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극우에 맞서 ‘사회적 연대’ 만들자

[경북대 민교협 시사칼럼] 보수주의, 변화 반대하는 개념 아냐 ‘천천히 우아하게 양보하는 과정’ 한국 보수, 이념없이 세력으로만 존재 극우도 20%수준, 갈수록 증가 추세 극우현상에 맞서 민주적 실천 나설 때

윤석열 전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에 항의해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하고 있는 극우 세력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 전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에 항의해 서울서부지법에 난입하고 있는 극우 세력들. 사진=연합뉴스
  • 2025년 2월부터 <더 칼럼니스트>와 <경북대 민주화교수협의회>는 공동 기획으로 다층적 차원에서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연재를 시작합니다. 정치학·사회학·언론학·문학·경제학·교육학·공학을 전공하는 다양한 연구자들이 참여하여 지역의 시선에서 우리 사회의 쟁점에 대한 진단을 제시하고 민주주의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서 시도하고자 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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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와 극우

일반적으로 보수주의는 급격한 변화에 반대하면서, ‘질서 잡힌 사회(well-ordered society)’를 추구하는 이념이다. 그렇다고 보수주의가 사회의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꽉 막힌 이념은 아니다. 오히려 변화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전제한다. 다만 ‘불확실한 이성과 설익은 열정’에 의해서 가속되는 사회적 실험이 기존 질서와 제도에 미치게 될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축적된 지혜의 보고인 ‘전통’을 바탕으로 현실의 변화를 선별적이지만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실제로 근대 보수주의의 시조라고 평가받는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변화 없는 상태는 보수의 수단이 되지 않음’을 명시했다. 즉 보수주의는 ‘변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저지하고자 하는 이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보수주의는 기성 체제에 대한 다양한 도전이 야기한 사회적 변화 중에서, 어떤 것은 ‘내키지 않지만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면서 결국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그러면서 ‘무한한 조심성’으로 변화를 조정하고 가능한 범위에서 변화의 속도를 저지하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보수주의의 역사는 ‘가능한 천천히, 가능한 우아하게 양보하는 과정’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신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인 마가렛 대처 전 영국총리(왼쪽)과 로널드 레이건 전 미대통령.
신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인 마가렛 대처 전 영국총리(왼쪽)과 로널드 레이건 전 미대통령.

이처럼 보수주의는 무조건적 복고(復古) 혹은 거부와 같은 퇴행의 이미지보다는, 좀 더 실용적이고 절충적인 관점에서 현실의 변화에 대한 선별적인 수용을 모색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나 ‘법고창신’(法古創新; 기초는 옛것에서 배우되, 그 위에 새로움을 더하라는 뜻)에 보다 부합하는 이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하기에 정치 이념적 스펙트럼에서 보수주의는 ‘현상(現象, status quo)’보다 왼쪽에 위치하며, 따라서 이것은 현상보다는 진보적인 지향의 이념이다. 이것은 극우주의가 정치 이념의 스펙트럼 중에서 유일하게 현상보다 오른쪽에 위치하여, 정치 이념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로의 퇴행’으로 향하는 이념인 것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념이다.

보수주의와 마찬가지로, 극우주의도 사회적 변화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견지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극우주의의 단절적인 관점은 보수주의의 포용적인 성향과는 질적으로 상이하다. 기본적으로 이것은 ‘변화에 맞서서 옛것(舊)을 지킨다(守)’는 의미의 수구(守舊), 혹은 ‘정상적인 역사의 흐름(動)을 거꾸로 돌리려는(反) 의지’로 해석할 수 있는 ‘반동’(反動)과 그 의미가 호환되는 이념이다.

이처럼 변화에 대한 저항을 명시적으로 전제하는 극우주의는 문명의 근대적인 특징들을 거부하는 과거지향적이고 비합리적인 속성을 내재하고 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성과 과학의 성과를 불신하는 경향을 보인다. 동시에 진리는 탁월한 소수의 전유물이라고 인식하면서, 대중은 그러한 소수에게 복종해야 하는 피동적인 존재로 규정된다. 극우주의의 이러한 경향은 어렵지 않게 외부와 타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 그리고 인종주의와 전체주의 등과 연결된다.

이러한 속성의 극우주의는 ‘인종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와 ‘반세계화와 주권 우선주의’, 그리고 ‘강력한 권위주의’ 등을 특징으로 하는 현재의 극우주의 흐름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래서일까? 오늘날의 극우 세력 역시 객관적 논증보다는 음모론과 가짜뉴스와 같은 주관적 진리에 쉽게 반응하는 성향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민주적 상호 소통보다는 엘리트와 민중으로 갈라진 세상에서, 민중의 의지를 체현한 권위적 지도자를 추종하는 포퓰리즘적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

한국 대표적 보수정치인인 이승만 전대통령과 박정희 전대통령.
한국 대표적 보수정치인인 이승만 전대통령과 박정희 전대통령.

한국의 허약한 보수

한국의 보수는 서구의 철학적 보수주의와는 상당히 다른 논리와 경로로 전개되었다. 우리 사회의 근대적 보수는 역사적으로 식민지 체제의 잔재와 냉전 반공주의, 군사독재, 성장지상주의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해방 후 친일 관료와 군부 중심으로 구성된 정치 엘리트 집단은 자신들의 대내외적 명분을 위하여 보수라는 명칭을 차용했지만, 실상은 반공 이데올로기와 권위주의로 무장한 일종의 ‘내전(內戰)형 개발파시즘’에 가까웠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는 ‘보수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보수성이 강한 사회’로 변모했다. 결국 이것은 ‘보수 세력은 존재하지만, 보수 이념은 부재한 역설’ 속에서, ‘보수주의 없는 보수 독점적 정치구조’의 권력화·제도화로 귀결되었다.

6월항쟁 등의 다양한 위기 속에서도, 이러한 한국적 보수의 보수주의적이지 않은 속성은 일정하게 유지되었으며, 이것은 2016~17년의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등장한 ‘태극기집회’를 통해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애국 보수’라고 천명한 태극기집회의 주장과 행동은 전형적인 극우적 정치 행위와 유사했다. 그들은 근거가 빈약한 ‘체제 위기’ 담론을 절박하게 내세우면서, 정치적·제도적으로 이미 부당하다고 결론이 난 대통령의 행위를 옹호하며 퇴행적 질서의 회복을 주장했다. 여기서 이들이 내세운 “계엄령이 답이다!”, “군대여 일어나라!” 등의 구호는 보수주의의 핵심 가치인 법치주의조차 부정하는 그야말로 반민주적인 주장이었다. 어쩌면 윤석열 탄핵 국면에서 발생한 서울서부지방법원에 대한 폭력행위는 2016~17년의 극우적인 확장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례일 수 있겠다.

사실 한국의 보수가 스스로 성찰과 전환을 모색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초반의 소위 ‘뉴라이트(New Right) 운동’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것의 대의명분은 충분히 주목할 만했다. 뉴라이트는 ‘올드 라이트’의 상징적 이념인 반공주의를 구시대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좀 더 다양한 이념 체계에 기초한 우파의 현대적 재구성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초라했다. 보수개신교 세력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뉴라이트는 오히려 전통적 반공주의와 역사 수정주의를 신자유주의 경제관과 결합하면서, 점차 보다 극우적인 세력이 주도하는 이념 집단이자 정치운동 단체로 성장해 갔다. 그렇게 한국 보수를 좀 더 오른쪽으로 견인한 뉴라이트는 현재 조직의 대부분이 해체되었지만, 그 세력의 일부는 최근 윤석열 정부의 요직에서 활동했다. 또한 그 그림자는 국가인권위원회와 과거사정리위원회 등에서 윤석열 탄핵 이후에도 깊게 드리우고 있다.

오늘의 극우

12·3 계엄 사태는 그간 보수라는 이름으로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 온 극우의 정체성에 가까운 이념·조직·문화·세대적으로 다양한 세력들을 하나의 일정한 흐름으로 결집시켰다. 이를 통하여, 극우의 가시성은 상당히 높아지게 되었다. ‘정명론’(正名論)을 고려하면, 과연 이들을 어떻게 호명해야 옳을까?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자신의 정치적 정체성을 극우라고 응답하는 비율은 5~9% 수준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나타난 다양한 ‘극우 스펙터클’의 규모에 비하면, 이것은 다소 낮은 수치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객관적 지표(가치 정향과 주요 정책 이슈에 대한 선호)를 기준으로 한 조사에서는 극우의 비율은 이미 20% 수준에 달하고 있다. 여하튼 이들은 대체로 윤석열의 탄핵에 반대하며, 헌법재판소의 탄핵 결정에 불복하는 입장을 고수한다. 또한 12·3 비상계엄은 합헌이며,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은 정당한 의사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한편으로는 5·16 군사쿠데타를 옹호하는 반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시민군의 무장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최근 선거에서 중국의 선거관리위원회 개입설에 대해서 이들 다수는 적극 동의한다. 또한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고 있으며,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회의한다.

그래도 다행이랄까? ‘극우 포퓰리즘의 세계적 확산’이라는 극우주의의 ‘네 번째 물결’과 비교할 때, 한국은 ‘아직’이다. 사실 우리 사회는 그것이 극단 우익(extreme right,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전적으로 반민주적인 세력)이든 급진 우익(radical right, 민주주의의 형식은 유지하되, 평등과 소수자 권리, 법치 등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인 가치를 훼손하는 세력)이든 극우의 성장에 녹록하지 않은 다양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약한 비례성의 선거제도와 지역주의적 투표행태, 강력한 양당 기반의 다당제, 반북·반공주의와 인종·민족적 동질성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다소 더딜 수는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극우라고 불릴 만한 집단은 오래된 반공주의와 무조건적 친미주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안티-페미니즘을 기반으로, 민주주의의 기반을 잠식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그들의 성장은 맞은 편의 진보가 후퇴하는 속도를 멀찍이 앞서가고 있다. 한편으로는 주류 제도권의 보수 정치와 바깥쪽 극우 정치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결국 극우 정치의 영역이 확장되는 소위 ‘무증상 파시즘’의 상황도 다양하게 목격되고 있다. 국민의힘 당대표 경선에서 여론조사 1~2위를 차지하고 있는 유력 후보가 명성이 자자한 극우 인사의 유튜브 방송에 출현해서 내란 혐의로 조사받고 있는 탄핵당한 대통령을 옹호하고, 같은 당의 또 다른 중진의원은 “탄핵 반대가 잘못된 건가요? 저는 지금도 반대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는 평소의 소신을 발언하는 풍경이 그러하다.

이제 우리는 대내외적으로 확산되는 극우적 현상에 맞서서, 보다 민주적이고 보다 인간적인 사회를 위한 과제를 실천할 시점에 다다른 것 같다. “프랑스는 우리 땅이다.”, “이슬람은 독일의 일부가 아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서구의 극우 권력층의 주장이 우리 사회에서도 제도화된 권력으로 성장하기 전에, 그리고 ‘정치화된 소수자 혐오’가 더 이상 뿌리를 내리기 전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혐오와 배제에 반대하는 튼튼한 시민적 연대를 형성하는 것, 말하자면 그런 거 말이다.

글쓴이

채장수경북대 정치외교학 교수

채장수 교수는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직하고 있으며, 정치이론 관련 교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관심 분야는 민주주의와 정치사회, 사회갈등, 지역정치 등이다. 주요 논저로 『탈냉전과 진보적 민주주의론』, 「정치 이념적 스펙트럼과 공공성: ‘사분 모델’의 모색」, 「‘2‧28정신’의 보수주의적 의미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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