 몰린 우드스탁 페스티벌.
조용한 시골 마을 베델에 40여만 명의 군중이 몰린 우드스탁 페스티벌.

공연은 예상했던 15만 명이 아니라 40여만 명의 인파가 몰렸고 하루를 더 연장해서 나흘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갑자기 밀려드는 관중이 울타리를 넘어 난입하는 바람에 주최측은 무료 콘서트를 표방하게 되었고 뮤지션들에게 지급해야 할 출연료가 워낙 비싸 공연 자체는 130만 달러라는 적자가 났습니다. 그러나 이후 영상물 제작 등으로 엄청난 수익이 났을 뿐만 아니라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공적인 음악 페스티벌로 회자될 정도로 1960년대의 시대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한 번 열린 단발성 축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문화적, 사회적 의의를 남겼습니다. 지저분하고 반사회적이고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받던 히피들이 표방했던 반전과 평화, 자유, 평등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렸고 잘 기획된 축제는 참가자들을 하나로 모으면서 강렬한 예술적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드스탁 페스티벌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문화의 무한 가능성 보여주는 공간

베델에는 베델 우즈 박물관뿐 아니라 베델 예술 센터가 있어 다양한 행사들이 기획되고 있습니다. 1천 에이커에 달하는 넓은 땅에 1만 6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연장과 스튜디오, 캠핑장을 갖추고 있습니다. 베델 예술 센터 사이트에 따르면 명상, 진흙공예, 콘서트, 코바늘뜨기, 요가, 사운드 힐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벤트들이 연중 진행됩니다. 박물관이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정신과 의의를 전시하고 보존한다면, 예술센터는 다양한 문화기획과 예술 교육을 통해 지역사회와 소통하면서 문화의 힘을 강화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던 베델은 우드스탁 페스티벌 개최를 통해 삶을 바꾸고 삶에 저항하는 문화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계속 성장하고 있는 겁니다.

베델 아트 센터의 공연장
베델 아트 센터의 공연장

박물관에 들어가기 전에는 다소 뜬금없어 보였던 넓은 평원은 바로 뮤지션들이 노래하고 40여 만명의 관중이 환호했던 바로 그 공간이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서며 평원을 바라보니 지미 핸드릭스가 기타로 연주한 미국 국가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마치 그 현장에 있던 관중처럼 심장이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고요. 먼 이국땅 베델에서 소망해 봅니다. 우리 모두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노래하기를! 우리의 희망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기를!

글쓴이

정연복 미술평론가

정연복 미술평론가는 서울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현재 중앙대에서 예술사 강의를 한다. 사조의 이해나 단순지식보다는 직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이해에 관심이 많다. 삶에서 예술이 나오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림과 미술관에 관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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