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사태… 그리고 ‘그때 그 사람’

[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궁정동 안가에 참석했던 심수봉 ‘그때 그사람’ 노래 좋아했던 박정희 김재규 “민주주의 수호 위해 시해” 심수봉, 나훈아와 인연 뒤늦게 공개 박정희 연상 ‘무궁화’ 금지곡 당해

10.26 사태 현장 검증하는 김재규.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했다.
10.26 사태 현장 검증하는 김재규. 그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을 암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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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5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울린 한 발의 총성이 역사를 바꿨다. 만찬장이던 나동 안방에는 당시 유신정권을 이끌고 있는 수뇌부가 집결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그들이다.

안방과 마루를 사이에 둔 경호원 대기실에는 경호처장 정인형, 경호부처장 안재송과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가, 밖의 제미니 승용차에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 대령이 대기했다. 50m 떨어진 본관 1층 회의실에서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김재규를 대신한 김정섭 중앙정보부 차장보와 식사를 하고 있었다.

‘탕!’ 역사를 바꾼 궁정동의 총성

연회가 시작된 지 한 시간쯤 지나 김재규는 옆 건물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정승화에게 갔다. 김재규는 정승화에게 “대통령과의 식사가 곧 끝나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김재규는 2층 집무실에서 권총을 꺼내 온 뒤, 박선호와 박흥주를 불러 엄청난 얘기를 꺼냈다.

“시국이 위험하다. 나라가 잘못되면 우리도 다 죽는다. 오늘 저녁 해치우겠다. 방 안에서 총소리가 나면 너희들은 경호원을 제압하라. 불응하면 발포해도 좋다.” 둘이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과 우리 2차장보도 와 있다”면서 “각오는 되어 있느냐”고 되물었다. 박선호가 얼떨결에 “각하까지입니까?”라고 묻자 김재규는 “응” 하고 대답했다.

박선호가 “경호원이 7명(사실은 4명)이나 되는데, 다음 기회로 미루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묻자 김재규는 “오늘 하지 않으면 보안이 누설된다. 똑똑한 놈 세 명만 골라서 나를 지원하라. 다 해치운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박선호는 30분만 여유를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궁정동 안가의 술자리는 왠지 분위기가 다른 날과 달랐다. 술상 위에는 여러 가지 안주와 함께 박정희가 즐기는 양주 ‘시바스 리갈’ 몇 병이 놓여 있었다. 이 자리에서 정치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명당한 김영삼의 이야기가 나오자 박정희는 “김영삼을 구속기소했어야 하는데 마음 약한 유혁인 정무수석이 말려서 그만 두었더니 후유증이 더 크다”며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누군가가 분위기를 좀 풀어보라며 가수 심수봉에게 노래를 시켰다. 그녀는 기타를 치며 자신의 히트곡 ‘그때 그 사람’을 부르기 시작했다.

1978년 대학가요제에서 입상하지 못했던 ‘그때 그 사람’은 곧바로 KBS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KBS 영상.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

그 어느 날 차안에서 내게 물었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뭐냐고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고

위로하며 다정했던 사랑한 사람

안녕이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지금은 어디에서 행복할까

어쩌다 한 번쯤은 생각해줄까

지금도 보고 싶은 그때 그 사람

좌중에 술잔이 몇 순배 돌았다. 이어서 차지철이 답가를 불렀고 차지철의 지명으로 그 다음은 모델로 활동하던 대학생 신재순 차례가 되었다.

신재순은 심수봉의 기타 반주에 맞춰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당신이 내 곁을 떠나간 뒤에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오⋯’ 노래를 시작했다. 박정희도 애상에 잠겨 후렴구인 ‘예이예이예이 예예예예 예예~’를 나지막이 따라 불렀다.

이 순간 김재규가 오른손으로 옆에 앉은 김계원의 허벅지를 툭 쳤다. 그리고는 오른쪽 바지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뽑아 차지철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과 함께 차지철이 “김 부장, 왜 이래!”라고 소리치며 팔을 움켜쥐고 일어났다. “경호원, 경호원!” 경호원을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뭣들 하는 거야!” 박정희의 노기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김재규는 일어서면서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말하며 정좌한 채 눈을 감은 박정희에게 총을 쐈다. “내가 잘 했는지 못 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라며 자신있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말했던 박정희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연회장에서 김재규가 첫 발을 쏘았을 때 경호처장 정인형과 부처장 안재송은 박선호와 대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해병대 동기인 정인형과 박선호는 휴가를 같이 가는 둘도 없는 친한 친구였다.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박선호는 총소리와 함께 먼저 총을 꺼내들었다.

박선호는 “꼼짝 마!”라고 소리치며 정인형에게 “우리 같이 살자”고 애원조로 말했다. 국가대표 사격선수 출신으로 속사에 능한 안재송이 총을 뽑으려 하자 박선호의 총이 불을 뿜었고, 정인형도 총을 뽑으려 하자 박선호의 총이 다시 친구를 쓰러뜨렸다.

같은 시각, 총이 고장 나 뛰어나온 김재규는 박선호로부터 방금 친구를 쏜 38구경 리볼버 5연발 권총을 낚아채고 돌아와 차지철을 쏜 뒤 쓰러진 박 대통령의 머리 50cm까지 총구를 들이대고 ‘야수의 심정’으로 마지막 방아쇠를 당겼다.

고독감을 달래는 듯한 박정희 대통령.
고독감을 달래는 듯한 박정희 대통령.

“‘그때 그 사람’ 주인공은 나훈아”

‘그때 그 사람’은 가수 심수봉에게 영광과 좌절을 동시에 안겨준 영욕의 노래다.

1978년 제2회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한 당시 명지대 3학년 심수봉(본명 심민경)은 자신이 직접 작곡・작사한 ‘그때 그 사람’으로 무대에 올라 배철수(활주로), 노사연, 임백천 등 쟁쟁한 참가자들과 경쟁했다.

포크송과 록 음악이 대세였던 당시 대학가요제에서 창작 트로트 곡으로 출전한 여대생 가수의 첫 등장은 가요제 관객과 이를 TV로 지켜보던 시청자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직접 연주한 경쾌한 피아노 반주에 맞물린 애절한 노래는 청중의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는, 전혀 다른 감각의 창작 트로트였다. 관객들의 반응에 심수봉은 내심 좋은 성적을 기대했으나 “가창력은 돋보였지만 곡의 리듬이 대학가요제의 순수한 성격에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수상에는 실패했다.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은 대학가요제에서 입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대상 수상곡 ‘밀려오는 파도소리에’(부산대 중창단 ‘썰물’)나 금상을 받은 노사연(단국대)의 ‘돌고 돌아가는 길’, 은상을 받은 배철수가 속한 활주로(항공대)의 ‘탈춤’보다 더 떴다. ‘그때 그 사람’은 이듬해인 1979년 최고의 히트곡으로 떠오르면서 각종 가요 순위를 석권했다.

심수봉은 올해 6월 6일 방송된 tvN STORY ‘지금, 이 순간’에 출연해 “‘그때 그 사람’ 속 ‘그 사람’의 주인공이 나훈아였다”라고 최초로 고백했다. 심수봉은 나훈아 선배가 자신이 입원한 병실에 찾아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줬다면서 ‘그때 그 사람’ 가사에도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고’라는 대목이 등장한다고 말했다.

심수봉의 대통령 술자리 동석은 10・26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는 1975년에 처음으로 대통령 연회에 초대받아 박정희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후 심수봉은 몇 차례 더 대통령 연회에 초청을 받게 된다. 그러다가 ‘그때 그 사람’이 빅 히트한 이후인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연회장에 초청되어 노래를 부르다가 10・26 사태에 휘말리게 된다.

심수봉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본부장인 합동수사본부의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방송금지 조치를 당하고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등 갖은 핍박을 당해야만 했다.

심수봉, 고난의 삶 딛고 날개를 펴다

10․26사태 이후 견디기 힘든 고난의 시간을 보낸 심수봉은 1984년 방송활동 금지가 풀리면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히트시키며 다시 재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5년 발표한 ‘무궁화’라는 곡도 크게 히트했지만 방송 하루 만에 금지 조치를 당했다.

심수봉은 과거 한 방송에 출연해 ‘무궁화’가 금지곡이 된 이유에 대해 “참모급 인사가 직접 방송국으로 달려왔다. 노래가 한 번 나갔을 뿐인데 ‘포기하면 안 된다’, ‘눈물 없인 피지 않는다’가 대중을 선동하는 노래라는 말이었다. 그 때는 예민했을 시기라 선동하는 가사로 생각했던 것 같다. 방송·공연 윤리위원회에 다 통과된 곡인데도 불구하고 알아서 쉬쉬했다. 그래서 또 금지곡이 됐다”라고 털어놨다. ‘무궁화’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이 몸이 죽어 한줌의 흙이 되어도

하늘이여 보살펴 주소서 내 아이를 지켜주소서

세월은 흐르고 아이가 자라서

조국을 물어오거든

강인한 꽃 밝고 맑은 무궁화를 보여주렴

무궁화꽃이 피는 건 이 말을 전하려 핀단다

참으면 이긴다 목숨을 버리면 얻는다

내일은 등불이 된다 무궁화가 핀단다

날지도 못하는 새야 무엇을 보았니

인간의 영화가 덧없다 머물지 말고 날아라

조국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하늘에 산화한 저 넋이여

몸은 비록 묻혔으나 나라를 위해 눈을 못 감고

무궁화꽃으로 피었네 이 말을 전하려 피었네

포기하면 안 된다 눈물 없인 피지 않는다

의지다 하면 된다 나의 뒤를 부탁한다

심수봉의 ‘무궁화’

이 노래는 한때 세간에서 박정희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라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심수봉은 2009년 자신의 데뷔 30주년 기념공연에 당시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근혜를 초청한 일이 있다. 이 노래는 과거 ‘박근혜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태극기 집회에서 많이 불리는 노래이기도 했다.

10․26사태 후 파란으로 점철된 삶의 여정 때문인지 그녀의 노래들은 애간장을 녹이는 애절함이 뚝뚝 묻어난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사랑밖에 난 몰라’, ‘비나리’, ‘미워요’, ‘백만송이 장미’ 등 발표하는 노래마다 히트하면서 심수봉은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10․26 사태에 휘말려 굴곡진 삶을 살아 온 심수봉, 이제 ‘꽃길’만 걷기를…

글쓴이

이영훈 가요연구가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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