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프랑스 ‘비시 체제’에 관심이 쏠릴까
[비시 체제: 협력과 부역의 일대기] ‘외국인 레지스탕스’ 추앙하는 프랑스 프랑스 공화국 위해 ‘세계시민’으로 싸워 반면, 프랑스인들은 비시 체제에 순응해 청산하지 못한 과거...다시 나서는 프랑스
지난 2월 파리 팡테옹에 열린 이장식
2024년 2월 21일. 프랑스 파리, 팡테옹(Le Panthéon; 프랑스 파리에 있는 위인들의 묘소). 조금씩 비가 내리는 가운데 팡테옹 앞 대로엔 하얀 카펫이 깔렸다. 살아남아 계속 존재한다는 말, ‘Survivre’란 단어가 써져 있는 관 두 개가 카펫 위에 놓였다. 팡테옹 안은 물론 밖에도 사람들로 가득하다.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대통령도 아내 브리지트 마크롱(Brigitte Macron) 여사와 함께 왔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질 때 음악이 울린다. 비가 그친 파리의 저녁 하늘을 가르는 소리. 두둑(duduk)의 소리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곧잘 연주하는 악기. 구슬프다. 왜 프랑스 한복판에서 아르메니아의 음악이 울리는 걸까. 의문은 사회자의 다음 말로 인해 풀렸다.
“1944년 2월 21일 오후 1시. 감옥에 갇힌 미사크 마누시앙(Missak Manouchian)은 아내 멜리네 마누시앙(Mélinée Manouchian)에게 편지를 썼다.”
프랑스 사람들이 ‘선택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프랑스 위인들의 전당인 팡테옹에 모시기까지 걸린 시간, 80년.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피해 고향을 등진 후 프랑스에서 노동자로 살았으며, 나치 독일과 비시 체제(Le régime de Vichy)에 맞서다 체포된 미사크 마누시앙은 정확히 80년 전 이날, 몽발레리엥(Mont-Valérien)에서 처형됐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대를 증언하다 세상을 떠난 아내 멜리네와 함께 팡테옹에 새로운 영혼의 안식처를 갖게 된 것이다. 부부가 진정한 용기를 엄혹한 시대에 보여줬다는 프랑스 사람들의 찬사를 들으며.
프랑스는 역사 청산에 성공했을까
보통 우리나라에선 이렇게 말한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6주 만에 프랑스를 무릎 꿇렸지만 레지스탕스(La Résistance)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국민들은 침략자에 저항했으며 그 노력으로 다시 나라를 되찾아 부역자들을 청산해 새로운 나라를 열 수 있었다고. 프랑스는 과거사 청산에 성공했다는 주장이다.
1970년대 이전 프랑스에서 ‘받아들여진’ 기억 역시 같았다. 드골(Charles de Gaulle)이 얘기한 것처럼 나치와 ‘한 줌 밖에 지나지 않는’ 부역자들에 맞서 프랑스 국민들은 레지스탕스를 지원하고 응원하며 긍지 어린 역사를 지니게 됐다는 입장은 제5공화국의 공식적인 선전이었다. 이른바 레지스탕스 신화다. 레지스탕스 단체들끼리 연합을 돕다가 게슈타포(Gestapo)에 잡혀 목숨을 잃은 장 물랭(Jean Moulin)의 유해를 대대적으로 중계하며 팡테옹으로 이장(1964년)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직접 겪은 4년의 시간(1940~1944년)은 결코 저항으로 가득하지 않았다는 점을.
비시 체제는 프랑스가, 나아가 프랑스인들이(모든 경우에 그랬던 건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협력(La Collaboration)’이라 봐야 옳다. 물론 소련과의 전쟁에서 불리해진 나치가 프랑스에 대한 수탈을 한층 강화한 1942년부터는 상황이 달라진다. 하지만 그전까진 프랑스에선 비시 체제를 이끈 페텡(Philippe Pétain) 수반을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추켜세우는 등 대독협력에 긍정적인 여론이 상당수였다.
비시 정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전국에 뿌려진 포스터, 페탱의 흉상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1940년에서 1941년까지 승전을 이어간 나치 덕분에 프랑스에서 군수 산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가 좋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레지스탕스에 뛰어든 외국인들...이들은 왜?
이런 상황 속에도 스페인, 폴란드, 또 아르메니아 같은 외국에서 온 사람들은 왜 프랑스를 위해 나치 독일에 맞서 총을 잡은 것일까. 심지어 이들은 1940년 5월에서 6월까지 독일과의 짧은 전쟁에도 나선 경우가 많았는데 역사학가 드니 페샹스키(Denis Péschanski)는 여기에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전체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대한 반발, 떠나온 조국에 대한 충성(특히 폴란드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이들에게)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고향을 급히 등질 수밖에 없었던 자신들을 맞아 준 ‘선택한 조국’, 프랑스에 대한 마음이었다.
앞서 얘기한 마누시앙 부부도 여기에 속했다. 미사크 마누시앙은 1924년 그의 형과 함께 ‘종이 없는 사람(sans-papier)’, 다시 말해 무국적자로 프랑스에 들어왔다. 마누시앙의 부모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오스만 제국을 이끌던 청년 투르크당은 1915년부터 아나톨리아 동쪽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을 상대로 집중적인 학살을 벌였다. 피해 규모는 주장마다 다르지만 약 100만 명 정도.
바로 이때 마누시앙 형제는 부모를 잃게 된 것이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은 학살을 피하려면 가까운 러시아나, 혹은 멀리 프랑스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었다. 아르메니아만이 아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패배한 공화파 인사들이 몸을 피한 곳도 프랑스였다. 프랑스 정부가 공화파 인사들을 받아들이는 일에 결코 적극적이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스페인과 마주한 프랑스 ‘사회’는 이들을 부둥켜안고 살아갔다.
프랑코와 개인적 친분이 깊던 페탱이 수반으로 있는 비시 체제가 들어서자 스페인 공화파들의 처지는 더 나빠진다. 잡히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수감됐으며 ‘심지어’ 유대인이라면 트레블린카(Treblinka), 헤움노(Chełmno) 등 절멸수용소(絶滅收容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헤움노 강제 수용소, 베우제트 강제 수용소, 르브린 강제 수용소, 소비보르 강제 수용소, 트레블링카 강제 수용소 등 6개의 강제 수용소를 가리킨다. 대량학살을 목적으로 둔, 나치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설립한 강제 수용소의 일종-편집자주)로 보내져 죽음을 맞았다. 가뜩이나 위험한 레지스탕스 활동, 외국인이라면 몇 겹의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많은 외국인들이 프랑스를 위해 무기를 들고 나치 독일, 또 비시 체제와 싸웠다. 설사 프랑스인들에게 받은 차별이 어떠했더라도 프랑스는 자신들을 ‘받아준’ 나라였다. 이들은 프랑스가 보여준 모습이 ‘자유(Liberté), 평등(Égalité), 박애(Fraternité)’라는 공화국의 이상에서 나왔다고 믿었다. 전체주의에 맞서 공화국을 지키는 건 프랑스 국민들만의 몫이 아닌 ‘세계 시민’으로서 마땅히 나서야 할 싸움이라 믿었으리라. 모진 고문과 죽음이 예정되어 있더라도.

68혁명이후 참회하는 프랑스
프랑스 68혁명 이후 프랑스는 자신들을 지배하던 레지스탕스 신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과거사와 마주하기 시작했다. 학술과 문화를 통해 마누시앙을 비롯한 외국인 레지스탕스의 활동이 다시 조명된 것도 이때다. 1944년 마누시앙이 이끈 저항조직을 체포한 나치는 이른바 ‘붉은 포스터L(’affiche rouge)‘를 배포해 “프랑스의 적은 이들”이라고 선전했는데 후에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이 <붉은 포스터>란 시를 써 마누시앙을 기렸다.
나아가 레오 페레(Léo Ferré)는 여기에 곡을 붙여 마누시앙이란 영웅을 널리 알렸다. 먼저 배우자를 떠나보낸 멜리네 마누시앙도 신문, 방송과의 인터뷰로 남편의 저항활동을 증언했고, 드니 페샹스키는 외국인 레지스탕스들에 대한 정당한 대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주장했다. 글 앞에서 말한 마누시앙 부부 유해의 팡테옹 이장은 오랜 세월 이어진 노력의 결실이라 봐야 한다.
필자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지만, 실은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다. 회사원이 되고서는 프랑스어를 배우게 됐다. 다양한 나라의 역사를 배우는 걸 좋아해 프랑스어로 된 단행본이나 논문, 보도들을 접할 때마다 힘들지만 새로 공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시 체제를 만난 게 바로 이때다.
처음부터 비시 체제를 흥미롭게 본 건 아니었다. 작년에 세상을 떠난 고(故) 서경식 선생이 쓴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창비, 2006)를 읽은 뒤 쇼아La Shoah(흔히 홀로코스트 Holocaust)라 말하는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을 살피며 우연히 비시 체제의 역사를 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시나브로 비시 체제의 역사가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아마존에서 비시 체제와 콜라보(Les Collabos, ‘협력자’를 뜻하는 Les Collaborateurs의 줄임말)를 다룬 책들을 읽었고 우리말은 물론 영어로 된 자료들도 틈틈이 찾았다.
왜 나라마다 ‘비시 체제’ 같은 게 있을까
우리 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청산에 실패했다’는 아픈 기억으로 프랑스 과거사에 대한 국내 연구는 대부분 2차 대전이 끝난 뒤 프랑스 정부의 과거사 청산에 집중이 되어 있었지만, 필자는 비시 체제 ‘그 자체’에 더 호기심이 생겼다. 왜일까. 그 안엔 평소 사회 곳곳에서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란 생각을 품으며 마주친 일들이 모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이 유럽을 차지하면 프랑스가 그 뒤를 이어 2인자로 영향력을 공고히 할 수 있다고 믿은 극우 사상가와 문학가들. 사회가 불안한 건 외국인(유대인도 당연히 여기에 들어간다), 그리고 문제되는 이념을 가진 이들이라 선전한 정치인들. 전쟁에서 못 싸운 자신들은 생각하지 않고 사회주의 정부가 일을 그르쳤다고 우기며 어떻게든 무능을 감추기에 혈안이 된 군부. 프랑스를 바로 세우겠다는 명분으로 ‘내부의 적’을 잡아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민병대(밀리스La Milice)를 꾸린 사람들. 좋은 학교를 나와 프랑스 공화국(La République française)에서 엘리트로 대우를 받았으나 금세 공화국의 가치를 저버리고 노동(Travail), 가족(Famille), 조국(Patrie)을 내건 프랑스 국가(L’État français; 비시 체제가 제3공화국 헌법을 버리고 세운 정부가 내건 국호)에 헌신한 관료들.
심지어 이들 중 적지 않은 수는 프랑스가 해방(1944년)된 이후에도 청산을 피하거나 사면을 받는 방식으로 공화국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1960년대 초반까지 프랑스를 갈등의 소용돌이에 몰아넣은 식민지 수호 및 이주민 탄압에 군부를 포함한 그들이 앞에 나선 건 물론이다.
이런 비시 체제의 역사를 보며 우리 사회의 모습이 자꾸 겹쳤다. 그래서 생각했다. ‘비시’란 역사를 공부해 글로 남길 수 있다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부조리를 제대로 마주할 자세를 기를 수 있다고 말이다. 난 현대사를 전공한 연구자는 아니며 직장인으로서의 삶도 이어가야 한다. 그럼에도 관심을 끊지 않고 공부를 이어간다면 적어도 현실을 핑계로 정의롭지 못한 다수를 거부할 용기를 키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오늘도 비시 체제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다시 역사 청산의 길을 나서는 프랑스
마누시앙 부부 유해의 팡테옹 이장을 지켜본 지난 2월의 기억을 떠올리며 글을 마무리하던 지난 23일, 마크롱 대통령은 중세 프랑스 연구에 큰 성과를 거둔 학자이자 나치 독일에 맞서 싸운 용기 있는 레지스탕스,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의 유해를 팡테옹으로 이장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상한 패배(L’étrange défaite)》를 통해 프랑스가 왜 나치 독일에 허무하게 패배했는가를 비판했던 그다. 이렇게 프랑스 과거사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한 명이 프랑스 위인들의 전당에 입성하게 됐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과거사를 돌아보는 프랑스의 모습을 어떻게 봐야 될까? 비시 체제에 관심을 갖게 된 이후 지켜본 결과, 프랑스는 ‘공화국의 이름’으로 내린 역사의 해석에선 결코 후퇴하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다. 미완의 청산, 비시 체제 출신 인사들의 활용, 패전에 책임이 있는 군부가 식민지를 내세워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 했던 지난 역사가 프랑스엔 있었다.
프랑스 극우가 위세를 불릴 수 있는 건 적지 않은 프랑스 국민들이 외국인들이 프랑스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생각하며, 공화국 지지자들이 지방을 차별하는 방식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 했다는 논리가 그들 사이에선 팽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공화국의 이름으로 한 발 나아간 역사의 해석에서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대통령이 나서지 않으면 정부가,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시민들이 공화국의 역사를 지킨다.
지난 프랑스 총선은 극우의 집권 위험에서 정파를 가리지 않고 힘을 합한다는 현대 프랑스의 오랜 전통이 다시 발휘된 결과였다. 이런 프랑스 사회의 용기를 볼 때마다 비시 체제를 공부하기로 결심했던 판단이 절대 틀리지 않았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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