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가 프랑스 언론에 남긴 ‘유산’

[비시 체제 : 협력과 부역의 일대기] 과거를 딛고 선 프랑스 언론⑤ 나치와 비시체제에 저항한 지하언론의 활약 레지스탕스 분파의 단결을 이끌어낸 역할 지금도 ‘바람직한 언론’ 포기않는 프랑스人들

나치 부역자를 체포한 레지스탕스.
나치 부역자를 체포한 레지스탕스.

프랑스의 비시 체제는 어떤 면에서 나치 독일과 비슷한 방법으로 국가를 유지했다. ‘대규모 선전’이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처한 패배의 고통을 위대한 원수, 필리프 페탱(Philippe Pétain)이 국민들과 함께 해결하고 있다는 내용이 프로파간다의 핵심이었다(물론 그 ‘국민’엔 유대인을 비롯한 외국인, 소수자들은 없었다). 여기엔 나치 독일과의 협력(La Collaboration)이 영국과 소련의 위협에 맞선 선택이라는 주장 또한 섞여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적지 않은 프랑스의 기성 언론들이 이를 그대로 전달했다. 부역에 힘을 보탠 셈이다. 비시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대안이 필요하다고 본 건 이런 이유에서다. 레지스탕스의 당위성은 정부가 내세운 논리를 깨고 사람들에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데서 출발해야 했지만, 과거의 언론으론 미래를 보장할 수 없었다.

결국 이는 정부, 가톨릭, 군부와의 결탁에서 벗어나 정론을 추구하는 언론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심어줬고,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프랑스 언론의 ‘모범’은 여기서 출발했다.

비시 체제의 프로파간다

앞선 글에서도 살폈듯이 비시 체제는 프랑스 대혁명(1789년)이 내세운 자유와 평등, 박애(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공화국 프랑스를 철저히 무너뜨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페탱과 그의 추종자들은 노동(Travail), 가족(Famille), 조국(Patrie)을 중심에 둔 프랑스 국가(L’État français)를 탄생시켰으며 국민 혁명 이념을 정립해 순수한 혈통을 지닌 프랑스인들에 의한 나라를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비시 체제는 더 나아가 덩케르크(Dunkirk)에서 철수한 영국과 유대 볼셰비즘(Jewish Bolshevism)으로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는 소련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겨, 나치 독일과의 협력에 대한 정당성을 얻고자 했다. 여기서 말하는 유대 볼셰비즘이란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의 일종으로 러시아 혁명(1917년)과 소련 수립과 같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서구를 무너뜨리려는 유대인 국제세력에 의해 계획, 주도되었다는 주장이다.

지금 우리가 봤을 땐 객관적 근거조차 없는 가정에 지나지 않지만 1930년대 반유대주의자들과 공산주의를 철저히 혐오했던 극우 세력들에겐 ‘사실’이었다. “히틀러에 패한 프랑스가 왜 굳이 연합국에서 이탈해 나치 독일과 손을 잡았는가?”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이처럼 프랑스 내부에 가톨릭, 군부, 자본가, 또 극우 활동가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유대 볼셰비즘과 소련에 대한 공포에 주목해야 한다. 즉 ‘나라가 망해도, 공산주의자들보다는 그래도 나치가 낫다’는 생각인 것이다.

이를 알리기 위해 포스터, 브로슈어를 배포하는 일에서 나아가 비시 체제가 심혈을 기울인 프로젝트가 더 있었다. ‘페탱의 우상화’다. “당신은 그보다 더 프랑스인이라 할 수 있는가(Êtes-vous plus Français que lui)?”라는 문구에 비시 체제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담겼다. 여기서 말하는 ‘그’는 당연히 페탱이다.

페탱이 1차대전 때 베르됭에서 나라를 구했고 나치 독일과의 관계에선 어려움을 견디며 프랑스 사람들을 지켰다는 국가주의자, 극우주의자들의 관념이 핵심 이념으로 자리한 것이다. 위 문장이 담긴 포스터와 함께 전국적으로 페탱의 흉상이 곳곳에 설치됐다. 조국 프랑스를 대리하는 원수(元帥) 페탱의 모습은 비시 체제 당시 만들어진 선전가 <원수님!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Maréchal nous voilà)!>의 가사에서도 드러난다.

원수님!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희망을 돌려줬습니다.

조국은 다시 태어날지니,

원수님! 원수님!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Maréchal, nous voilà!

Tu nous as redonné l’espérance.

La patrie renaîtra.

Maréchal, Maréchal, nous voilà!

이 모든 게 진정한 언론인들이 승부해야 할 적(敵)이었다.

1940년 6월 18일 : 레지스탕스의 시작

프랑스 국민 대부분이 숨죽이고 체념하고 일상에 매몰되어 있을 때 목숨을 걸고 저항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한 의미에서 2차대전 종전(終戰) 이후 프랑스에서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레지스탕스’가 큰 역할을 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주- 이용우(2012), 레지스탕스의 탄생 : ‘인류박물관’ 조직과 ‘북부해방’을 중심으로, 프랑스사 연구 제27호, p.154)

모든 프랑스 국민들이 나치 독일과 비시 체제에 저항했다. 이것은 거짓이다. 독일점령기(L’Occupation) 당시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를 중심으로 프랑스 사람들이 단결하여 나치 독일과 비시 체제에 맞서 싸웠다는 건 충분히 반박할 수 있는 역사적 신화라는 게 지금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레지스탕스가 오늘날 프랑스, 또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언론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패전과 협력의 상처에서 나라를 다시 세울 때 레지스탕스 활동은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데 이바지했으며 언론인들에게는 정부, 가톨릭, 그리고 군부의 검열이나 협박에 굴하지 않고 신랄한 비판과 정직한 사실의 전달이라는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의 ‘처음’은 1940년 6월 18일 드골(Charles de Gaulle) 장군이 영국 BBC에서 프랑스 국민들에게 한 호소(L’Appel)라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날, 그러니까 1940년 6월 17일에 페탱이 “산산이 부서지는 마음으로...(중략) 전투를 중단할 것을 선언합니다.”라고 발표한 것을 되받아, 프랑스는 전투에서 졌지만 이는 순전히 군사적인 패배에 그칠 뿐이며 프랑스는 절대 혼자가 아니라 외친다(주- Jean-François Muracciole, Histoire de la Résistance de la France, PUF/Humensis(2020), p.12).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영웅’ 장 물랭. 그는 나치에게 고문을 받다가 고통에 못이겨 자살을 시대했지만 실패했다. 그때 목에 생긴 상처를 감추기 위해 항상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영웅’ 장 물랭. 그는 나치에게 고문을 받다가 고통에 못이겨 자살을 시대했지만 실패했다. 그때 목에 생긴 상처를 감추기 위해 항상 스카프를 두르고 다녔다.

물론 많은 프랑스 국민들이 이 방송을 들은 건 아니었다. 역사학자 올리비에 비비오르카(Olivier Wieviorka)에 따르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39년 기준으로 프랑스의 라디오 수신기는 영국은 물론 독일보다 훨씬 적었다(주-Olivier Wieviorka, Histoire de la résistance : 1940 – 1945, Perran(2018), p.24). 이는 드골의 방송을 들은 사람보다 듣지 않은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는 얘기다. 더욱이 나중에 개정된 헌법으로 제5공화국을 탄생시킨 드골 대통령이 자유 프랑스(La France libre)를 중심으로 레지스탕스 활동과 독일점령기의 역사를 새로이 쓰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걸 고려하면, 순전히 드골의 호소만으로 레지스탕스가 시작했다는 서술엔 의문부호가 달린다.

그럼에도 1940년 6월의 방송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기엔 충분했다. 비슷한 시기 장 물랭(Jean Moulin)이 자살을 시도하는 등 나치 독일과의 강화 및 협력을 거부하는 움직임은 작지만 분명히 있었고, 드골의 호소는 이 모든 시작을 통틀어 말하기엔 좋은 시도였기 때문이다. 또 나치 독일과 비시 체제에 의한 노동자 강제동원이 본격화되는 1942년부터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를 레지스탕스 활동의 대표로 삼아 지역 또는 정파(이념)에 따라 흩어진 레지스탕스 활동에 체계를 갖춰야 한다는 인식이 생겼기에, 오늘날에도 1940년의 호소는 레지스탕스의 시작이라 일컫는 것이다.

1944년 8월 15일자 프랑스 좌파신문 '뤼마니테' 1면. '프랑스여 영원하라'라는 제목아래 드골의 자신이 실려있다.
1944년 8월 15일자 프랑스 좌파신문 ‘뤼마니테’ 1면. ‘프랑스여 영원하라’라는 제목아래 드골의 자신이 실려있다.

지하에서 출발한 새로운 언론

지하신문은 여러 가지 기능을 동시에 수행했다. 독일점령당국과 비시 정부의 선전에 맞서 역선전을 펴고, 점령당국의 거짓 정보 제공이나 정보 은폐에 맞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레지스탕스 조직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리고 그 조직을 더욱 확대하는 역할도 해냈다는 점에서 지하신문은 강점기 초기 국면의 레지스탕스에 가장 필요하고 가장 선진적인 수단이었다. (주- 이용우(2012), 레지스탕스의 탄생 : ‘인류박물관’ 조직과 ‘북부해방’을 중심으로, 프랑스사 연구 제27호, p.167)

레지스탕스 활동 가운데는 나치 독일 요인에 대한 공격이나 철로 끊기 등 무척 위험한 활동이 많았다. 사람들의 지지가 없다면 보안을 유지하기도 무척 힘들었다. 따라서 장 프랑수아 뮈라시올(Jean-François Muracciole)이 말한 것처럼 프로파간다는 레지스탕스의 주된 무기가 되었고[Jean-François Muracciole, Histoire de la Résistance de la France, PUF/Humensis(2020), p.75], 반드시 지하언론(La presse clandestine)을 통해서 이뤄져야 했다. 이런 활동을 공개적으로 했다간 비시 체제의 경찰이나 밀리스(La Milice française, 프랑스 민병대)에 잡히면 곧장 죽은 목숨이었으니. 게다가 조직 전체가 발각되어 일망타진되는 일도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지하언론 형태가 필수적이었다.

보안을 지키며 작업을 해야 하니 신문의 경우 대형 윤전기를 쓰는 건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초기 신문들은 손으로 써서 만들었다. 나중엔 게스테트너(Gestetner) 스텐실 복사기란 이름의 등사기를 써서 한 시간에 700~ 800부 정도를 찍어 낼 수 있었다고 한다. 배포 역시 위험했는데 많은 양은 주로 역에서 일하는 철도노동자들이 맡았고 자전거를 통해 뿌려지기도 했다. 우편함에 넣기, 공원에 있는 벤치나 탁자 밑에 숨겨두기 등도 지하언론을 알리는 데 제법 유용한 방법이었다.

이런 지하언론들 가운데 오늘날 프랑스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제일 많이 이름이 알려진 신문은 다름 아닌 <콩바(Combat)>다. 여러 이름을 거쳐 1941년 12월에 탄생한 <콩바>는 많은 작가들이 기고와 활동에 참여하여 레지스탕스 언론을 상징한다. 또 독소불가침 조약(1939)의 여파로 한때 프랑스에서 발간이 금지되었던 <뤼마니테(L’Humanité)>는 지하언론의 형태로 활동을 잇게 된다. 여기에 <프랑-티뢰르(Franc-Tireur)>, <리베라시옹(Libération, 우리가 알고 있는 ‘리베라시옹’과는 다른 언론이다)> 등의 언론들도 레지스탕스 활동에 참여한다.

나치 독일과 비시 체제의 탄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나 지하언론의 활동은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1942년에 이미 4만부가 인쇄된 <콩바>는 1944년에는 무려 30만부로 폭증한다. 지하언론으로 활동한 5년에 걸쳐 나온 <뤼마니테>는 누적으로 5백만부에 달한다. 심지어 1944년 <콩바>를 찍는 데 쓴 종이가 한 달에만 3톤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들 언론의 힘을 짐작하게 한다(주-Jean-François Muracciole, Histoire de la Résistance de la France, PUF/Humensis(2020), p.78).

레지스탕스 세력의 통일을 외친 언론

당시 이들 언론이 주문한 건 레지스탕스 활동의 ‘연합’이었다. 레지스탕스 활동은 생각보다 매우 복잡했다. 활동하는 곳도 나치 독일이 점령한 지역과 비시 체제가 영향을 미치는 지역 등으로 나뉘었고 활동규모도 달랐다. 가장 문제가 된 건 역시 이념과 주체에 따른 구분이었다. 활동을 이끈 게 프랑스인이냐, 아니면 외국인이냐,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온건파냐 급진파냐, 또는 유대인이 참여했나 등에 따라 너무나도 많은 분파가 레지스탕스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나치 독일은 물론 비시 체제와 제대로 싸우기 위해선 통일이 필요했다. 그리고 언론이 앞에 섰다.

1942년 5월에서 6월에 이르는 기간 <뤼마니테>는 중요한 의제 하나를 띄운다. 모든 애국자들은 사회주의, 급진주의, 보수주의, 가톨릭, 유대인 또는 무신론 등을 막론하고 힘을 합해야 한다고 호소한 것이다[Julian Jackson, France : The Dark Years, 1940 - 1945, Oxford University Press(2001), p.425]. 이미 많은 활동가들이 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던 때 <뤼마니테>의 움직임은 중요한 계기가 되기 충분했다. 지역 또는 이념 대통합, 나아가 지역 및 이념 간 통합을 알리는 신호였고 이는 드골이 장 물랭으로 하여금 프랑스 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나로 묶는 원동력이 되었다.

프랑스 극우를 이끈 장-마리 르펜(Jean-Marie Le Pen)의 죽음을 보도한 '리베라시옹'의 2025년 1월 8일 표지. “원수님, 그가 여기 있습니다(Maréchal, le voilà)”란 표제는 앞에서 얘기한 노래인 '원수님!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Maréchal nous voilà)'를 패러디한 것이다. 극우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맞서는 자세가 돋보인다. 출처= Libération
프랑스 극우를 이끈 장-마리 르펜(Jean-Marie Le Pen)의 죽음을 보도한 ‘리베라시옹’의 2025년 1월 8일 표지. “원수님, 그가 여기 있습니다(Maréchal, le voilà)”란 표제는 앞에서 얘기한 노래인 ‘원수님!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다(Maréchal nous voilà)’를 패러디한 것이다. 극우에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맞서는 자세가 돋보인다. 출처= Libération

오늘날 프랑스 언론을 만든 의지와 사람들

1944년 프랑스 해방(La Libération)을 주도한 드골은 프랑스에 비시 체제의 협력을 딛고 새 미래를 열어갈 정론지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에 위베르 뵈브메리(Hubert Beuve-Méry)로 하여금 새로운 신문을 만드는 걸 주문했으니 그 결과로 탄생한 게 다름 아닌 <르몽드(Le Monde)>다. 이후 <르몽드>는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철저한 독립을 지향했다. 지금도 적지 않은 수입을 구독료에 의존하며 거대 기업이나 정부의 입김을 배제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르몽드> 말고도 <르 푸앙(Le Point)>, <리베라시옹(Libération)>, <렉스프레스(L’Express)> 등 적지 않은 신문이나 잡지가 대부분 1944년 이후에 만들어졌다. 이는 무엇을 뜻할까.

프랑스는 전통을 중시한다. 센강을 따라 늘어져 있는 수많은 부키니스트가 이를 잘 보여준다. 아무리 오래된 책이라도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는 가치가 있다 생각하며 판매대에 올려놓는 걸 흔히 볼수 있는 프랑스다. 그런 나라인데도 100년이 넘는 중앙지를 찾기란 사실상 힘들다. 왜일까. 바로 1944년 이전 비시 체제와 나치 독일을 도왔던 수많은 언론들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이런 언론들의 흔적은 디지털 아카이브에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오늘날 프랑스 사람들의 일상에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프랑스는 이렇게 지난 언론의 연결고리를 끊고자 했다. 이로 인한 커다란 공백을 지하언론의 활약, 레지스탕스 활동의 단결을 주문했던 소중한 경험으로 메우고자 한 게 프랑스의 지난 80년이었다. 냉전, 알제리 전쟁, 68혁명, 오일쇼크, 테러 등 해방 이후에도 프랑스 현대사엔 위험한 순간들이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고비마다 예전처럼 언론이 갈등을 부추겨 극단적인 행동을 주문하는 건 막을 수 있었다. 이는 오늘날 프랑스에게 남겨진 가장 귀한 ‘유산’이다.

다른 하나. 프랑스 사람들은 ‘바람직한 언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레지스탕스를 대표했던 많은 지하언론들이 오늘날까지 발행되고 있는 건 아니다. 적지 않은 수가 1960~70년대가 되면 이름을 바꾸거나 폐간되는 운명을 맞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들이 지녔던 정신으로 새로운 언론을 만드는 일을 계속 이어나갔다. 구독하고, 비판하고, 참여하며 프랑스 사회에 어떤 언론이 필요한가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예전에 이름을 얻은 신문이나 언론이라고 해서 협력을 저지른 곳을 용서하지도 않았다. 결국 오늘날 프랑스 언론을 만든 건 어떤 일에서도 참여를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인 셈이다.

글쓴이

추성목 칼럼니스트

필자인 추성목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스스로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졸업 후 취업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프랑스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프랑스언어문화학과에 입학해 ‘제2의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비시 체제와 레지스탕스, 쇼아를 공부하며 글을 쓰고 싶다는 목표. 또 중국과 중앙유라시아, 중동 등 지역을 다룬 프랑스어권의 저서나 자료들을 번역해 소개하겠다는 목표. 이 둘을 마음에 지니며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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