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극우와 함께 춤을 춘 프랑스 언론

[비시 체제 : 협력과 부역의 일대기] 과거를 딛고 선 프랑스 언론 ③ 대공항 실업과 불경기, 이민자 증가 인민전선, 극우정권 출현 막으려 단결 반면 극우언론 극성...나머지는 모르는척 자본에 지배된 언론, 선정주의까지 선보여

1930년 대공항 혼란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프랑스 극우파시스트 세력.
1930년 대공항 혼란기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프랑스 극우파시스트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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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료들이 전쟁 때에도 그 비열한 주간지들이 계속 내보내고 있는 증오와 어리석음을 매일 우유 마시듯이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나는 얼마나 여러 차례 혼잣말을 했던가! -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 주- 마르크 블로크 지음, 《이상한 패배》, p.181)

일러두기: 프랑스의 1930년대는 특별했다

본론에 앞서 1930년대 프랑스에 대해 말할 게 있다.우리에게 프랑스사가 친숙하다 말하긴 힘들다. 특히 1930년대 역사는 더욱 그렇다. 이유는 단순하다.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두 차례 세계대전을 사이에 둔 프랑스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1930년대 프랑스 언론의 행보에 묻어나는 흐름이 우리에게 아주 생소하게 다가올 가능성이 크단 얘기다.

게다가 프랑스에 대해 지니고 있는 고정관념(혁명과 자유, 평등, 박애의 나라)은 이해를 더 어렵게 한다. 따라서 글의 처음에 1930년대 프랑스사의 전반적 모습을 쓰는 게 도움이 되리란 결론을 내렸다. 만약 이후 내용들을 보다가 1930년대 프랑스 사회의 모습이 기억이 안 난다면 다시 여기로 돌아와도 좋다. 그리고 이는 1940년대를 향한 일종의 프리퀄(prequel)이기도 하다.

먼저 대공황. 1929년 월스트리트에서 일어난 주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불황은 전 세계에 엄청난 피해를 줬다.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1918년 종전 이후 떨어지는 인구 증가율이 경제를 어렵게 만든다는 강박(주-Julian Jackson, 《France, The Dark Years : 1940 – 1944》, Oxford University Press(2001), p.31)이 프랑스를 짓누르던 때였다. 실업 역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는데 효과적인 실업급여 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던 당시 상황이 해결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주- Nicolas Beaupré, 《1914 – 1945 : Les Grandes Guerres》, p.713)

이런 불안을 떨치고 나라 밖으로 강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프랑스는 베르사유 조약(1919)을 통해 엄청난 배상금을 바이마르 공화국에 부과함과 동시에 이행을 독촉하기 위해 루르 지역을 무단으로 점령(1923–1925)하는 신경질적인 태도를 드러내기에 이른다. 전쟁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한 몸부림이 그 뒤에도 계속되었으나 갑작스런 대공황은 모든 걸 허물었다. 경제는 치명상을 입었고 전쟁 이후 달라진 사회에 적응을 어려워하던 옛 참전용사들이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늘어나는 이민자들

벨 에포크(Belle Époque:1871- 1914)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프랑스의 상황이 좋지 않음에도 몰리에르의 나라를 향하는 이민자들은 늘어만 갔다. 특히 1차대전 이후 프랑스로 향한 이민자들이 두드러진다. 원인이 무엇이었을까?

일단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그래도’ 프랑스가 비교적 상황이 좋았던 탓이 컸다. 승전국의 지위를 얻었지만 북부 – 남부 사이 극심한 차별이 지속된 채 파시즘까지 대두한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국가적 탄압에 몰리자 고향을 등져야 했던 이들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오스만 제국이 벌인 대학살을 피해 프랑스로 온 아르메니아 사람들이나 (비단 나치 독일이 아니더라도) 각지에서 이어지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새롭게 이주한 유대인들만 보더라도 당시 프랑스는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향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지였다. 여기에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나라가 만들어졌으나 새로운 체제 건설에 혼란이 잇따르던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등을 떠난 사람들까지 더한다면 그 숫자는 크게 증가한다.

폭증하는 극우세력

농업과 가톨릭에 바탕을 둔 프랑스 사회의 전통. 사회에 제대로 하지 못한 참전용사들. 나아질 기미가 없는 불경기와 이민자의 증가를 같이 놓았을 때 이어질 1930년대 프랑스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극우 세력의 폭증’이다. 독일과 이탈리아 못지않게 프랑스에서의 극우 운동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먼저 프랑스적인 가치들로 조국을 재건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그러기 위해 가톨릭을 나라의 보호를 받는 국교의 위치로 다시 올리고 군대를 중시하며, 프랑스 사람들로 구성된 가족을 늘려 일자리를 빼앗는 이민자들을 몰아내 순혈의 프랑스를 이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민주주의를 “한물간 19세기의 이데올로기”라 공격하며 “권위의 세기, ‘우파’를 지향하는 세기, 파시스트의 세기”가 될 거라 장담한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를 생각나게 만드는 주장이다.(주- 스테판 J.링크 지음, 《글로벌 포드주의 총력전》p.13) 또 국가의 목적을 위해 민간 산업을 이용해 ‘조정된 시장 경제’를 구축해 경제를 성장시킨 나치의 사례도 있었다.(주- 스테판 J.링크 지음, 《글로벌 포드주의 총력전》, p.244) 파시즘이 경색된 프랑스의 문제를 해결하는 매력적인 대안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많았단 얘기다.

게다가 이론과 행동 두 방향으로 운동이 가능했다는 점은 1930년대 프랑스 극우 세력의 힘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참전용사와 청년들이 모여 단체를 만들고 집회를 벌이며 세력을 과시했고 극우 사상에 동조하는 법률가, 지식인, 그리고 언론인들이 모여 활동가들이 거리에서 외칠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들에겐 생각을 실어 전달할 수 있는 매체가 필요했고 1930년대 프랑스 언론은 훌륭한 토양이 되어주었다.

1936년 5~6월 총파업으로 인민전선 정부와 노동자계급은 조금도 양보의 의사가 없었던 기업가들을 굴복시켜 인민전선 정부가 사회・경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36년 5~6월 총파업으로 인민전선 정부와 노동자계급은 조금도 양보의 의사가 없었던 기업가들을 굴복시켜 인민전선 정부가 사회・경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인민전선의 탄생과 성과

공화국 프랑스의 가치를 지키고 자본주의의 폐단을 극복하기 힘쓴 애쓴 좌파 정치인들이 커지는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행보는 극우 정권의 출현을 막는 공동의 행보였다. 그리하여 출범한 게 ‘인민전선(Le Front Populaire)’이다. 노선의 차이는 잠시 뒤로 하고 약진하는 극우와 파시스트의 위협 앞에 단결한 것이다. 그만큼 당시 프랑스의 여러 정당과 세력들이 느낀 불안은 컸다. 레옹 블룸(Léon Blum)이 이끈 인민전선은 사회 개혁에 착수해 임금 인상, 주 40시간 노동, 유급 휴가, 여가 활동 신장 등의 성과를 이룩(주-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지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p.652)했는데 이는 최초로 노동기본권을 규정한 바이마르 헌법과 더불어 세계노동사에 길이 남을 발자취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을 극우 세력이 어떻게 보았을까? 불을 보듯 뻔하다.

그들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인민전선 정부는 옆 나라 스페인에서 벌어진 내전에서 공화파를 지원하겠다는 선택을 내리지 못한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Francisco Franco)가 이끄는 쿠데타군을 지원하며 자신들에 우호적인 세력이 스페인의 권력을 잡도록 적극적으로 도왔으나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는 그러지 못했다. 특히 인민전선의 입장에선 만약 스페인 공화파를 도왔다간 나라 경제의 어려움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서 ‘빨갱이’를 지원하는 데 정부가 헛돈을 쓴다는 극우 세력의 공격에 직면할 위험이너무 컸다. 전체주의자들과 싸우는 게 언제나 버거운 인민전선이었다. 결국 스페인 내전에서 진 공화파 인사들이 피레네 산맥 또는 지중해를 건너 프랑스로 피한 뒤에도 인민전선은 그들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

인민전선을 향한 프랑스 극우의 공격은 당시는 물론 지금도 집요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인민전선 정부는 이후 벌어질 2차대전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제법 넓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각인데, 1차대전이 끝난 뒤 전쟁의 트라우마에 따른 염전(厭戰) 사상이 프랑스를 짓누르고 있었으며 여기에 편승한 인민전선 정부가 적극적인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군비 확장에 주 40시간 근무제가 장애물이 되었다는 주장을 담은 논설도 있었다.(주- 김승영 간사이외국어대학 국제공생학부 교수, ‘[역사시론] 1930년대 프랑스가 오늘날 한국에 주는 교훈’, <월간조선> 2025년 3월호 참조)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인민전선 정부 역시 나치 독일의 위협을 매우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었고 군부의 예산 요청에 호응했다. 이는 프랑스에서도 적극적으로 반박되고 있는 ‘가짜뉴스’라 최근에도 이를 다룬 보도나 연구가 이어지고 있는데 2025년 6월 10일《 르 푸앙(Le Point)》에 ‘아니오. 인민전선은 프랑스를 결코 전쟁 전에 무장해제시키지 않았습니다(Non, le Front populaire n’a pas désarmé la France avant la guerre)‘란 이름으로 게재된 기사가 대표적이다. 《르 푸앙(Le Point)》에 따르면 가짜뉴스가 만들어진 건 1940년 패전 직후다. 페탱(Philippe Pétain)과 샤를 모라스(Charles Maurras) 등을 중심으로 인민전선이 프랑스를 약하게 만들었다는 주장이 나왔다는 얘기다. 실상은 반대다. 스페인 내전을 지켜보며 공화국을 방어하고자 하는 현실적 필요를 느꼈다는 점이 분명하다. 군 수뇌부가 4년간 무장에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90억 프랑 예산 요구에 호응한 1936년 7월에 내려진 결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잠깐. 최종적으로 책정된 예산은 90억 프랑이 아니다. 오히려 증액을 했다. 그것도 아주 큰 폭으로. 인민전선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맡고 있던 에두아르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가 예산안에 손을 대 무려 140억 프랑의 금액을 확정했다. 이보다 더 인민전선 정부의 국방에 대한 의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어디 있겠는가.(주- https://www.lepoint.fr/eureka/non-le-front-populaire-n-a-pas-desarme-la-france-avant-la -seconde-guerre-mondiale-10-06-2025-2591658_4706.php)

적어도 지원에 있어 인민전선 정부가 손을 놓은 건 하나도 없었다. 잘못이 있다면 안보를 책임진 군부를 너무 믿었다는 것. 나치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제약을 피해 육군을 재편하고 있음이 확인되어도 총참모부는 여전히 1차대전 당시 참호전의 기억에 사로잡혀 마지노선으로 대표되는 요새 중심의 방어 전략에 집착했다. 이런 프랑스 군부의 판단은 매우 구시대적이었으며 이후 나치 독일의 전격전(Blitzkrieg)에 무기력하게 패배한 결정적 원인이 된다. 인민전선이 져야 할 책임은 이런 군부를 좀 더 조심히 관리하지 못했다는 사실, 하나뿐이다.

극우의 목소리를 내다 : <악시옹 프랑세즈>와 <주 쉬 파르투>

《뤼마니테(L’Humanité)》란 신문이 있다. 오늘날 프랑스 신문들을 논조에 따라 분류할 때 《뤼마니테》는 왼쪽 맨 끝을 차지한다. 이는 《뤼마니테》가 프랑스 공산당(PCF, Parti communiste français) 기관지였던 정체성 때문이다. 소련이나 동독 등 현실 공산주의 패망 이후 이탈리아나 일본 등에서 강력했던 공산당의 활동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으며 프랑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뤼마니테》는 남아 지금도 매우 강경한 논조로 마크롱 정부와 우파들을 비판하는데 이는 과거 프랑스 언론사들이 정치세력의 주장이나 활동을 옹호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1930년대 당시엔 이런 역사적 흐름이 프랑스 파시스트 운동에 기름을 붓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프랑스 극우파들의 성전(聖殿)은 바로 《악시옹 프랑세즈(L’Action Française)》다. 주의할 건 이 단체가 1930년대에 만들어진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역사가 무척 길다. 19세기 말 반유대주의를 중심에 두고 뭉친 《악시옹 프랑세즈》는 왕정 지지, 가톨릭 수호, 자유로운 도시 문화 배격, 전통적 가족 중심 가치 회복 등 프랑스를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 돌리고자 하는 걸 모임의 주된 목표로 삼았다. 그런 활동이 1930년대로 접어들며 반이민정서와 결합해 더욱 폭발적으로 극우 세력을 낳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이들의 활동은 단체 이름과 같은 《악시옹 프랑세즈》란 신문을 통해 세상에 널리 퍼졌다. 1898년 출범 당시에는 격주 발간이었으나 1908년부터는 일간지로 바뀌며 더 활발한 선전이 가능해졌다. 《악시옹 프랑세즈》활동 자체 역시 1930년대가 되자 소속된 청년들이 단체를 처음 만든 샤를 모라스와 같은 명사(名士)들의 노선을 비판하며 더 과격한 운동을 외친 청년들에 의해 극우 운동의 방향성이 더욱 선명해진다. 르네 레몽(René Rémond)의 지적대로 통합적 민족주의의 제자들 대부분이 파시즘으로 빠져든 셈이다.(주- 김민희, <20세기 프랑스 우파의 정치문화 고찰 – 악시옹 프랑세즈의 조직과 활동을 중심으로>, Vol.20, p.133)

이 ‘1930년대의 방향성’은 논조에서도 드러난다. 스페인 내전을 다룬 《악시옹 프랑세즈》보도에서 레옹 도데는 “《르 프티 파리지앵(Le Petit Parisien)》의 특파원이던 앙드레 비올리가 최근 정부군이 바르셀로나에서 자행한 만행을 너무 ‘인민전선’에 유리한 쪽으로 미화 해석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나는 일찍이 앙드레 비올리 여사가 ‘빨갱이(Rouge)’인 줄은 잘 알았지만, 자비로운 성직자와 수녀마저 가리지 않고 신선한 피를 탐할 정도로 그렇게 ‘붉게 달아올라 있는지(Rouge)’는 전혀 몰랐다”라며 몰아세운다.(주- 안 마티유, <스페인 내전 현장을 추적한 종군기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6년 2월호)

'주 쉬 파르투'의 1936년 7월 11일의 만평. 제목의 L’eunuque는 환관(宦官)이란 뜻으로 여기선 인민전선의 지도자 레옹 블룸을 낮추어 가리킨다. 유대인 환관 레옹 블룸이 프랑스를 볼셰비키에 팔아 넘기고 있다는 정치적 선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출처=wikipedia
‘주 쉬 파르투’의 1936년 7월 11일의 만평. 제목의 L’eunuque는 환관(宦官)이란 뜻으로 여기선 인민전선의 지도자 레옹 블룸을 낮추어 가리킨다. 유대인 환관 레옹 블룸이 프랑스를 볼셰비키에 팔아 넘기고 있다는 정치적 선전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출처=wikipedia

《악시옹 프랑세즈》는 후대에도 악명을 떨친 신문에도 영향을 주었으니 바로 《주 쉬 파르투(Je suis partout)》다. 굳이 번역하면 “나는 어디에나 있네”란 뜻이다. 《주 쉬 파르투》는 처음부터 반유대주의를 중심으로 한 극우적 이념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모든 유럽에서 불고 있던 유대볼셰비즘적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는데 유대볼셰비즘이란 반유대주의적 음모론의 일종으로 1917년 러시아 혁명과 소련 수립을 비롯한 국제적 공산주의 운동이 서구를 무너뜨리려는 유대인 국제세력에 의해 계획, 주도되었다는 주장이다. 유대볼셰비즘은 전통적인 반유대주의와 결합해 진보적 흐름과 유대인 모두를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되었는데 《주 쉬 파르투》는 이를 보여준 대표적인 신문인 셈이다.

《주 쉬 파르투》는 한 발 더 나아가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거세게 불던 전체주의가 프랑스에 필요하다는 주장을 폈는데 “우리는 진정한 전체주의인 프랑스의 파시즘으로 다른 나라의 그것을 누를 수 있다(On ne matera le fascisme étranger que par le fascisme français, le seul vrai fascisme).”는 1939년 4월 14일의 논조는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순히 심정적 동조로만 볼 건 아니다.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치 독일이 이끈 폭발적 경제 성장과 사회 분위기 일신은 전후 무기력에 빠져 있던 많은 나라에 큰 충격을 줬다.《주 쉬 파르투》의 주장은 그 맥락 위에 있다. 불황, 실업, 이민자 증가 등 사회 현안에 대처하기 위해선 프랑스의 유구한 역사적 가치(반공화정, 가톨릭)에 기반을 두고 전체주의란 대중 운동을 결합, 사회 분위기를 쇄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층 ,실업청년, 순혈 프랑스주의자들

이렇듯 《악시옹 프랑세즈》와 《주 쉬 파르투》의 활동은 민족주의와 교권주의에 바탕을 둔 우파 이념과 독일, 이탈리아로부터 영향을 받은 전체주의가 결합되어 새로운 언론 지형이 나타났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들은 누구를 목표로 했을까? 전통에 강하게 결합된 보수층, 전쟁과 불황으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청년들, 그리고 유대인이나 이민자가 아닌 ‘순혈 프랑스인’들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믿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에게 말하기 위해서 신문은 활동가를 필요로 했다.

극우로 달려간 사람들 : 활동하고 글을 쓰다

1930년대가 되면 극우 이념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신문 지면에 자주 오르내리게 된다. 19세기 후반부터 지식인의 정치 참여는 이전 시대에도 집필, 기고 등으로 활발히 이뤄졌으나 이 시기 극우 활동가의 활동은 프랑스 사회에 치명적이었다. 상실 정서와 불황 등에 시달리는 청년층에게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파시스트 전선에 가담하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열정적 극우 활동가의 선두를 장식하는 인물은 공산당 활동에 깊이 관여하였으나 입장을 180도 바꿔 대표적 극우 인사로 변신한 자크 도리오(Jacques Doriot)가 있다. 그는 1936년 6월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당을 빼닮은 프랑스 대중당(PPF, Parti populaire français)을 만들어 기존 우파 정당의 구호가 ‘너무 온건하다’고 믿은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그는 나치 독일이 그랬듯 파시스트 경례를 대중당에 도입하여 단체의 효과적인 통일성을 지향했다. 줄리언 잭슨(Julian Jackson)은 대중당의 규모가 통일되어 있진 않았으나 1937년엔 약 7만명 정도가 활동했을 걸 추산하고 있다.(주- Julian Jackson, 《France, The Dark Years : 1940 – 1944》, p.78)

여기에 앞서 말한 《악시옹 프랑세즈》의 활동이, 전통적 극우 이념에서 나아가 파시즘을 옹호하는 이들을 양산했음을 아울러 살펴야 한다. 그 가운데 오늘날까지 악명이 높은 사람이 바로 로베르 브라지약(Robert Brasillach)이다. 브라지약은 당시 관점에서 봐도 골수 파시스트였다. 오죽했으면 《악시옹 프랑세즈》가 새로운 사조를 반영하지 못하고 오래된 우파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이유로 1939년엔 그가 기고하는 것조차 중단시켰다. 《주 쉬 파르투》는 브라지약의 새로운 무대가 되었다. 주도적 편집권을 쥐게 된 브라지약은 신에 대한 믿음을 권장하고 가족을 중시하는 전통적 가치를 옹호함은 물론 유대볼셰비즘에 반대하며 자신만의 파시즘 논리를 서서히 개발해간다. 미국에서 불문학을 연구한 앨리스 캐플란(Alice Kaplan)의 말마따나 브라지약은 프랑스 파시즘에 있어 ‘제임스 딘’과 같은 존재였다.

자본과 정부, 언론의 기능을 마비시키다

앞선 연재를 읽은 경우라면 20세기 프랑스에 이미 다양한 신문이나 잡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궁금한 게 하나 생긴다. 극우 이념을 대변하는 신문들이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오래 전부터 있던 신문들은 무얼 했던 걸까? 답은 간단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은근히 (파시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나 유대인, 외국인들이 사회에서 활동할 장이 없어지길 원했다. 그 이유는 이미 프랑스 언론들이 자본의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부터 문제가 심각했다. 기업과 은행은 특정 신문에 돈을 대며 이윤을 높이거나 부적절한 행위는 가급적 숨기려 했다. 반대로 신문이 불리한 정보를 출하겠고다고 협박해 기업으로부터 돈을 갈취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미 돈이 신문을 지배하고 있었다. 진실이나 심도 있는 분석은 언론이 알 바 아니었다.

1930년대 들어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내용들로만 가득한 《파리 수아르(Paris Soir)》같은 신문들이 가판대를 차지했다. 《파리 수아르》는 1939년 당시 발행부수가 무려 170만 부를 넘겼다. 진지한 정치적 의제가 들어설 언론은 손에 꼽을 지경이 되었다. 이는 편견에 바탕을 둔 외국인 혐오 정서가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지게 만든 배경으로도 작용한다. 재미와 자극을 앞세운 혐오를 팔아 이득을 취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으니.

당시 프랑스 언론의 물적 환경을 들여다보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1930년대 프랑스엔 253개의 일간지가 있었는데, 모두 소유주가 달랐다. 파리에 기반을 둔 국영 신문은 대부분 우익 정치가 및 이익 집단의 통제를 받았다. 이들은 홍보비란 명목으로 막대한 돈을 취했다. 자본가나 기업이 아니면 언론의 채산성을 유지하긴 쉽지 않은 상황 속에 대부분의 지역신문들은 정부 광고에 의존했다. 신문이 돈벌이가 되니 깊이 있는 취재를 위해 특파원을 활발히 다른 나라에 보내는 일 따위는 꿈꿀 수도 없었다. 국제뉴스는 정부가 통제하는 국영 통신사를 통해 배포되어 천편일률적인 기사가 거의 모든 언론을 장식했다. 여기다 검열도 강력히 유지됐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언론의 질을 평가할 때 중요한 척도로 삼는 권력 견제, 사회 비판, 현장 중시 등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이루기가 힘들었던 1930년대 프랑스였던 것이다.

대혁명의 열매 든 채 위기에 처한 조국은 저버리다

나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는가? 아니다. 원칙적으로 말이다. 모든 시민에 주권이 있으며 누구라도 자유롭게 의사를 개진하고 글을 쓸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선 기본적으로 각자의 소신은 존중되어야 맞다. 하지만 이는 민주주의 국가의 틀을 지킨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내가 상대방이 가진 생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해코지를 하면 안 되듯이, 상대방 또한 나를 다르다는 까닭으로 핍박하는 건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나 1930년대 프랑스의 극우와 이에 동조한 신문과 잡지들은 1789년 대혁명의 유산인 언론자유를 자신들의 세력 전파에 이용하면서 사회주의자, 프리메이슨, 유대인, 외국인은 프랑스에서 배제해 오직 순수 혈통의 프랑스 사람들만 자유를 만끽할 수 있게 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철저한 이율배반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겐 기회가 있었다. 아무리 전체주의에 동조해도 조국, 가족이 중요하다고 외친만큼 적이 프랑스를 짓밟았을 때 이에 맞서 분연히 일어났다면 그들의 활동이 우국충정(憂國衷情)에서 비롯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역사는 이들이 앞선 이율배반보다 더 큰 반역을 저질렀음을 기록하게 된다.

글쓴이

추성목 칼럼니스트

필자인 추성목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스스로를 듣고 읽고 쓰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중국어를 전공하고 졸업 후 취업했다. 하지만 언젠가 한 번은 프랑스어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마음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프랑스언어문화학과에 입학해 ‘제2의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비시 체제와 레지스탕스, 쇼아를 공부하며 글을 쓰고 싶다는 목표. 또 중국과 중앙유라시아, 중동 등 지역을 다룬 프랑스어권의 저서나 자료들을 번역해 소개하겠다는 목표. 이 둘을 마음에 지니며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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