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은행 독립 지키는 파월의 소신에 박수를
[‘금융감독의 산증인’ 조영제 칼럼] 지키기 어려운 ‘중앙은행 독립성’ 온몸으로 저항하는 파월 연준의장 금융감독 개편 앞둔 한국에 교훈은? 조직 독립성 지키되, 유연성 살려야
세계 첫 중앙은행의 탄생
1688년, 네덜란드 국가원수로 있다가 영국 의회의 요청으로 군대를 끌고 와 장인인 제임스 2세를 몰아내고 영국 왕이 된 윌리엄 3세는 1690년 비치헤드 해전에서 프랑스에 패하자 해군력 증강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를 위해 국채를 발행하여 100만 파운드를 조달하려 했으나 실패하자, 일부 상인들이 은행을 설립해 모은 120만 파운드의 자본금으로 국채를 매입해서 전비를 지원했다. 1694년,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은 이렇게 탄생했다.
국왕은 그 대가로 영란은행에 국채를 담보로 지폐를 찍어 대출할 특권을 주었다. 그러자 영란은행은 인수한 국채에서 발생하는 이자와 지폐를 찍어 민간에 대출하고 받는 이자를 양쪽에서 챙기며 엄청난 수익과 영향력을 누렸다. 국왕이 부여한 특권 때문에 다른 은행들도 영란은행에서 돈을 빌려 유통시키며 거대한 은행 네트워크가 형성되었고 인수한 국채들이 유통되면서 채권시장도 두텁게 발달했다. 이를 통해 왕실은 안정적으로 전비를 조달하게 되어 인구가 3배나 많고 재정도 2배로 컸던 프랑스와 전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배경에는 영란은행이 갖는 독립성과 국민들의 신뢰가 큰 역할을 했다. 영란은행은 왕실의 요청이라도 원칙에 어긋나면 단호히 거부했다. 실례로 영국이 10여년에 걸쳐 프랑스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을 치른 후 불어난 정부 빚을 영란은행에 넘기려다 거절당하자 남미무역을 독점할 남해회사를 세워 국채를 주식으로 바꿔주도록 했는데, 그 회사 주식이 헛소문을 타고 6개월만에 9배 가까이 부풀어 오르다가 붕괴되어 많은 국민이 피해를 입었다. 이때 영란은행은 정부 요청을 거절한 덕에 은행시스템 전반에 대한 신뢰를 지킬 수 있었다.
흔들리는 ‘정부로부터의 독립’
지금 미국에선 트럼프 대통령과 행정부, 정치권 인사들이 제롬 파월(Jerome Powell) 연준(FRB) 의장에 가하는 간섭과 압박이 도를 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파월 의장을 향해 기준금리 인하를 요구했지만 듣지 않자, 그를 “멍청이”라고 부르며 해임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러다가 여의치 않자 발을 뺀 후, 이번에는 총 25억 달러에 달하는 연준 건물 개보수 비용의 ‘과다 지출’ 문제를 거론하며 책임을 따지겠다고 파월을 압박하고 나섰다.
그런가 하면 스콧 베센트(Scott Bessent) 재무장관은 파월 의장의 임기가 내년 5월까지 한참 남았음에도 미리 후임자를 정해 그림자 의장(shadow chairman)을 세우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그럴 경우 시장에서는 내정된 후임 의장의 발언에 무게가 더 실려 파월 의장의 영향력이 약화될 것으로 기대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압박도 먹히지 않자, 이번에는 베센트 장관이 “연준이 그동안 기능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왔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중앙은행체제 자체를 흔들고 나섰다. 전방위로 가해지는 압박이 점점 거세지고 거칠어지는 모양새다.
그러나 파월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 건물 리모델링 현장을 찾아가 연준이 곧 기준금리를 내릴 것으로 믿는다며 희망의 시그널을 보냈으나, 지난 7월 30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 회의에서 물가상승률이 아직 높고 트럼프의 관세정책이 물가에 부담을 준다며 또다시 기준금리를 동결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5회 연속 금리동결이다.
데이터와 원칙에 입각한 금융당국을
지금까지 미국 역사상 대통령이 연준 의장을 해임한 사례는 없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토머스 매케이브 의장이 해리 트루먼 행정부의 압박으로 사퇴한 사례가 있었지만 해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파월 의장을 해임하려 한다면 변호사인 파월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소송을 제기하여 가처분 신청을 통해 내년 5월까지 임기를 채울 수도 있다. 더욱이 내년 5월 의장직에서 물러나더라도 이사 임기는 2028년 1월까지 남아 있어 여전히 FOMC의 금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미국에서도 이처럼 중앙은행 독립성이 강하게 유지되고 있다. 종종 행정부와 마찰을 빚기도 하지만, 전문가 집단인 연준 이사들이 정부나 정치권의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으로 통화정책을 운용해 온 덕택에 2차 세계대전 이후 80년간 달러 패권을 유지하며 ‘세계의 중앙은행’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폴 볼커, 앨런 그린스펀, 벤 버냉키 등은 모두 정치적 압박을 견뎌내며 데이터와 원칙에 입각한 통화정책으로 신뢰를 쌓았던 인물들이다.

독립되어 있되 유연해야... 전문성 갖춰야
이런 배경에는 미국의 정치·경제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 연준의 법적·제도적 지위, 시장의 신뢰가 자리잡고 있다. 연준 의장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임기는 대통령과 다르고, 의회의 영향력도 제한적이며, 사법부도 연준의 독립성을 지지하고 있다. 앞으로 트럼프 행정부와 파월 의장 간의 샅바싸움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볼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 중앙은행의 앞날과 금융감독기구 개편에도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은 물가 안정과 경제 성장, 글로벌 신인도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한국은행법 개정으로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확보되었고 금융통화위원회의 권한이 명확해져 정부에 대한 견제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제도적 독립성과 운용의 유연성 사이에 늘 간극이 존재했다. 정부의 경제정책과 한은의 통화정책이 충돌하였을 때 한은의 독립성은 늘 주목을 받았다.
독립성의 의미는 각국의 역사와 경제구조, 정치적 맥락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독립성을 명분으로 시장과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유연성을 핑계로 정부에 휘둘리는 것도 모두 경계해야 한다. 독립성이 확보된 중앙은행은 오직 데이터와 전문성과 자신감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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