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것’ 김민기, 그의 삶 그의 노래
[이영훈의 ‘노래가 품은 역사’] 천재음악가 김민기 요약 정리 누나가 사준 클래식 기타로 시작 노동자들 만나 민중의 삶 끌어안고 군에서 만난 퇴역군인에게 노래 헌사 노래로 세상을 바꾼 위대한 뮤지션
지난 3월 대학로 소극장 문화를 이끌어온 ‘학전’이 문을 닫은데 이어, 최근 ‘SBS 스페셜-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3부작이 방송되면서 천재 뮤지션 김민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 송창식, 조영남, 박학기, 나윤선, 장필순, 강산에, 윤도현, 정재일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음악가들과 ‘도비두’ 김영세, ‘노찾사’ 김창남, 임진택, 이상우, 채희완 등 김민기의 지인, 더불어 노동현장에서 김민기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이들이 카메라 앞에 나서 ‘음악가 김민기’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김민기는 평소 자신을 ‘뒷것’이라고 말한다. 학전에서 공연하는 배우나 가수들에게 “나는 뒷것이야. 너희들은 Player 앞것이고, 나는 Staff 뒷것이야”라며 스스로를 낮춘다. 그러나 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앞것’보다 더 빛나고 아름다운 ‘뒷것’이 아닐까. ‘학전’ 폐관과 암 투병, 생의 고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김민기의 삶과 노래를 한번 조명해 보자.
북한군에게 피살된 김민기 부친
김민기는 1951년 3월 31일 전북 익산군 함열면에서 의사인 아버지와 조산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6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6·25전쟁 중 패퇴하던 북한군에 의해 피살됐다. 김민기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원산이 고향인 김민기의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연세대의 전신) 1기로 입학한 당시로서는 인텔리 여성이었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한국인 학생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사 면허증을 취득하여 조산원을 운영하며 10남매를 키웠다
익산에서 이리중앙국민학교를 다니다 서울로 올라온 김민기는 재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를 거쳐 1966년 경기고에 입학한다. 김민기는 경기중·고 시절 미술반 활동을 했다. 그는 “난 경기중·고를 다닌 게 아니라 경기중·고 미술반을 다녔다”라고 말하기도 할 만큼 미술반에 대한 애착이 컸다. 2015년 다큐멘터리 작가 이진순과 가진 한겨레 대담에서 밝힌 고교 미술반 시절에 대한 김민기의 회고를 한 번 들어보자.
“경기고 미술반이 프라이드가 무지하게 셌는데, 그때 우리 모토가 ‘정물화는 안 그린다’였다. 미술실에서 앉아서 그리면 안 된다. 무조건 화판 들고 나가는 거지. 중학교 1학년 때 미술반 선배가 ‘어디서 사과나 꽃병을 그리고 자빠졌어? 나가!’ 해가지고 남대문시장 좌판에 가서 그리던 기억이 난다. 그거 때문인지, 내가 만든 노래들은 내가 살면서 어딘가 현장에 따라가서 이렇게 그린 거야. 단지 붓이 아니고….”
고교 시절 그림 이상으로 김민기의 친구가 된 것이 또 하나 있다. 셋째 누나가 입학을 기념하여 선물한 클래식 기타였다. 그는 혼자서 누나의 피아노 악보를 이용해 기타를 익혀나갔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학교 내의 소문난 기타 연주자가 되었다.
누나가 선물한 기타가 그 후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 놓은 계기를 제공한 셈이었다.
양희은과의 인연, 그리고 ‘아침이슬’
경기고를 졸업한 김민기는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했지만, 정형화된 미대 수업은 따분할 뿐이었다. 1학년 1학기에 낙제를 한 그는 고교 동창을 만나 아르바이트 삼아 듀엣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듀엣의 이름은 ‘도비두’. ‘도깨비 두 마리’라는 뜻이다.
양희은을 만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1970년 어느 날, 고교 동창이던 임문일이 양희은을 소개했다. 집안 사정으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이 가수활동을 시작하며 김민기에게 노래 반주를 부탁했다. 김민기는 양희은의 노래를 반주해 주며 그녀를 위해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다. 1970년 양희은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아침이슬’을 비롯해 그녀가 부른 많은 노래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1972년 김민기는 서울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꽃 피우는 아이’ 등을 부르다가 동대문경찰서로 연행되었고 해당 음반은 전량 수거되었다.
무궁화 꽃을 피우는 아이
이른 아침 꽃밭에 물도 주었네
날이 갈수록 꽃은 시들어
꽃밭에 울먹인 아이 있었네
‘꽃 피우는 아이’의 가사가 불온하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불온한 사상범이 되었다. 수시로 체포·고문·취조 받는 일이 이어졌다.
노동자 결혼식 축가로 만든 ‘상록수’
김민기는 1973년 김지하 희곡 ‘금관의 예수’의 극음악을 작곡해 무대 공연 경험을 쌓기 시작한다. 이듬해 4월에는 소리굿 ‘아구’의 대본을 쓴 뒤 작곡가 이종구가 곡을 붙여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이 소리굿은 공연윤리위원회(공윤)의 제재를 받고 상연 금지 처분을 당했지만, 이화여대에서 체포 위협을 무릅쓰고 재공연하는 등 화제를 모았다.
1974년 입대해 1977년 만기 제대한 김민기는 부평 근처의 한 봉제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하게 된다. 이 곳은 지금까지 그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180도 다른 곳이었다.
노동자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노래도 가르쳤다. 동료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작곡한 것도 그 때였다. 그는 “동료들이 늦게 결혼식을 올리는데 돈도 없고 해서 노래로 대신 부조(扶助)한 것”이라고 말한다.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세월이 지난 후 ‘상록수’는 두 번 크게 주목을 받게 된다. 첫 번째는 1998년 골프선수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을 때다.
박세리가 양말을 벗고 물속에 들어가 극적으로 스윙하는 장면을 사용한 대한민국 50주년 공익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이 노래가 사용되었다. 그 무렵 IMF 외환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국민들에게 이 광고는 희망을 안겨주며 깊이 각인되었다.
또 하나는 2002년 16대 대통령선거 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기타를 치면서 ‘상록수’를 부른 선거광고다. 이 광고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 됐다. 노무현의 ‘상록수’ 광고는 지금까지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DJ와 춤을’ 광고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욕쟁이 할머니 국밥집’ 광고와 함께 최고로 히트한 대선 광고로 꼽힌다.
1978년 발표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의 바탕이 된 것도 그의 노동현장 경험이었다. 세간에는 ‘공장의 불빛’이 동일방직사건(파업 노조원에게 똥물을 투척)을 극화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는 “극 중에 묘사된 철야작업과 구사대, 노조탄압은 당시 어느 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 노동현실이었다”라고 말한다.
‘공장의 불빛’ 카세트 테이프를 배포할 때 김민기는 투옥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 1978년 양희은의 음반에 ‘늙은 군인의 노래’나 ‘상록수’를 실을 때, 심의 통과를 위해 작곡가 이름으로 ‘김아영’이란 가명을 사용했던 그가 이번에는 카세트 테이프에 보란 듯이 김민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군 복무시절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
‘늙은 군인의 노래’는 그가 군 복무 시절 만든 곡이다. 1974년 10월. 김민기는 미군부대 카투사로 입대했다. 그는 주한미군 방송국인 AFKN에 배치를 받아 나름 편한 군대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탈이 생겼다. 입대 다음해인 1975년 박정희 유신독재 반대 집회에서 그가 만든 ‘아침이슬’ 노래가 시위대에 의해 대거 불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에서 가만있을 리 없었다. 그는 느닷없이 보안부대로 끌려가 영창생활을 했다. 이어서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 제12사단 51연대 1대대 중화기 중대로 재배치되었다.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던 곳이다.
1976년 겨울, 그곳에 퇴역을 앞둔 선임하사관인 상사가 있었다. 그는 김민기에게 ‘자신의 30년 직업군인 인생을 노래로 만들어 달라’라고 부탁했다. 답례는 소속 부대원들이 나누어 마실 수 있는 막걸리 두 말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노래가 ‘늙은 군인의 노래’다. 30년 이상 직업군인으로 헌신했던 노병의 애환과 설움을 담았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군인이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무엇을 하였느냐 무엇을 바라느냐
나 죽어 이 흙속에 묻히면 그만이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이 내 청춘
1977년 군대를 제대한 김민기는 이미 대학가의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대신 정부에 의해 공식 활동이 정지되었다. 그러나 양희은이 부른 이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의 병영으로 퍼져나갔다. ‘병영에서 괴상한 노래가 돌고 있다’라는 소식을 접한 국방부 장관은 ‘군인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는 이유’로 전군에 노래 금지령을 내렸다.
결국 이 노래는 사상 최초 ‘국방부 장관 지정 금지곡 1호’가 되었다. 그리고 1979년 4월 26일 방송윤리위원회(방윤)에 의해 정식으로 금지곡으로 지정되었고, 1987년 9월 5일 금지곡에서 해제됐다.
음악활동 접고 고향 익산서 농사
김민기는 ‘공장의 불빛’을 만든 뒤에는 비공식 활동마저 힘들게 되었다. 결국 그는 음악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한 뒤 고향 익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하지만 김민기를 받아준 농가에서 정기적으로 그의 행적을 경찰서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치게 되었다. 이에 익산에서 멀지 않은 김제로 옮겨가 계속 농사를 지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 의해 암살된 10·26사태 뒤인 1979년 12월에는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유아원 기금 마련 자선 콘서트를 익명으로 기획하고 직접 출연도 하면서 일시적으로 음악 활동을 재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전두환을 비롯한 하나회 세력들이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다시 농사를 지으며 대외 활동을 삼갔다. 1981년 5월에는 ‘국풍81’ 개최를 앞두고 5공 정권에서 회유하려고 했지만 끝까지 참가를 거절한다.
당시 허문도는 김지하, 김민기, 채희완, 임진택 등을 ‘국풍81’에 참여시키기 위해 각별히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민기가 밝히는 당시의 거절 이유가 재미있다.
“김제에서 농사지을 땐데, 허문도가 온 건 아니고 누굴 보냈더라고. 서울대 출신. 내려와 가지고 국풍 얘길 하길래, ‘나 농사지어야 해서 못 간다, 풀 뽑으러 가야 돼서 싫다’라고 했지. 그랬더니 백지명함 같은 걸 내 앞에 내미는 거야. ‘돈 쓰고 싶으면 맘대로 쓰라’면서.”
대신 틈틈이 찾아와 농사를 도와주던 전북 지역의 연극패·노래패들과 동학농민운동을 다룬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만들어 전주에서 근대사 세미나와 함께 공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으로 옮겨가 참깨 농사를 시작했다. 이 때 비료 회사에서 사익을 챙기기 위해 규정량보다 많은 양의 비료를 권장량으로 속여 판 것을 알고는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 배상금을 받아내기도 했다. 이후에도 민통선 이북의 논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청년회를 조직해 농산물 직거래에 나서기도 하는 등 사회 운동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1983년에는 2년 전 비공식 발표했던 마당극 ‘1876년에서 1894년까지’를 대한민국연극제 참가 작품으로 출품했다. 당시 극단 연우무대 대표 오종우를 각본가로 기재하고 자신은 익명으로 연출을 맡았다. 이 때까지도 김민기는 주로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같은 해 12월에 연천의 집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때마침 9년 전 소리굿 ‘아구’를 같이 공연했던 연극연출가 김석만이 김민기를 찾아와 공연 활동을 다시 재개하자고 설득했다. 김민기는 결국 농부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돌아와 김석만, 오종우 등과 함께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공윤에서 김민기가 참가한다는 것을 알아채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 음반 기획-제작
1984년에는 서울대와 이화여대를 비롯한 대학들에서 활동하던 노래패들의 노래를 모아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이라는 음반을 기획・제작했다.
‘노찾사’ 1집 음반은 공윤의 사전심의를 뚫고 정식발매를 목표로 하면서, 건전가요를 싣는 등 여러가지 타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다보니 애초에 김민기와 김광석, 김삼연, 문승현 등 노찾사 멤버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음반이 되어버린 채 우여곡절 끝에 1987년 발매하였다.
이 무렵 그는 뮤지컬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던 이미영과 결혼해 슬하에 두 아들을 두게 된다. 아버지의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덕일까? 아들 둘 모두 건축과 디자인을 전공해서 대학 졸업 뒤 디자인 회사를 차렸다.
김민기는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열풍이 불자 탄광촌 아이들을 다룬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만들었다. 6년 전 충남 보령의 탄광에서 잠시 광부 생활을 했을 때의 경험을 살린 것이다. 하지만 공윤의 제재 때문에 여러 대목의 가사를 고쳐서 출반해야 했다.
1989년에는 농촌 운동 경험을 살려 장일순, 박재일, 김지하, 최해성 등과 함께 생태운동 단체인 ‘한살림 모임’이라는 NGO를 만들어 초대 사무국장을 맡는다. 이듬해에는 한겨레에서 발족시킨 ‘겨레의 노래 사업단’에서 그 동안 정권의 탄압 등으로 가창이 금지되어 있던 대한민국과 해외 동포들의 노래를 엮은 음반 ‘겨레의 노래’를 제작했다.
이 앨범에는 ‘이등병의 편지’, ‘이 세상 어딘가에’ 등 12곡이 수록됐다. 김민기가 총감독을 맡았고 김효국, 나동민, 노영심, 임준철, 전인권, 조동익, 최영섭, 허성욱이 편곡을 담당했다. 연주에는 노영심, 조동익, 손진태, 허성욱 등 60여 명이 참여했다.
설경구 황정민 김광석… ‘학전’이 키운 사람들
1991년에는 독일 극작가 폴커 루트비히 각본·비르거 하이만 작곡의 록 뮤지컬인 ‘지하철 1호선’의 한국어 번안과 연출을 담당했다. 이 뮤지컬은 같은 해 김민기 자신이 사비를 들여 대학로에 개관한 학전극장에서 공연하기 시작해 2008년까지 무려 18년 동안이나 상설 공연되었다.
2001년에는 독일과 중국, 일본에서 해외 순회공연도 진행했다. 이 공로로 김민기는 2007년에 독일문화원에서 수여하는 ‘괴테 메달’을 받았다. 한국인으로서는 윤이상과 백남준 이래 세 번째 수상자다.
1994년에는 학전극장을 상주 공연장으로 하는 극단 ‘학전’을 창단했다. 그는 이 극단에서 ‘지하철 1호선’ 외에 록 오페라 ‘개똥이’의 작사·작곡·연출과 록 뮤지컬 ‘모스키토’, 뮤지컬 ‘의형제’의 번안·연출을 담당했다.
‘학전’은 유명 배우를 꽤 많이 배출했다. ‘학전 독수리 오형제’로 널리 알려진 김윤석, 황정민, 설경구, 조승우, 장현성은 현재 충무로를 이끄는 스타가 됐다. 그 외에도 이정은, 배성우, 배해선, 김희원, 안내상, 김원해, 방은진, 나윤선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학전’을 거쳐 갔다.
노래로 유명한 학전 출신 가수로는 김광석이 있다. 그는 김광석에 대한 남다른 애틋함을 가지고 있다. 김민기는 ‘김광석 추모사업회’의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학전에서 광석이가 1000회 공연을 했다. 광석이가 처음 가수를 하고 싶다고 찾아왔는데 노래를 들어보니까 너무 못하는 거다. 그래서 ‘너 가수 하지 마라’ 그랬는데… 마침 그때가 대중문화의 판도가 바뀌는 시점이었다. 그 해에 서태지가 나왔으니까. 통기타고 뭐고, 아날로그 음악 하던 놈들이 하루 아침에 된서리를 맞았지. 어디 갈 데가 없는 거야. 어차피 극장 빚은 쌓여가고 그건 내가 지고 가는 거니까, ‘니들 와서 노래하고 싶음 해라!’ 그랬지. 그래서 광석이가 온 거다.”
김광석 콘서트가 예상 밖의 큰 호응을 거두면서 땡볕 아래 대로 변까지 관객들이 줄을 섰다. 김광석은 “나는 벽에 붙어서 노래해도 좋으니 최대한 많이 들이자”라고 고집해서 복도 문짝까지 떼어내고 관객을 받았다.
김민기와 조용필, 두 전설의 만남
잠시 화제를 돌려 한국 가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두 가수, 김민기와 조용필의 만남 이야기로 가보자.
때는 1997년 겨울 어느 날, 음악평론가 강헌과 조용필이 술자리에서 한 얘기가 단초가 됐다. 조용필의 인기가 최고조에 달하던 그 무렵, 조용필은 자신의 음악적 영역 외의 타 뮤지션에 대해 과연 얼마나 인정하고 있었을까.
그 술자리에서 강헌은 조용필에게 “형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는 뮤지션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지만 타 뮤지션 중 한 명을 꼽으라면 누구를 꼽으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조용필의 대답은 의외로 “김민기”였다.
강헌은 깜짝 놀랐다. 신중현이나 김홍탁을 얘기할 줄 알았다. 김민기를 인정한다는 말은 충격이고 감동이었다. 조용필 자신이 갈 수 없는 길,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에 대한 연민과 존경을 나타낸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강헌이 역시 방배동 술자리에서 김민기를 만났다. “민기 형, 조용필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라고 물었다. 김민기의 대답은 놀라웠다. “너 내가 싫어한다고 말할 줄 알았지. 실은 나 조용필 좋아한다”고 했다.
강헌은 그 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조용필이 자주 다니는 방배동 일식집에서 만나기로 한다. 약속한 당일, 3시간 전쯤 강헌은 김민기를 만나 시간을 때우다 택시를 타고 대학로에서 반포대교를 지나 방배동에 다다를 즈음, 김민기가 차안에서 갑자기 침묵을 깼다.
낮고 묵직한 특유의 베이스 톤으로 “헌이야, 오늘 술값은 내가 낸다.” 뜬금없는 얘기가 의외였다. 택시안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걸 걱정하고 내린 결론이 “술값은 내가 낸다”였다. 강헌은 “그만 돌아가자”라고 말할 줄 알았다고 회고했다.
이제 중년(조용필 1950년생ㆍ김민기 1951년생)의 두 사람이 만나야 할 시간은 다가오는데, 김민기의 표정에서 마치 포먼과 세기의 매치를 앞둔 알리의 심정이라도 된 듯 보였다. 그런데 누가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하느냐가 또한 걱정거리였다. 내놓고 무슨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감정싸움이나 자존심이 걸린 문제도 아니건만… 걱정은 기우였다. 도착해서 식당에 들어서니 오너 셰프가 “조용필이 먼저 와서 방에 기다리고 계신다”고 했다.
김민기 앞에서 조용필이 부른 ‘아침이슬’
둘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악수하고 자리에 앉아 어색한 침묵 속에 시간만 보냈다. 그 침묵의 시간이 40여 분이나 됐다. 소주만 20병이 비워졌다. 세 사람은 정말 아무 말 없이 밤 10시 반이 될 즈음 그 식당을 나왔다. 밖은 추웠다. 조용필이 부근의 허름한 70년대식 풍경이 물씬 풍기는 카페로 인도했다.
종업원은 없었고 나이든 마담이 수퍼스타의 등장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허름한 룸으로 안내했다. 위스키 한 병을 셋이서 나눠 마시고 또 침묵의 시간. 조용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구석에 있는 낡은 노래방 기기로 가더니 쪼그려 앉아 번호를 직접 누른다.
그 노래는 ‘아침이슬’이었다. 한국 최고의 가왕이 작곡가 김민기 앞에서 ‘아침 이슬’을 멋드러지게 열창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조용필이 ‘아침이슬’을 부름으로 해서 순간 실내공기는 밝아졌다. 서먹서먹한 눈맞춤 하나로 보낸 긴 침묵의 시간이 ‘태양은 묘지 위’가 아닌 ‘두 전설의 어깨 위’에 타오르고 있었다.
시대의 아픔을 대변한 이름 ‘김민기’
김민기는 투사가 아니다. 그는 투사가 되기에는 너무 심성이 여린 사람이다. 그는 남들에게 자신의 노래에 대해 소개하고 또 설명하는 데 완강하게 반발했다.
“노래라는 것은 만들어지면 부르는 사람이 임자지, 작곡자는 철저히 제3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노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 자체를 기피하다 못해 혐오했다. 김민기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들여다 본 한겨레신문 2015년 4월 10일자 기사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는 저항가요의 전설이었지만 그는 사실 투쟁가를 목청 높이 외쳐 부르게 하는 전사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최루탄을 마시며 그의 노래를 목이 터지게 부를 때나 탁자가 부서져라 군창을 할 때도, 그는 민통선 안의 폐가를 수리해서 땅을 일구고 묵묵히 농사를 지었다. 겨울에는 일거리가 없어서 충청도 탄광에 가서 광부 일을 하거나 목포 앞 김 양식장에 가서 일당 잡부를 하기도 했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 몸을 수그린 채,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김민기는 인터뷰에서 “사각형이라는 건 그렇게 오래가지를 못한다고. 임시적인 방편이야. 인간이나 자연 어디를 보더라도 직선이라는 건 없어. 어느 시점에서 이렇게 사각형까지 해보자, 이런 거지. 사각형이 자기 주장이 되었을 땐 억지가 되기 쉽다”고 말한다.
김민기, 그리고 ‘아침이슬’은 1970~80년대 우리 시대의 아픔을 대표하며 무한한 의미를 지닌 이름이고 노래다. 1970년대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노래를 불러보지 않은 기성세대가 몇 명이나 있을까? 그가 만든 노래는 역사가 되어 우리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누군가 조용필의 노래는 가요계를 바꿨지만, 김민기의 노래는 세상을 바꿨다고 말한다.
김민기, 그의 노래를 들으면 가슴 속에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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