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서 ‘협력’이란 이름의 변절
[비시 체제 : 협력과 부역의 일대기] 과거를 딛고 선 프랑스 언론④ 나치 독일에 무너진 프랑스 그 이후 ‘공화국’ 버리고 ‘국민 개조’ 선언 언론의 “협력”...적은 나치 아닌 국민 프랑스 지식인 정신의 ‘극단적 변질’
사라진 프랑스 공화국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이 시작된다. 프랑스는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교전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이른바 ‘이상한 전쟁(La drôle de guerre)’이 1년 가까이 이어진다.
1940년 5월. 나치 독일은 드디어 프랑스와 전쟁을 벌인다. 미국은 물론 영국도 프랑스가 (적어도 바로) 무너지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프랑스 총참모부는 전격전(blitzkrieg)에 전혀 대응을 못했다. 아르덴 숲이 돌파되고 마지노선은 쓸모가 없어졌으며 포로는 100만 명이 넘었다.
1940년 6월. 패색이 이미 짙었다.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드골(Charles de Gaulle)은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 어디든 정부를 옮겨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페탱(Philippe Pétain)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전쟁 포기를 선언했다. 더는 국토가 유린되는 걸 지켜볼 수 없다는 명분이 군 수뇌부의 무능을 가렸다.
파리로 진주한 나치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 지대와 자유 지대로 나눈다. 프랑스 공화국(La République française)은 그렇게 지도 위에서 사라졌다. 나치 독일과 비시 체제, 언론의 금지된 장난(Jeux interdits)이 시작됐다.
국민 혁명의 선두에 서다
페탱을 앞세운 총참모부와 정치인, 자본가들은 단순히 적을 막을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협력을 선택하진 않았다.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바로 패배의 책임을 인민전선(Le Front populaire)을 비롯한 사회주의 세력에 돌림과 동시에, 전통적 가치가 중심이 된 프랑스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기 위해 ‘공화국 프랑스’는 무너져야 했다. 이제 프랑스의 정식 국호는 ‘프랑스 국가(L’État français)‘가 되었다. 자유와 평등, 박애란 가치는 사라졌다. 노동(Travail), 가족(Famille), 조국(Patrie)을 내건 새로운 프랑스가 공화국을 대체할 것이다. 이는 1940년 7월 11월 페탱이 한 연설에서도 잘 드러난다.
“우리는 국민의 규율이 모든 사람들의 정의를 통해 통치자의 권위에 부응하는 그러한 조직화된 프랑스를 만들 것이다.”(주-김한식(1997), <언어와 이데올로기 : 베르나노스의 정치평론과 Vichy의 프로파간다>, 불어불문학연구, Vol.35 No.1, p.420)
비시 체제는 페탱의 말에 맞게 국민들이 질서와 복종을 저절로 받아들이게 만들 목적으로 활발한 선전을 벌인다. 페탱에겐 베르됭 전투(La bataille de Verdun, 1916)의 영웅이란 이미지에 ‘전쟁으로부터 국토를 지킨 수호자’의 위상이 더해졌다. 이와 함께 수많은 포스터들은 사람들의 사고 흐름을 미리 차단, 이미지의 힘을 이용해 페탱을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위인으로 바꿨다. 즉 비시 체제는 여론을 조작해 정권을 정당화하고 페탱이 이끄는 유토피아란 방향을 제시해 ‘국민개조’라는 목표에 다가서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줄리언 잭슨(Julian Jackson)이 말한 ‘국민 혁명이란 구호를 파는 일(Selling the National Revolution)’(주-Julian Jackson, 《France : The Dark Years, 1940 – 1944》. Oxford University Press(2001), p.252)이 필요했다. 앞서 말한 포스터가 전국적으로 배포됐다. 그것도 전례 없는 양이. 1942년 1월 보고에 따르면 도시 벽면 곳곳에 너무 많이 포스터가 붙어 있을 정도로 흔해 빠져 사람들이 더는 여기에 눈길도 주지 않을 정도였다. 나치 독일 또한 선전에 적극적이었다. 독일 대사관 차원에서 배포한 홍보물만 브로슈어가 1,700만 부, 소책자가 1,000만 부, 23종 포스터는 모두 40만 장이 복사됐다. 읽지 않기가 힘들 수준이다. 비시 체제와 나치 독일이 각자 선전을 추구한 목적이 완전히 똑같다고 보긴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을 대상으로 점령 통치의 효율성 도모 또는 국민 혁명이란 구호 확산 가운데 하나를 추구했다는 점에선 과거 공화국 프랑스가 추구한 가치와는 정반대되는 성격임에는 분명했다.
이 가운데 정부가 내세우는 수단은 변하지 않았다. ‘검열’이다. 1940년까지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도 대표적인 통신사였던 아바(Havas)내 여러 부서 가운데 비시 정부는 보도 부문만 따로 떼 프랑스 정보국(L’Office français d’information, OFI)이란 기관을 만든다(OFI는 1944년 프랑스 해방 이후 우리가 잘 아는 AFP로 탈바꿈한다). OFI는 기본적으로 통신사 기능 외에도 비시 체제가 마련한 보도지침 전파를 통한 언론 통제 역할을 맡았다. 대표적인 예가 1940년 12월에 있었던 지침인데 각 가정에서 비시 체제가 내세운 ‘신질서(L’Ordre nouveau, New Order)’ 구호가 잘 전달되도록 촉진하라는 내용이다. 국가가 주도하는 새로운 구호와 질서에서 언론 자유는 사라지고 나치 독일에 협력하는 정부의 목적만 남았다.

눈속임 : 나치 = 소련 막는 방파제? 배신한 영국?
“자신의 운명을 감당하게 된 이 민중은 내 생각으로는 그들 스스로 옳은 길을 택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그들에게 어떤 합리적 행위를 하기 위하여 필수적인 명확하고 확실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사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중략) 더욱 심각한 것은 소위 순수 보도지라는 신문과 오로지 정치권의 지시만 따른다는 신문들 중에서도 다수가 사실은 흔히 정직하지 못하고 때로는 그 뿌리가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의 은밀한 이해관계를 위하여 일한다는 사실이다.”(주-마르크 블로크 지음, 김용자 옮김, 《이상한 패배 : 1940년의 증언》, 까치(2024), p.155 - 156)
협력엔 내적·외적 동기가 수반됐다. 내적 동기는 국민 혁명을 통한 전통적 프랑스 가치(체제) 회복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나치 독일이 들어온 김에 사회주의자 및 공산주의자, 유대인, 프리메이슨 등 모두를 일소(一掃)하겠다는 게 이런 동기였다면, 외적 동기는 철저히 나치 독일에 기대고 있었다. 유럽에서 가장 강한 육군을 거느리고 있던 우리 프랑스도 나치 독일을 막지 못했고 폴란드를 비롯해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가 모조리 전격전에 무릎을 꿇었다. 이탈리아는 이미 나치 독일의 동맹이며 스페인은 그들의 지원을 받은 내전으로 공화파를 축출한지 오래다. 게다가 나치 독일은 소련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도 이기고 있다(1940 – 1941년 상황). 그렇다면 우리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지배를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이 질서 아래 새로운 유럽의 모습을 구상해야 한다. 그래야 덩케르크(Dunkirk)에서 자기 군대만 빼내어 달아난 영국을 응징하고 유대볼셰비즘을 내세워 밀려오는 소련을 막을 수 있다. 협력의 길을 선택한 언론과 지식인에게 이미 적은 나치 독일이 아닌 셈이었다.
나치 독일이 주도한 유럽에서 프랑스의 위상, 이른바 유럽주의(여기서는 나치 독일이 주도하는 통합 유럽 구상을 일컫는다)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당대에 널리 퍼졌던 걸로 보인다. 1941년 프랑스 주재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Otto Abetz)가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주의 이념이 프랑스에 깊이 뿌리내렸으며, 유럽이 독일과 동일시되는 경향이 짙어져 이 이념이 나치 독일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감지했던 걸로 보인다. 더불어 나치 독일 당국은 유럽주의가 프랑스 대중들에게 보다 잘 다가갈 수 있도록 신문, 라디오, 문학계에 지침을 내려 활동을 지원했다. 이는 앞서 밝혔듯이 나치 독일의 힘과 국력에서의 우위를 인정한, 나치 독일에 의해 새롭게 꾸려진 유럽을 전제로 한다.(주-김승렬(2006), <“대독일제국” vs “파시스트 유럽” : 나치 유럽의 내부 균열>, 독일연구, No.11, p.14)
‘유럽주의’는 영국에 대한 증오와 소련을 향한 경계로 완성됐다. 비시 체제, 그리고 적지 않은 프랑스인들이 보기에 영국은 자신들을 배신한 나라였다. 영국이 덩케르크에서 프랑스군을 내버려두고 홀로 도망쳤으며 심지어 프랑스 함대를 공격했다는 것이 배신감을 느낀 까닭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행동은 충분한 정당성을 갖춘 결정이었다. 영국 입장에선 나치 독일이 진격해 덩케르크 주위를 포위한 상태에서 자국의 군인들을 내버려둘 수 없는 처지였다. 프랑스를 돕고 싶어도 영국군을 구출하기에도 선박이 극히 부족했다(영국은 철수 작전 당시 템스강에서 운행하던 유람선까지 모아 덩케르크로 보내는 등 모을 수 있는 선박은 다 모았다). 게다가 프랑스에 들어선 비시 체제가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로 결정한 이상 프랑스 국토 전체가 나치 독일의 전진기지 역할을 수행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나치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상황 역시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영국은 옛 동맹국을 공격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에겐 이성을 갖춰 영국의 행동을 판단할 여유가 없었고, 비시 체제의 선전이 빛을 발했다.
소련은 비시 체제가 선택한 협력을 정당화하는 또다른 존재였다.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조약을 맺을 땐 소련에 대한 매도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상태였으나, 1941년 6월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한 자본가와 극우 세력의 알레르기 반응이 극에 달했다. 나치 독일은 볼셰비즘이란 야만에 대항해 유럽을 수호하는 ‘천사의 이미지’로 자신을 포장했고 1930년대 프랑스 곳곳을 휩쓴 반인민전선 분위기가 더해져 소련에 대한 적개심은 유럽주의 아래 강화됐다. 비시 체제 영향 아래 있던 언론들은 그런 구호를 잘 받아쓰는 역할만 할 수 있었다.
만약 언론이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거부하면 어떤 운명을 맞았을까. 정간이나 폐간, 혹은 운영이 정지되는 압박을 피할 수 없었다. <르 피가로(Le Figaro)>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소련 붉은 군대에 지나치게 우호적인 논조를 지녔다는 이유로 1942년 1월 6일부터 14일까지 신문을 발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언론은 “영국과 공산주의자들이 프랑스를 암살하는 데 동의했다.”란 표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1942년 6월 똑같은 운명을 맞기도 했다.(주-Julian Jackson, 《France : The Dark Years, 1940 – 1944》. Oxford University Press(2001), p.254) 비시 체제와 나치 독일은 신문들의 헤드라인이나 논조 등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쳐 철저히 통제에 따르도록 만들었다. 유럽주의 이념은 강고한 검열에 따른 통제 아래 꽃피게 됐다.

변질된 지식인의 책임
그렇다면 언론을 통해 비시 체제와 나치 독일에 협력한 지식인들의 속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일제강점기엔 친일파로, 해방 이후엔 반공투사로 변신하며 부역을 저지른 우리 현대사 속 기회주의자들에 익숙한 탓인지 우리는 프랑스 과거사 속 대독협력자들도 권력과 부의 추구란 관점에서 볼 때가 많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협력을 선택한 지식인들을 설명할 수 있다면 어떨까. 유진현 상명대학교 프랑스어문학과 교수가 《본질과 현상》 제3호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과 모리악-카뮈 논쟁>을 다루며 시도한 협력 지식인의 양태 진단은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유진현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떠받치는 바탕은 사회를 향한 책임의식이다. 바꿔 얘기하면 체제 또는 사회가 변하더라도 자신의 글과 발언에 대해서는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는 뜻. 나치 독일이 국토를 반으로 나눠 점령했다는 특수한 상황은 그런 지식인의 참여를 더욱 절박하게 만들었다. 말 한 마디, 글 한 줄에 따라 생사의 갈림길에 서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협력을 선택한 지식인들이 나름의 ‘절박한 생각’을 갖고 비시 체제와 나치 독일의 편에 섰다는 진단이 가능하다.(주-유진현(2006), <프랑스의 과거사 청산과 모리악 – 카뮈 논쟁>, 본질과 현상, Vol.3, p.153 - 154) 비시 체제가 내건 국민 혁명과 신질서란 구호에 호응했든, 나치 독일이 지배하는 유럽에서 프랑스가 그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며 소련을 막는 역할을 기대했든, 아니면 유대인을 비롯한 불결한 외국인들이 사라져야 전통적 가치 회복에 바탕을 둔 프랑스의 부흥이 가능했다고 믿었든 이 모두가 단순한 기회주의적 접근이 아닌 ‘신념’에서 비롯된 행위였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다. 드리외 라 로셸의 다음 발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지식인은 일반인들의 의무와 권리를 뛰어넘는 의무와 권리를 지닌다. 벌어진 사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 위험천만할 수도 있는 기회를 잡는 것, 역사의 여러 갈래 길들을 시험해보는 것, 이것들은 지식인의, 적어도 그들 중 몇몇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책임을 지고 불순한 무리들과도 뒤섞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때문에 1940년대 프랑스 언론과 지식인이 보여준 협력은 단순히 이윤 추구 동기만으로 접근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신념에서 따른 게 아니라면 4년 남짓한 동안에 기고와 참여로 협력한 그들의 선택을 설명할 수 없다. 1930년대 인민전선의 집권에 따른 위기감과 파시스트 세력과의 연대 필요성 등 1940년 패배 이전부터 프랑스 사회 일각을 지배한 극우적 시각과 연계해야 협력 지식인과 언론을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44년 이전 언론의 협력은 프랑스 지식인 정신의 극단적 변질이다.

협력의 끝에 저항이 싹을 틔우다
1940년대 프랑스 언론이 보여준 협력은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 이후 프랑스 사회를 짓누른 반혁명, 친가톨릭, 반외국인 정서의 절정이었다. 극우 지식인들은 나치 독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신들의 오랜 비원(悲願)이 실현되리란 믿음으로 적극적으로 부역에 가담했다. 한편으로 비시 체제의 통치가 강화한 검열 체계는 통신사 일부 부문을 떼서 새로 기관을 창립하는 형태로 진화했으며 보도지침은 늘 언론을 짓눌렀다. 여기에 위배되는 경우엔 폐간과 폐쇄가 따라오기도 했다. 프랑스의 언론은, 자유를 잃었다.
결국 저항, 다시 말해 레지스탕스(La Résistance)는 말과 글의 자유를 되찾는 일에서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긴 터널 끝에 빛이 보이듯 레지스탕스 언론이 등장하며 프랑스 언론 자유는 회복의 시작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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