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3·15의거, 그리고 김주열의 진혼곡

[이영훈의 ‘유행가가 품은 역사’] 마산시민, 이승만 정권 부정선거에 항거 남원 출신 김주열, 최루탄에 얼굴 관통死 어머니 권찬주 여사, 아들 시신 찾아 헤매 금지곡 된 가요 ‘남원 땅에 잠들었네’

서거 50년만인 2010년 4월11일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이 경남 마산중앙부두에서 열렸다. 사진= 연합뉴스
서거 50년만인 2010년 4월11일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이 경남 마산중앙부두에서 열렸다. 사진=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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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15일은 4·19혁명의 기폭제로 평가받는 ‘마산 3·15의거’ 64주년이 되는 날이다. 3·15의거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지역 학생과 시민들이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해 벌인 규탄 시위로, 우리나라 현대사 최초의 유혈 민주화 운동이다.

영화관 이름이 ‘3·15회관’?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필자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3·15의거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러다 마산에 있는 고교에 진학하면서 3·15의거와 김주열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고교 1학년 때다. 중간고사 시험이 끝난 어느 날, 단체영화 관람을 갔는데 그 영화관 이름이 ‘3·15회관’이었다. 지금은 기억도 곰상곰상 하지만 당시 마산에는 개봉관으로 중앙극장, 시민극장, 강남극장, 3·15회관 등이 있었다.

‘3·15회관’은 이름은 회관이었지만, 사실상 전용 영화관이었다. 마산MBC 구 사옥 옆에 있던 ‘3.15 회관’은 초기에는 공회당, 극장 개봉관으로 쓰이다 점차 재개봉관, MBC의 야외 스튜디오 등으로 사용되다가 결국 시설이 노후화되어 철거되었다.

영화 관람이 끝난 뒤 ‘3·15가 뭔데 극장 이름에 숫자가 붙어 있지?’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3·15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마산 ‘3·15의거’ 하면 가장 먼저 김주열을 떠올린다.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채 바다 위로 떠오른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이런 김주열 열사를 위한 추모곡으로 ‘남원 땅에 잠들었네’가 있다. 그러면 이 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신문기사 보고 10분 만에 만든 노래

1960년 4월 어느 날, 직물회사에 근무하면서 틈틈이 작사가로 활동 중이던 차경철(본명 차익준)은 부산시 서구 아미동에 위치한 ‘도미도 레코드’를 찾았다. ‘빈대떡 신사’로 유명한 가수이자 이 레코드사의 사장이던 한복남이 사무실에서 기타를 치고 있었다.

잠시 후 석간신문이 도착했다. 신문에는 김주열 열사의 운구가 마산에서 고향인 남원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작사가 차경철의 말을 들어보자.

“그 날 비가 좀 내렸지. 당시 내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었는데, 자유당 독재정권과 맞서 싸운 어린 학생의 죽음에 눈물이 나서 못 견디겠더라고. 그래서 한복남 선생님에게 노래를 만들자고 제안했어. 한 선생님이 가만히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그러자고 하더군. 감정이 복받쳐 올라서 가사와 곡이 그 자리에서 만들어졌지. 아마 10분 정도 걸렸을 거야.”

차경철이 쓴 노랫말에 한복남이 바로 곡을 붙였다. 노래 시작 첫머리에 총소리, 데모소리가 나오고 중간에 아리랑 노래가 흘러나오는 식으로 노래가 구성됐다.

이후 가수 손인호에 의해 음반 취입이 이루어졌다. 당시 손인호는 ‘한 많은 대동강’ ‘비내리는 호남선’을 불러 히트시킨 유명가수였다.

금지곡 된 ‘남원 땅에 잠들었네’

‘남원 땅에 잠들었네’의 1절 가사에는 김주열의 억울한 죽음과 독재정권의 부정선거에 분연히 맞서 싸워 이긴 마산 시민과 학도들의 투쟁을 담았다. 2절에는 미래의 성공을 위해 마산상고로 유학을 보냈는데 주검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아들을 보며 목메어 우는 어머니의 한 맺힌 슬픔이 표현됐다. 이 노래의 1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원통하게 죽었구나 억울하게 죽었구나

몸부림 친 3·15는 그 누가 만들었나

마산 시민 흥분되어 총칼 앞에 싸울 적에

학도 겨레 장하도다 잊지 못할 김주열

무궁화 꽃을 안고 남원 땅에 잠들었네

1960년 늦여름에 나온 이 노래는 음반이 나온 뒤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학생들이 술자리에서 이 노래를 많이 부르곤 했다. 그러나 이 노래의 생명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방송금지 조치가 이루어진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 했던가. 이 노래를 발매한 레코드사마저 부도가 나면서 ‘남원 땅에 잠들었네’는 서서히 잊혀져 갔다.

유튜브= 대중가요 ‘남원 땅에 잠들었네’

마산상고 합격 확인 위해 마산행

‘남원 땅에 잠들었네’ 노래 속 주인공인 김주열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주열은 1944년 10월 7일 전북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3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정국 때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어머니 권찬주는 경남 함양군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다.

김주열은 1956년에 남원 용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1959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한 후 남원농고에 입학한다. 그러나 농고가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채 몇 달을 다니지 않고 7월에 자퇴한 후 집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이 무렵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면서 가세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한다. 이에 서울로 올라가 학비가 별로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하고 서울고에 원서를 낸다.

그러나 형의 친구인 하용웅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을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라는 권유를 받고 마산상고에 원서를 내게 된다. 그렇게 마산상고 입시를 치르고 돌아와 3월 14일(16일로 발표가 미뤄짐)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열과 함께 마산에 있는 이모 할머니(아버지의 이모) 댁으로 가게 된다.

“시청에서 모이자” 1만여 명 시위

3월 15일 선거가 치러지는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자유당의 부정선거가 자행됐다.

마산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아침에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야당인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이에 민주당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부정투표지가 쏟아져 나왔다. 투표함을 엎어버린 참관인 안맹선과 그의 남편이자 민주당 경남도의원인 정남규는 사전투표 사실을 발견했으나 곧 경찰서에 끌려간다.

경찰서로 끌려간 정남규는 도의원 신분이라서 바로 풀려났다. 그는 곧장 오동동 마산시당으로 가서 당원들과 논의한 끝에 오전 10시 30분 독자적으로 ‘선거포기’를 선언하고 참관인들을 철수시킨다. 이후 방송을 통해 부정선거 무효를 주장하고 오후 3시 30분부터 민주당원들이 모여 시위에 돌입했다.

민주당원들은 가두시위를 벌이며 시위대를 모았고 오동동 마산시당사에 1500여 명의 시위대가 모였다. 이때 경찰들이 들이닥쳐 민주당원들을 연행하고 시위대들에게 해산할 것을 요구했다. 특히 경찰 간부가 곤봉으로 고등학생들을 두들겨 패는 바람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군중은 더욱 격앙되었다.

남은 시위대들이 독자적으로 시위에 돌입하자 경찰과 반공청년단들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시위대들은 저녁에 개표가 시작되는 시청으로 모이자고 서로 약속하고 해산하게 된다.

이 소식이 시내에 퍼지고 마산 시민들은 저녁 무렵 마산시청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시위 인원은 1만 명을 넘을 정도로 불어났다. 일부는 당시 마산의 중심가였던 남성동파출소 앞에 모였다. 이어서 시위대들은 마산 시내의 관공서, 경찰 파출소, 자유당사 등을 습격하며 시위를 이어갔다.

고(故) 김주열 열사.
고(故) 김주열 열사.

시신에 돌 매달아 바다에 수장

당시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었다. 이모할머니는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인해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자 종일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부정선거가 들통이 나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김주열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한다.

김주열과 형은 이렇게 해서 이날 저녁 무렵 무학 국민학교 앞의 부정선거 규탄 시위 현장에 나가게 된다. 이날 밤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했다.

당시 경찰에 쫓기던 시위대 속에서 형 김광열은 동생 주열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이날 시위에서 김주열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경찰은 그의 시신을 쇠사슬로 묶은 뒤 돌을 매달아 몰래 마산 앞바다에 수장했다.

밤새 주열을 찾지 못한 형 김광열은 다음 날 ‘동생이 시위 도중 없어졌다’라고 남원 부모님께 전보를 친다. 아들의 행방불명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바로 마산으로 달려갔다. 이때부터 어머니 권찬주는 경남 지역 방송과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아들의 실종 소식을 알렸다. 28일 동안 마산 시내를 뒤지면서 시민들의 손을 붙잡고 눈물로 호소했다.

이 와중에 이름 모를 경찰관이 김주열 어머니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나도 김주열 군 또래 아우가 있습니다. 주열 군이 사라진 게 남의 일 같지 않네요. 자세히 알면 확실히 가르쳐 드리는데 저도 모르겠고 소문으로 듣자하니 주열 군이 시위 도중 살해되어 시체가 마산시청 뒤 연못에 버려졌다는 말이 있더군요.”

이에 마산시청 뒤 연못 두 곳의 물을 퍼내기도 했다. 이때 아들 이름을 부르며 진흙 속을 손으로 휘젓고 다니던 어머니 모습은 마산 시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어머니의 애끓는 모정에 김주열은 어느새 ‘마산의 아들’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김주열의 어머니를 ‘빨갱이’로 매도했다. 김주열을 죽인 뒤 몰래 바다에 수장했던 경찰이 색깔론 공세의 선봉장 노릇을 했다.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김주열 열사의 어머니 권찬주 여사.

눈에 최루탄 박힌 채 떠오른 김주열

어머니 권찬주는 4월11일 아침 8시 남편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편지를 받고 고향 남원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녀가 남원으로 향한 지 3시간 만인 4월11일 오전 11시30분 얼굴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떠올랐다.

때마침 마산 앞바다에서 홍합을 채취하고 있었던 김경영이 김주열의 시신을 인양했다. 이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아 유명인사가 된 김경영은 그 일 이후에 시신 인양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생업을 이어나가지 못했다. 그러다 1965년 5월 9일 사망한다.

김경영의 딸 김금이 씨의 말을 한 번 들어보자.

“아버지는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인양한 뒤 매우 힘들어 하셨고, 거의 매일 술로 세월을 보냈다. 지금으로 보면 트라우마에 시달렸던 것이다. 그러다 어느날 이웃사람들이 ‘금이야, 아버지가 부두에서 자고 있더라’라고 해서 급히 손수레를 끌고 모시러 갔지만 이미 숨진 뒤였다. 당시 의사는 사인이 심장마비라고 했다. 아버지 주검이 발견된 장소는 김주열 열사 시신인양지였다.”

김주열은 사망한 지 한 달 가량이나 지났지만 당시 바닷물이 굉장히 차가웠기 때문에 시신은 부패되지 않았다.

김주열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마산주재기자인 허종 기자가 찍어 특종으로 보도했다. 이 사진과 보도는 AP통신을 통해 바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시민들은 김주열의 시신을 마산도립병원에 안치했다. 그러자 경찰은 영안실을 지키는 시민들을 강제 진압하고 김주열의 시신을 빼돌려 남원으로 싣고 갔다.

아들의 시신을 밤에 몰래 남원으로 싣고 오자, 김주열의 어머니는 “고향에서는 받을 수 없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이기붕 집 앞에 갖다 묻어라”라며 고함을 치기도 했다. 결국 김주열의 시신은 경찰의 삼엄한 경계 속에 남원의 고향 뒷산에 묻혔다.

1960년 4월 11일 마산시 중앙부두 앞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
1960년 4월 11일 마산시 중앙부두 앞에 떠오른 김주열 열사의 시신.

4·19혁명의 기폭제가 되다

마산이 들끓었다. “김주열을 살려내라”, “김주열을 살해한 범인을 처단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민 3만여 명이 시위에 나섰다. 이 시위는 들불처럼 번져나가 마침내 서울에서 4·19혁명으로 폭발한다.

그의 시신을 유기한 장본인은 일제강점기에 헌병보조를 지냈던 마산경찰서 경비주임 박종표였다. 박종표는 최루탄 발사와 시신 유기 혐의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중에 시신 유기만 인정되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지휘 책임자인 마산경찰서 손석래 서장은 사건 후 잠적했다가 도피 8년 만인 1968년 체포되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자 어머니 권찬주는 5월 8일 마산 시민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낸다.

“자식 하나 바쳐서 민주주의를 찾는 데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었다면 삼형제 다 바친들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마산 시민 여러분이 보여주신 그 거룩한 뜻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내 자식 주열이는 신선이 되어 올라갔을 겁니다. 마산 시민 여러분, 이제 안심하십시오.”

4·19혁명 뒤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고 민주주의가 도래하는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 5·16군사쿠데타로 김주열 열사와 3·15의거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난다.

앞서 언급한 ‘김주열 추모곡’인 ‘남원땅에 잠들었네’가 방송 금지곡으로 지정당한 게 가장 상징적이다.

경찰 감시 피해 서울로 이사한 가족들

김주열의 가족들도 오랫동안 경찰의 감시에 시달렸다. 김주열의 아버지는 아들이 사망한 뒤 화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1965년 작고했다. 어머니 권찬주는 경찰 감시가 심해지자 고향 남원을 떠나 자식들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다.

김주열의 어머니는 서울 현저동에서 하숙을 치면서 남은 자식들을 가르쳤다. 감시를 피해보려고 연희동으로 이사를 가기까지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머니 권찬주는 이후 국밥집을 하면서 조용히 살았으나 3·15 의거나 4·19혁명 행사가 열린다고 하면 마산이든 서울 수유리든 어디든 꼭 참석했다. 유족에 대한 경찰 감시는 1987년 6월항쟁 이후에야 멈추었다.

4월혁명 유족 중에서도 상징적 대표로 활동했던 김주열 어머니 권찬주는 1989년 아들을 만나려 하늘나라로 갔다. 1960년 3월 15일 동생 김주열의 손을 놓쳤던 큰형 김광열과 둘째누나 김경자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김주열의 형제자매 중 첫째누나 김영자와 막내동생 김길열만 생존해 있다.

남원의 아들, 마산의 아들, 국민의 아들

1990년대 이후 김주열 열사를 재조명하고 기리는 움직임이 시작된 게 유족에게는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1995년 김주열의 모교인 용마고(마산상고서 교명 변경)는 3·15의거 35년 만에 김주열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1999년에는 마산상고 입학 동기들이 주축이 돼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를 꾸린 뒤 ‘민주시민 항쟁정신’을 주제로 한 다양한 추모행사를 이어가고 있다.

2008년에는 용마고 교정에 김주열 열사 흉상 및 조형물을 제막했다. 해마다 3월 14일에는 남원에서 김주열 열사 추모식이 열리고, 시신이 떠오른 4월 11일에는 마산에서 추모제가 열린다. 3·15의거 및 4·19혁명 50주년이던 2010년에는 동문들이 모여 김주열 열사 국민장을 거행했다.

그리고 2010년 3월에 마침내 국무회의 의결에 따라 3·15의거는 국가기념일로 지정이 되었다. 이로써 3·15의거 기념식도 지자체 대신 정부 주관 행사로 열린다.

다음은 김주열열사기념사업회 김영만 고문의 시 ‘김주열’이다.

그는

전라도 남원의 아들로 태어나

경상도 마산의 아들로 죽었고

4월혁명을 통해 국민의 아들이 되었다

그의 무덤은

서울 수유리 4·19 묘지에 있고

마산 구암동 3·15 묘지에도 있고

남원 옹정리 열사묘지에도 있다

4·19 묘지에는 국민의 아들이 누워있고

3·15 묘지에는 마산의 아들이 잠들어 있고

남원 열사묘지에는 남원의 아들이 묻혀있지만

어디에도 그의 죽음은 없다

아직도

부정, 부패, 불의, 독재에 분노하는 너와 나

우리의 심장 속에 주열이는

벌떡벌떡 숨쉬며 살아있다

김주열은

의거다!

항쟁이다!

혁명이다!

글쓴이

이영훈 가요연구가

이영훈 가요연구가는 국제신문, 동아일보 등에서 신문기자로 20여 년간 근무하다 방송으로 옮겨 10년째 기자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채널A 보도본부에 근무하면서 메인뉴스 편집데스크와 디지털뉴스부장을 지냈고 쾌도난마, 뉴스톱텐 등 여러 시사 프로그램의 제작데스크로 일해 왔다. 보도본부 선임기자를 거쳐 현재는 심의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한국정치, 바람만이 아는 대답>, <유행가는 역사다>, <그 노래는 왜 금지곡이 되었을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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