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언론, 어떻게 과거를 청산했나
[비시 체제: 협력과 부역의 일대기] 과거를 딛고 선 프랑스 언론 ① 제국주의·반유대주의에 빠졌던 언론 드레퓌스 사건은 시대의 희생양 정부, 정교분리법 제정 재발 방지 ‘강수’
그림자: 제국주의와 반유대주의 사이
①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는 죄가 없다.
1898년 에밀 졸라(Émile Zola)의 호소가 통할 수 있었던 건 다뤄줄 언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문 <여명(L’Aurore)>이 아니었다면 반(反)드레퓌스파의 목소리만 일방적으로 공론의 장에 울려 퍼졌을 것이다. 드레퓌스가 어쨌든 사면을 받고, 끝내 무죄를 확인해 군에 복직할 수 있었던 건 제대로 된 여론을 만들 수 있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①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프랑스 언론의 모습이다.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그런데,
② 이 사진을 보자.

제1차 세계대전(World War Ⅰ, 불어로 La Grande Guerre)때 한 프랑스 잡지에 실린 삽화란다. 존 엘리스(John Ellis)가 쓴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Eye Deep in Hell : Trench Warfare in World War)》에도 나오는 삽화인데, 처음 봤을 때 언론이 이렇게 전쟁을 잘못 그릴 수, 아니 날조할 수 있는가 분노했다.
왼쪽의 참호 맨 앞에 있는 병사들만 입사호 자세로 전방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그마저도 일부는 앉아서 담배를 피거나 수다로 시간을 보낸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향하면 점입가경이다. 당구를 치거나, 펜싱을 하거나, 심지어 나무로 된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까지 한다. 사실일까.
전혀 아니다. 이게 거짓이라는 건 제1차 세계대전이란 말로 인터넷에 검색하면 5초도 지나지 않아 알 수 있다. 정말로 이랬다면 왜 참전용사들이 포탄 충격과 전염병, 쥐떼 그리고 참호족(발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축축하고, 비위생적이며 차가운 상태에 노출함으로써 일어나는 질병- 편집자주)에 시달렸겠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언론의 얼굴
적잖이 당혹스럽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언론, 특히 신문의 모습은 “민주주의 사회의 필수 덕목인 자유로운 언론의 위상을 지키며 자율성을 확보한”(주-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지음,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지성공간(2017), p.336에서 인용) 명실상부한 정론지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위험한 전장으로 달려가 참상을 낱낱이 알리고 국가의 부당한 권력 행사에 대해선 앞장서 비판하는, 언론인이라면 누구나 이상으로 삼을 목표를 추구하는 게 프랑스의 신문이다. 근데 ②와 같은 사례도 있었단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①은 무얼까? 어느 쪽이 프랑스 언론의 진짜 모습일까.
둘 다 정답이다. 둘 다 ‘정답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해 ②와 같은 보도나 태도를 점차 줄여 ①을 목표로 삼고 지금도 노력하는 게 ‘오늘날 프랑스 언론의 진정한 얼굴’이라 본다.
언론은 사회의 거울이다. 프랑스 언론 역시 프랑스인들이 추구하는 가치나 목표, 이상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거나 없앴다. 가톨릭이나 군, 관료, 기타 엘리트 혹은 극우 운동가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담아 사회를 흐리기도 한 언론. 반유대주의와 반외국인 정서를 외치며 프랑스 혁명의 산물인 인권선언과 반대되는 가치를 외친 언론.
전쟁의 참혹함을 감추면서까지 국민들의 애국심을 부채질했으나 정작 나치 독일이 6주 만에 프랑스를 무릎 꿇렸을 땐 비시 체제와 점령자들의 나팔수 노릇을 한 언론. 이 모두가 프랑스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여기서 멈추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 반민주, 반혁명에 맞서 공화국의 가치를 수호한 언론인들이 있었고 지식인들은 이런 신문에 칼럼을 쓰며 돈과 권력에 맞섰다. 나치와 비시 체제의 압제에 맞서 지하에서 ‘레지스탕스 신문’을 발간하기도 했으며 1950년대 베트남과 알제리를 상대로 한 전쟁으로 정부가 검열을 강화하자 이에 맞서며 진실과 민주를 추구하는 일이 국익과 전혀 배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프랑스 언론의 바람직한 모습은 (언론에 특히 엄격했던) 과거사 청산과 지식인, 그리고 언론인과 출판인들의 투쟁으로 얻어낸 자랑스러운 성취에 가깝다.
돈과 권력 앞에 선 언론
이번 글부터 몇 차례에 걸쳐 제2제정(1852~1870년) 붕괴 이후 제3공화국(1870~1940년), 제1차 세계대전과 전간기(戰間期), 또 독일강점기와 비시 체제와 그 청산에 걸쳐 프랑스 언론 안에 있던 부끄러운 모습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 모두를 보여주려고 한다. 물론 당시 모든 언론이 그랬다거나 하는 건 아니다. 식민주의에 맞선 언론도 있었고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며 이성에 호소한 지식인과 작가들도 많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따로 다룰 것이다. 그리하여 부정적 모습을 딛고 바람직한 언론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한 프랑스 사회의 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사회에 언론의 바람직한 역할에 대해 많은 말이 오가고 있다. 언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더 많이 언론을 보고, 읽고, 생각하며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외면으론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체제나 사회, 돈과 권력이 휘두르는 칼에도 언론의 길을 모색한 프랑스의 역사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주리라 믿는다.
신문, 잡지를 비롯한 대중매체의 발전엔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이 반드시 필요한 토양이다. 프랑스엔 제2제정 시기가 그랬다. 영국과 함께 산업혁명의 대표주자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거느리고 있다는 자부심은 프랑스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이를 송두리째 뒤흔든 나라는 프로이센이었다.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프로이센을 두고 볼 수 없었던 프랑스는 1870년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놀랍게도 처참히 패배한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군에 포로로 잡혔고 제2제정은 무너졌다. 포위를 견디지 못한 파리는 굴복했다. 프랑스인들은 조국의 화려함을 상징하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프로이센이 주도한 독일 제국이 선포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이에 반발하며 봉기한 파리 코뮌을 짓밟으며 탄생한 제3공화국은 이렇듯 그 시작부터 패배와 열등감으로 몸조차 가누기 힘든 상태였다.
독일 제국의 성장으로 상처 받은 프랑스를 달랠 수 있는 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무대로 한 식민지 개척과 제국주의였다. 유럽에서 단기간에 독일을 꺾을 수 없다면 위대한 조국은 식민지 확보를 통해 제국주의 열강의 지위를 유지하는 걸로 자존심을 지켜야 했다. 더욱이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가 실각하기 전까지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태이기도 했다. 적지 않은 신문들이 이런 정부의 움직임 또는 필요에 호응했다. 언론은 강대국으로서의 프랑스가 식민지를 얻는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해 시민들에게 ‘자랑스러운 조국의 행보’를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제국주의와 반유대주의를 옹호한 언론
여기엔 제국주의 시기 열강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명 대(對) 야만’의 도식 또한 활용됐다. 식민지라는 아픈 역사를 겪은 우리가 더 비판해야 할 지점이다. 예를 들어 《르 콩스티튀시오넬(Le Constitutionnel)》이란 잡지는 1830년에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얻은 알제리를 두고 “알제리 점령은 세계 문명의 신기원을 여는 출발점”(심재중, 「아프리카와 흑인의 이미지 : 18 -19세기 프랑스를 중심으로」, 『불어문화권연구』, 20호(2010), p.121 – 122에서 인용)이란 표현을 썼다.
프랑스인들의 제국주의적 감정에 불을 지핀 것이다. 이는 프랑스 혁명이 내세운 자유, 평등, 박애(형제애)의 가치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말이다. 하지만 혁명의 대의보단 ‘위대한 프랑스’란 구호가 사람들에게 더 잘 팔렸다. 미개한 식민지를 우월한 프랑스가 이끌어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은 신문을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퍼졌고 ‘제국주의 프랑스’의 이미지가 굳어졌다.
여기에 더해 당시 언론은 반유대주의를 널리 알리며 유대인 혐오를 부추겼다. 드레퓌스 사건 초기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 힘을 받지 못했던 건 ‘유대인이 죄를 저지른 게 본질이다. 그를 단죄하는 게 무엇이 문제냐’라고 말하며 여론을 움직인 친(親)가톨릭, 친군부 언론들의 역할이 컸다.

무죄, 그리고 정교분리법 제정
당장 에밀 졸라의 글이 <여명>에 실리고 난 며칠 뒤(1898년 2월 1일) 작가 모리스 바레스(Maurice Barrès)는 다른 언론을 통해 “이른바 지식인이라 불리는 명단은 대부분 멍청이 아니면 외국인 그리고 일부 선량한 프랑스인들로 이뤄져 있다”(장-프랑수아 시리넬리·파스칼 오리 지음, 한택수 옮김, 《지식인의 탄생-드레퓌스에서 현대까지》, 당대(2005), p.7)며 원색적인 비난을 드레퓌스파를 향해 쏟아냈다.
에밀 졸라, 나아가 <여명>에 뜻을 같이 하는 신문이나 잡지가 반드레퓌스파에 찬성하는 언론들보다 훨씬 더 많았다면 프랑스가 겪었던 혼란은 좀 더 빨리 수습됐을 거란 생각이 (역사엔 가정은 없으나) 드는 지점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프랑스 전역, 나아가 유럽을 뒤흔든 거대한 돌풍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사건의 진상을 외면한 프랑스 정부나 기득권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 하지만 이를 방조하거나 확대 생산한 언론의 책임도 결코 작게 다룰 수 없는 이유다.
드레퓌스는 무죄를 받았다, 다행히. 가톨릭, 군 수뇌부 등으로 엄청난 홍역을 치른 프랑스는 1905년 정교분리법을 제정해 국가의 행정 및 운영에 있어 종교가 개입하지 않도록 법제화하는 강수를 둔다. 종교 혹은 수구적 이념이 사회의 진보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식민주의 프랑스, 제국주의 프랑스. 이를 찬양하며 증오와 혐오를 생산하는 언론의 표현 방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았고 제1차 세계대전은 예의 공격적인 애국주의와 우익 민족주의에 기름을 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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