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과 범위 명문화할 때 요구는 현실화된다

‘될 협상’을 준비하되 ‘안될 원칙’도 세워야 국익 관점서 투자금 조달 방법 합의해야 ‘무엇을 투자로 볼지’등 문서로 못박아야 공동 공시와 제3자 검증 등 사후절차 마련 성과가 좋으면, 세액공제 등 보상 요구해야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과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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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3,500억 달러(약 480조 원) 대미투자 요구를 둘러싼 우려가 크다. 그렇다고 협상을 섣불리 접을 일도 아니다. 한·미 관계의 역사성과 전략적 가치를 감안하면 신중한 결정이 필요하다. 동시에 ‘원칙을 벗어난 양보’는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상대의 요구 규모와 영향력을 냉정히 평가하되, 협상의 기준을 ‘국익과 자율성’에 두고 차분히 임하면 된다.

상호 의존적인 경제 현실을 인정하되, 그 위에 ‘조건을 명확히 하고, 위험을 공정하게 나누며, 시장안정을 해치지 않는’ 정교한 협상 논리를 세우자. 냉정한 협상과 가능하면 성과를 만들어내는 실무적 치밀함—이 두 가지를 함께 지니고 접근하자. 그리고 협상은 언제나 ‘원칙을 지키며 국익을 극대화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현재 미국의 요구는 ‘얼마를 내라’는 큰 숫자만 보일 뿐, 몇 년에 걸쳐 집행할지, ‘어떤 방식의 투자를 요구하는지와 투자의 대상이 무엇인지’, 그리고 수익·손실을 어떻게 나눌지가 불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선 국민적 동의도, 합리적 협상도 이뤄지기 어렵다. 이번 논의의 초점은 ‘얼마’가 아니라 ‘어떻게, 무엇에’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사진= 연합뉴스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 사진= 연합뉴스

오해부터 바로잡자: ‘달러’와 ‘원’, 그리고 외환보유고의 진짜 성격

첫째, 달러는 미국의 통화이고 원은 한국의 통화다. 한국은 달러를 ‘발행’할 수 없다. 미국에 투자를 위해 한국이 달러를 확보하는 경로는 대략 네 가지, 즉 경상수지 흑자, 자본유입(해외채권 발행·대출 등), 보유자산 대외 매각, 중앙은행 간 스왑 뿐이며 어느 것도 ‘무제한·무비용’은 아니다.
둘째,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2025년 8월 말 기준 약 4,162.9억 달러다. 통화별 비중은 공개되지 않지만, 관행을 감안해 보수적으로 달러 비중 60~75%를 가정하면 달러표시 보유자산은 대략 2,500억~3,120억 달러 구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자산은 결제·시장안정用 ‘유동성 버퍼’가 중심이다.

셋째, 보유 자산의 상당 부분은 뉴욕연방준비은행 준비금 계정, 미국 국채 등 고유동성·안전자산, 해외 예치금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필요하면 이체·매각·환전이 가능하지만, 그만큼 유동성 저하·가격손실·환율 충격의 비용을 치른다. ‘정책 비용 없이, 시장 충격 없이, 현금 3,500억 달러를 곧바로 꺼내 미국에 넘긴다’는 그림이 비현실적인 이유다.

넷째, 미국은 사실 필요하면 자국내에서 달러를 구할 수 있다. 미국 재무부는 국채 발행으로 민간에서 달러를 조달할 수 있고, 연준은 통화정책 필요에 따라 2차 시장에서 국채를 사고팔며 금융시스템에 달러 유동성을 공급할 수 있다. 제도적 통로는 이미 갖춰져 있다. 다만 그 선택은 물가·고용·금융안정·정치적 제약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비상 시기에는 연준이 직접 국채를 매입하기도 했다. 그런데, 국채를 발행하면 연방정부의 부채비율이 높아진다. 트럼프는 국가부채 비율을 높이지 않으면서 달러를 모으고 싶은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여 조건을 조목조목 명확히 따지며 협상을 진행하면, 미국의 요구는 현실에 맞게 조정될 수밖에 없다. 지금 알려진 형태 그대로의 요구는 구조적으로 실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 단계에서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먼저 ‘방법’을 분명히 하자. 대미 투자의 경로는 기본적으로 세 가지뿐이다. 협상에는 이 세 가지 중 어떤 방식을 쓸지, 복수 방식을 섞는다면 그 ‘조합의 비율’까지 논의해야 한다. 그래야 협상의 현실성을 높이고 혼선과 사후 분쟁을 줄일 수 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사진= 연합뉴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 사진= 연합뉴스

첫째 방법: 미국 현지 ‘차입’

한국 기업이나 정책금융기관이 미국 현지에서 회사채를 발행하거나 은행 대출을 받아 달러를 마련하는 방안이다. 달러 외환보유고(해외 결제를 위해 미 연준에 예치된 달러 준비금과 미국 투자 자산)를 곧바로 줄이지 않는 장점이 있다. 다만 목표 금액을 못 채우는 ‘조달 불발’ 위험과 조달 이후 사업 성과 부진으로 상환 부담이 커지는 ‘투자 실패’ 위험이 있다. 따라서 협상에서는 ‘조달 불발 시 투자 규모 자동 축소·연기’와 ‘투자 실패 시 손실의 한·미 공동 분담(비율·상한·발동 조건 명시)’을 반드시 합의해야 한다. 그래야 ‘빚내서 하는 투자’가 ‘일방 배상’으로 변질되지 않는다.

둘째 방법: 국내 원화→달러 환전 송금

국내에서 원화를 모아 외환시장에서 달러로 바꿔 미국에 보내는 방안이다. 표면상 외환보유고가 즉시 줄지 않는 듯해도, 단기간 대규모 달러 매수는 환율 급등과 원화 약세를 불러 외환시장을 흔든다. 불안이 커지면 한국은행의 안정화 개입이 뒤따르고, 그 과정에서 외환보유고가 빠르게 줄 수 있다. 사실상 대규모 ‘자본 수출’ 효과이므로, 외환시장 안정을 중시한다면 이 경로는 가능한 한 피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셋째 방법: 외환보유고의 투자처 전환

외환보유고 4,162.9억 달러 중 달러표시 2,500억~3,120억 달러(추정)는 대체로 미 연준 준비금 계정·미국 국채 등 안전자산으로 운용된다. 즉, 이미 상당액이 미국 금융권에 ‘안전자산 형태’로 투자돼 있다. 여기서 국채 비중을 줄여 특정 산업·프로젝트에 직접 투입하면, 비상시에 필요한 유동성과 안전성이 훼손되고 준비금 운용이 상대 수요에 과도하게 묶일 수 있다. 금융안정에 미칠 파장을 감안할 때, 이 경로는 ‘매우 제한적·예외적’으로만 검토하는 게 합리적이다.

‘투자범위’도 동시에 논의해야 한다

무엇을 ‘투자’로 인정할지 그 정의가 선행돼야 협상·집행의 혼선을 줄인다. 공장·인프라 같은 실물투자만 포함할지, 배터리·반도체·데이터센터 같은 제조설비, 송배전·저장장치 프로젝트파이낸싱, R&D 등 어디까지를 인정할지 미리 논의해야 한다. 이미 발표된 투자와 향후 계획의 구분, 동일 프로젝트의 이중계산 방지 기준까지 함께 합의하면 ‘숫자 산정’ 논란을 피할 수 있다. 핵심은 ‘집행 방법’과 ‘인정 범위’를 ‘동시에’ 확정하는 일이다.

협상을 해나갈 때에는 현지 조달의 비중을 가급적 높이고, 원화→달러 환전 송금은 최소화하며, 보유액 전환은 엄격한 요건과 낮은 한도에서만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 연(年)·분기별 방법별 ‘상한’을 두면 환율·금리 충격을 분산할 수 있다. 이는 상대를 압박하려는 장치가 아니라 우리 쪽 ’안전레일‘이다.

위험은 ‘공동’으로, 원칙은 ‘문서’로 해야한다

현지 조달이 어렵다면 자동 감액·연기하고, 집행 뒤 성과가 부진하면 사전에 정한 비율·상한 조건에 따라 손실을 공동 분담한다는 원칙을 협정문에 분명히 하도록 협상해야 한다. 환율 급등 등 시장 스트레스가 임계치를 넘을 때 집행을 일시 정지하고 공동 재점검하는 보호 장치도 유용하다. 외환시장 안전판으로 한·미 통화스와프 같은 비상 유동성 장치를 병행한다는 원칙을 함께 확인하자.

추가적으로 분기별 공동 공시와 제3자 검증으로 집행·성과를 투명하게 공개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성과가 기준을 넘으면 관세 인하, 인허가 패스트트랙, 보조금·세액공제 확대를 단계적으로 ‘자동 연동’하는 ‘성과 기반 상호주의’를 설계해야 한다.

여기서도 같은 논리가 통한다. ‘방법과 범위, 위험 분담, 시장 안정, 투명성’을 조항 하나하나로 구체화하며 협상을 밀고 나가면, 미국의 요구는 현실에 맞게 조정될 수밖에 없다. 지금 알려진 형태 그대로의 요구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협상의 목표가 ‘받아들이는 것’이 될 수는 없다. 합리적 조건을 제시하고 치밀하게 논의하되, 핵심 원칙이 지켜지지 않으면 유보하거나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될 협상’은 정교한 설계로 살리고, ‘안 될 협상’은 조정·유보하고 다른 타협안을 찾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열린 태도와 신중함이 함께 가야 협상력이 생긴다.

관건은 규모 자체가 아니라 설계다

투자금 조달의 ‘세 가지 방법’을 분명히 하고 그 조합을 정하며, ‘투자 인정 범위’를 분명하게 협의해 가자. 그 위에 위험 분담과 시장 안정, 투명성과 성과 연동을 촘촘히 얹으면, 한국은 외환안정을 지키면서도 실익 있는 협력의 길을 차분히 열어 갈 수 있다. 서두에서 말한 그대로다.

우려는 이해하되, 협상을 섣불리 접지도, 원칙을 벗어나 양보하지도 말자. ‘조건을 하나하나 명문화하는 과정 자체가 미국의 요구를 현실화(조정)하는 힘’이다. 원칙을 분명히 세우고, 그 원칙을 지키며 끝까지 치밀하게 협상하자. 그렇게 이뤄지는 합의만이 의미 있고 또한 지속 가능하다.

글쓴이

유승경 전 경기경제과학진흥원 원장

유승경은 경기도 경제과학진흥원 원장을 역임하며 산업정책과 혁신 생태계 조성에 힘쓴 바 있다. 현재 정치경제연구소 <대안>의 수석연구위원으로서 화폐와 금융을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일리노이 주립대와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수학했다. LG경제연구원과 우리금융경영연구소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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