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사우디 외교에서 배워야 할 점

[이근윤의 사우디, 중동이야기] 사우디, 미중 사이 절묘한 외교 밀레니엄급 외교성과 낼 지도 반도체공급 중심축 한국은 한쪽에 치우친 외교로 불안감만

무함마드 빈 살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윤석열 대통령.
무함마드 빈 살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와 윤석열 대통령.

수십년간 미국을 따랐던 한국과 사우디

필자는 한국에서 37년을, 사우디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공통점이라고는 1도 없을 것만 같은 이 두 나라에서, 요즘 무척 생소한 경험을 하고 있다. 마치 ‘평행 세계’의 두 나라를 보는 것처럼 익숙하기 그지없는 공통의 상황을 맞이하고서, 서로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각기 다른 운명의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 70년간 두 나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 질서에 가장 잘 순응했던 모범생들로서, 번영의 모델을 보여준 것이다. 석유라는 강력한 자원을 가진 사우디는 시종일관 이 ‘필살기’를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함으로써 안보와 번영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았다면, 딱히 내세울 자원이 없었던 한국은 그나마 유일한 자원이었던 인적자원, 곧 사람을 미국적 질서 속에 철저히 가두어 키움으로써 인간이 이뤄낼 수 있는 번영의 극치에 다가설 수 있었다할 것이다. 1970~80년대 중화학 공업의 발달과 90년대 이후 IT 산업의 발달은 미국적 인간을 키우는 한편, 미국의 전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두나라의 번영은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았다. 중국이 같은 방향에 올라타 무서운 속도로 이 두 나라의 번영을 따라잡고, 이제는 이 번영 열차의 최전방 기관차인 미국마저 따라잡으려 부상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사건건 대놓고 미국의 대척점에 섰던 구 소련이나, 은근히 기술로 미국을 따라잡은 것처럼 행세하며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일본과 달리, 덩샤오핑이 심었던 ‘도광양회(韬光养晦)의 정신은 미국이 정한 국제 질서에 철저히 협조함으로써 21세기 중국의 눈부신 발전을 이끈 놀라운 힘이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로 미국이 이끄는 세계질서의 기관차가 흔들리는 낌새를 보이자 중국은 오래 참아왔던 패권 국가의 본능이 여전히 꿈틀대고 있음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굳이 외부에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니 휘청이는 1인자와 그 똘마니들에게 이제 더는 숨기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세계 질서는 하나의 기관차를 따라 잘 달리던 도중에 갑자기 두번째 기관차가 나타나는 바람에, 두 갈래 길로 갈라져서 각기 다른 레일을 달려야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두 기관차 모두 이제는 더 이상 같은 레일을 달리지 않겠다고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객차들이 두 기관차 중 하나를 선택해서 갈라져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상황이 됐다. 중국의 부상이 큰 불만이었던 일본이 가장 먼저 미국 뒤에 줄을 섰다.

벤야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벤야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조 바이든 미 대통령.

수천년 ‘중동의 반목’ 끝내려는 사우디

문제는 중국의 성장의 과실을 가장 크게 누렸던 두 국가, 한국과 사우디의 선택이다. 중국을 버려도 크게 잃을 것이 없는 일본과 달리, 이 두 나라의 중국 의존도는 이미 미국을 넘어선 것을 넘어 급격히 격차를 벌여가고 있는 중이라 중국이라는 기관차를 떼어내고 미국 엔진만으로는 성장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보였다.

결국 여기서 두 나라의 선택은 갈라지고 있다. 한국은 탈중국을 선언하고 미국을 따라가며 급격히 성장동력이 떨어지고 있는 중이지만, 사우디는 미국의 요구를 과감하게 거부하고 미중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선택한 후 현재까지는 상당히 괜찮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사우디라는 나라에 있는 필자가 보기에는 그리 보인다.

이 나라는 미국의 원유 생산 증산 요청을 거부하며 적극적으로 감산에 나서 유가하락을 방어해 내며 산유국들의 이익을 지켜내는 데 제대로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이 뿐만 아니라, 중국의 중재로 이란과 화해했고, 예멘, 시리아 등과 지리하게 끌어오던 전쟁도 종전의 문에 다가서는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사우디는 강대국이 정해주는 중동의 질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질서를 만들어 가는 주도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년 미국 대선에서 재선을 위해 무언가 굵직한 외교적인 성과에 목말라 있는 바이든 대통령을 지렛대로 삼아, 지금까지 중동을 화약고로 만드는 데 가장 문제적 존재감을 보여주었던 이스라엘과 수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것도 사우디가 오랜 숙원인 안보적 과제들을 일거에 해결하는 선물 보따리를 미국으로부터 받으면서 말이다.

최근에는 중국 정부가 사우디를 주요 관광지로 선정하며 최소 300만 명의 단체 관광객이 입국 비자로 방문할 것을 예고하는 등 이 나라는 미중 양국으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만약 같은 이슬람 내의 숙적이며 시아파의 종주인 이란과의 화해를 이뤄내고,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일한 타종교 국가인 이스라엘과도 수교하게 된다면, 사우디의 외교 행보는 지난 70년의 갈등을 해결하는 ‘세기의 성과’ 정도가 아니라, 수천년의 반목과 갈등을 해소하며 중동에 평화를 가져오는 ‘밀레니엄 수준의 성과’를 이뤄내는 셈이 된다.

그리고 이런 사우디의 광폭 외교 행보는 탈석유 시대에도 그들의 자주 번영의 염원을 집대성한 ‘네옴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선결과제이던 아라비아 반도의 평화를 한순간에 해결함으로써, ‘무리가 칼을 쳐서 낫을 만들고, 창을 쳐서 보습을 만듦으로써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는 성경의 예언을 제대로 실현하는 것이다.

절묘한 줄타기 사우디 Vs 한쪽에 치우친 한국

현재까지 이런 사우디의 행보는 미중 갈등이라는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양 국가의 힘을 빌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놀라운 외교의 정석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치 과거 고려의 서희가 거란과 여진, 그리고 송나라의 패권 경쟁 틈새에서 신기에 가까운 줄타기를 보여주며 아무런 희생없이 담판만으로 강동 6주를 회복했던 외교적 승리의 절정을 사우디가 보여 주는 것만 같다.

물론 석유라는 최고의 전략적 자원을 가진 사우디에 비해, 한국의 입지가 훨씬 더 좁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미 21세기 최고의 전략적 자원으로 급부상한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축 중 하나인 한국의 외교 행보에서 지금의 국제 정세를 보는 시각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닌지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매우 아쉽고 한심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는 너무나 진부한 외교의 클리세(cliché)를 다시 한번 새겨 보며, 어느 한쪽의 강대국에 일방적으로 끌려가 다른 편의 분노를 사고, 국익을 헌납하고마는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외교를 해선 안된다고 역설하고 싶다. 지금의 사우디와 그리고 과거 고려의 서희가 보여 준 절묘한 외교의 기술을 발휘하는 자주 대한민국의 늠름한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기를 이역만리 사우디에서 간절히 소망한다.

글쓴이

이근윤 사우디 사업가 겸 칼럼니스트

필자인 이근윤은 서울대에서 환경과학을 전공했다. 한국렌탈 중동총괄 이사를 역임했고 현재는 켄렌탈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에서 5자매를 홈스쿨링하며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이메일 주소는 musc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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