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테크’ 중소기업에도 자본을 다오
대기업에만 쏠리는 정부 지원제도 정작 대기업은 중기 인력 빼가는데 아이디어 있는 중기는 자본이 없고 자본있는 대기업은 도전의지 없다 딥테크 지원과 제도, 이제 고쳐야
‘전직 동의서’라니
올해 초 필자는 신입 때부터 5년간 키운 엔지니어를 S전자로 떠나보내면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 결혼할 상황인데 처가에서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는 사위를 원한다며, 눈물을 질질 짜며 퇴직하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어쩌겠는가. 내가 장인이라도 그런 마음들텐데, 하지만 연봉은 우리 회사가 거기와 비슷하거나 우리쪽이 더 많았다. 그래도 그 친구는 ‘대기업 뱃지’를 택한 것이었다.
황당한 상황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그는 며칠 뒤 자신이 갈 회사로부터 받은 서류라며 ‘전직 동의서’를 내게 들이밀었다. 삼성전자가 이직 과정에서 민형사상 소송이 발생하면 원소속 회사가 책임을 진다는 각서의 서명을 요구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퇴사를 하라고 한 내가 기술인력의 전직에 동의하고, 관련된 소송을 일체 제기하지 않으며, 제기시 모든 책임이 우리 회사에 있다는 내용이었다. 서류를 건네고 서있는 사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곤 끝내 서명해주었다. ‘서류 쓸 기술 밖에 없는 놈들’이라 뇌이며.
아무리 중소기술기업 대표밖에 안되지만, 이건 인간으로서 참기 힘든 수모였다. 알아보니 다른 중소기업 대표도 그 대기업으로부터 똑같은 행패를 당했다고 했다.
반도체 기술 우위는 없어졌다
그러고 얼마되지 않아 중국 반도체 기업이 HBM3의 현지 생산에 성공하려 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중국의 창신메모리(CXMT)가 HBM3 샘플을 화웨이 등 주요 고객사에 공급하며 양산을 위한 최종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만약 양산 테스트를 통과하면, 지금까지 삼성·SK하이닉스·마이크론이 주도하던 시장이 4파전 체제로 재편될 전망이란 섣부른 얘기도 나온다.
우리는 뜻밖의 자각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한국이 오랫동안 자부해온 반도체 기술은 더 이상 절대적 우위가 아니게 됐다. 딥테크(Deep Tech)를 둘러싼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딥테크는 인공지능(AI), 바이오테크, 반도체, 로봇공학, 첨단 소재 등 고도의 전문성과 장기간의 연구·개발을 필요로 하는 기술 분야다. 사회적 문제 해결과 혁신적 제품·서비스 개발을 목표로, 막대한 초기 투자가 필수적인 곳이다.
이제 여기서 한 번쯤 되짚어봐야 할 질문이 나온다. 딥테크는 정말 기술 그 자체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늘 기술보다 더 큰 장벽은 ‘자본’이었다. 뜻밖의 자각이란 기술이 아니라 자본이 관건이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자본을 다오, 지원을 해다오
딥테크는 소수의 대기업이라야 개발할 수 있는 영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기술 난이도가 아니라 막대한 자본 조달 문제 때문이다. 과거에는 대기업이 기술을 선도하며 신입사원을 채용해 5년간 체계적으로 길러냈고, 이들이 중소기술기업으로 흘러들어가 ‘산업 보국’의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 역시 값싼 전력요금과 4%대 저금리 정책으로 무제한에 가까운 자본을 보전해주었다. 당시 일반 기업의 사채 이자가 20~30%대를 오가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호조건이었다.
그 균형이 지난 몇 년 사이 완전히 깨졌다. 내가 키운 엔지니어를 떠나보낸 것처럼 더이상 중소기술기업이 인재 양성의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도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가 과연 왜 대기업에 막대한 지원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신입사원을 키우면 결국 대기업이 데려가버리는데. 중소기술기업 대표 누군가는 ‘선수 이적료라도 받자’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현실은 냉정하다. 10년간 키운 인력을 데려가는 대가로 연봉의 10배를 주더라도, 그 비용을 대기업이 기꺼이 부담할 리 없다. 우리나라 첨단 중소기술기업은 핵심 기술 개발과 실행에 능하지만, 대기업은 경직된 의사결정 구조와 보수적인 사업화 절차 때문에 아이디어를 빠르게 시장에 적용하지 못한다.
국가 지원도 방향을 잃었다. 수백조 원대 자금을 동원해 중국 시안에 메모리 공장을 짓고, 미국 텍사스에 파운드리를 세운 기업에는 법인세 감면과 대출 보증이 쏟아진다. 반면 팹리스 중소기술기업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국가 경쟁력을 책임질 잠재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자본 부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현실이 반복된다. 중국 정부는 400조 원을 투입해 토종 팹리스 생태계를 조성 중인데, 우리는 지난 10년간 지원한 규모가 1조 원 안팎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1대 400의 격차 앞에서 우리 팹리스 기업들이 버텨낼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기술없는 대기업에 몰리는 지원
딥테크 분야에서 ‘자본의 역할이 8할’이라는 말이 과언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회사는 창업 24년차 팹리스로, 수억 개의 반도체 칩을 생산해 전체의 80%를 수출했다. 그럼에도 단 한 차례도 외부 투자 유치에 성공하지 못했다. 벤처캐피탈은 “상장해도 제값을 받기 어렵다”는 이유로 펀딩을 기피한다. 반대로 미국과 중국의 대기업은 높은 밸류에이션을 등에 업고 손쉽게 자본을 조달해 연구개발에 재투자한다.
더구나 중국은 자동차와 휴대폰 산업에 대해 자국 제품을 쓰지 않으면 정부 보조금을 끊겠다는 정책을 고수한다. 성능이 다소 떨어지는 중국산 반도체 부품은 비싼 값에도 팔리고, 우수한 한국산은 헐값에 내다팔거나 계약 자체가 성사되지 않는 일이 다반사다. 기술력으로 시장을 주도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국내 첨단중소기업들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한다. 이런 환경에서 인공지능 반도체를 개발하려 다년간 투자해놓은 중소기업 대표가 할 수 있는 일은 ‘소송을 건다면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에 서명한 뒤, 인력을 겨우 한두 명이라도 덜 빼앗기기 위해 조심하며 지키는 것이다.
필자는 얼마 전부터 ‘열심히’라는 단어를 덜 쓰게 되었다. 왜냐하면 죽어라 고생해 기술을 개발해도, 결과물이 나오기 무섭게 대기업에 뺏길 수 있다는 사실이 숙명처럼 뒤따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입사원을 뽑지 않고 연구개발 예산을 줄인 채 흑자를 내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돌이켜보면, 필자를 비롯한 한국 팹리스 산업의 초창기 자산은 젊은 엔지니어들의 열정이었다. 50~60대 대표와 임원들은 대학에 의대까지 갈 점수를 받았지만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뒤 불굴의 의지로 헐값에 연구실에서 뛰었다. “삼성전자가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각오로 일하던 시절이 있었다.
첨단 중소기술기업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앞길이 캄캄하다. 누가 이 불리한 환경에서 창업할지, 어떤 대표가 신입사원을 뽑아 육성시키려 할지 의문이다. PBR이나 PER 같은 재무지표를 모른다 해도 상관없다. “이런 나라에서는 기술로 먹고 살 수 없다”는 고정관념이 퍼진다면 우리가 지금 지키고자 하는 미래는 사라진다.
그나마 있던 좋은 아이디어도 휴지조각처럼 버려지고, 수백조 원대 국부는 해외 공장과 외화 송금으로 빠져나간다. 뛰어난 인재를 끌어모아 세계 1등을 넘보던 그 순간도, 결국은 자업자득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대로 가다간 HBM3 중국 생산이 상징하듯, 우리의 기술은 누군가의 시장이자 비용 절감 대상일 뿐이다. 앞으로 우리는 중국 관광객의 발 마사지를 해주듯 살아갈지도 모른다. 이런 가능성 앞에서 과연 누가 자신의 후손에게 “한국에서 딥테크로 성공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이제 선택은 정부와 기업,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몫이다. 첨단 중소기술기업이 뿌리내리고 자랄 수 있도록 자본을 재배치하고 이를 위한 제도를 고쳐야 한다. 기술 그 자체만으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 작은 싹에게 물과 햇빛을 고루 나눠주는 시스템 전환이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HBM3를 중국에서 생산하는 현실을 딛고, 한국 딥테크 산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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