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자명 조만수 충북대학교 교수
  • 문화
  • 입력 2022.07.25 12:13
  • 수정 2022.07.26 11:58

'헤어질 결심', 붕괴의 두가지 뜻

박찬욱이 심어놓은 다양한 기호들
사건을 추리하듯 사랑을 탐문하며
해준의 '붕괴', 왜 발전소 배경일까?

사랑을 탐문하는 수사물?

칸 영화제에서 <헤어질 결심>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직후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박찬욱 감독은 “이렇게 지루하고 구식의 영화를 사랑해 주셔서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그가 구식이라고 말한 까닭은 이 작품이 ‘멜로드라마’라는 고전적이면서 매우 대중적인, 그리하여 예술성을 중요하게 평가하는 칸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에는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장르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박찬욱 감독의 말을 겸손함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가 ‘구식’임에도 불구하고 ‘멜로’를 선택한 것은 그 진부함에 도전을 하기 위해서이다. 사랑 이야기가 지닌 감정의 증폭은 유지하면서도 사랑에 대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수사물’이라는 또 다른 장르적 특성을 추가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형사가 자신이 감시하던 용의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점에서 <헤어질 결심>의 출발 상황은 <원초적 본능>과 유사하다. 하지만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이 옛 작품과는 다르게 스릴러로서의 긴박감을 주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기에 감독의 말대로 <헤어질 결심>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은 수사물의 장점인 긴박감을 활용하지도 않고, 범인을 사랑하는 형사의 윤리적, 심리적 혼란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도 않으면서 왜 굳이 수사물 형식을 활용한 것일까?

수사물은 단서를 통해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하는 장르이다. 단서를 하나하나 찾아내고 해석하면서 누가, 왜, 어떤 방식으로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밝혀간다. <헤어질 결심>의 특별한 점은 멜로드라마와 수사물을 엮으면서 사랑의 이야기를 수사물의 형식 속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개념 자체를 탐문한다는 점이다. 치정살인사건 앞에서 형사가 추리를 해나가듯이, 영화감독으로서 박찬욱은 사랑이야기 앞에서 추론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어떤 기호로 표현되고 어떻게 해석되는가? 영화의 언어는 사랑을 어떻게 포착하고 정의해야 하는가?

박찬욱式 '사랑의 기호'로의 초대

이 추론의 첫 번째 단계로 박찬욱이 제시한 것은 말과 사진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산에서 추락사한 기도수씨의 사인을 밝히기 위해서 부인 서래가 소환된다. 남편의 죽음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담당형사 해준은 말로된 설명을 들을지, 사진으로 설명할지를 서래에게 선택하게 한다. 서래는 말로 해달라고 했다가 사진으로 설명해 달라고 번복한다. 말과 사진은 기록되지 않는 기호와 기록된 기호라는 차이를 갖는다.

영화는 사랑을 ‘말’ 즉 이야기의 구성과 대사로 설명하는가? 아니면 이미지로 설명하는가? 사진의 연쇄로서의 영화는 기록된 이미지이다. 기록되지 않는 기호인 말은 바스라져 날아가 버린다. 하지만 깨진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손등의 상처, 손톱 밑의 DNA, 빼버린 결혼반지, 전화기에 남겨진 운동량 표시, 문자 메시지, 녹음된 음성 메시지, 위조된 편지, 전화기의 암호 숫자나 패턴, 사진 등 기록된 기호들은 해석을 위한 두께를 지녔다. 중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은 기호의 두께를 드러내는 또 다른 장치이기도 하다.

기호는 그 자체로서 자명한 단일한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기호는 조작되며, 왜곡되기도 한다. 그리고 기호는 때론 초록색으로, 때론 파란색으로 보이는 서래의 옷처럼 보는 해석에 따라 다른 의미의 결을 보여주기도 한다. <헤어질 결심>은 사랑이라는 기호의 해석을 위한 초대이다. 산 꼭대기에서 바다 속에 이르기까지 깊고 두터운 사랑의 기호의 세계로의 초대이다. 안개 속에서 가려져 있다가 얼핏 모습을 드러내는 기호의 세계로.

박찬욱 감독은 등장인물 각자가 다른 방식으로 사랑의 기호를 만들어내도록 한다. 우선 등장인물 중 “사랑해”라는 말을 유일하게 내뱉는 사람은 서래의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이다. 그런데 그의 ‘사랑해’라는 ‘말’은 아무런 무게도, 의미도 없다. 박찬욱이 원하는 것은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는 가장 깊이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어떤 기호는 가장 표면적인 방식으로 기록된다. 첫 번째 남편 기도수가 서래의 몸에 새긴 그의 이니셜과 같은 것이다. 지갑에 새겨진 그의 이니셜로 인해서 그 지갑이 그의 것임을 알 수 있듯이 서래의 몸에 새긴 그의 이니셜은 서래의 몸에 남겨진 멍자국과 다를 것 없는 사랑을 가장한 폭력적인 소유의 표식에 불과하다.

해준의 아내 정안은 기호의 해석에 능숙하다. 그리하여 임호신에게 걸려온 한밤의 부재중 전화기록을 통해, 정안은 그의 죽음이 자신의 남편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을 금방 추론해낸다. 그녀는 정신과 의사선생님과의 면담에서 보여주듯이 타인의 말 속에서 쉽게 오류를 찾아낸다. 그렇지만 ‘사랑’과 관련해서 감독은 그녀에게 매우 얇고 단순한 기호만을 부여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사랑의 행위 이상의 것이 아니다. 16년 8개월의 결혼기간 동안 사랑의 행위를 지속해 온 이들 부부에게 사랑의 기호는 석류와 자라이다. 그러므로 정안이 해준을 떠날 때 석류와 자라를 들고 있는 것은, 이제 이 사랑의 묘약이 해준이 아니라 이주임을 위한 것임을 알려준다.

붕괴와 까마귀를 통한 고백

일반적으로 사랑 이야기 속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발코니 장면처럼 고백 장면이다. 그런데 <헤어질 결심>에서 두 사람은 “사랑해요”라는 직접적인 기호를 사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해준은 자신이 사랑의 고백을 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서래는 “나는 완전히 붕괴됐어요....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라는 해준의 말을 사랑의 고백으로 이해하고, 이를 녹음하고 되풀이하여 듣는다. 형사로서의 본분을 지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서래의 범죄를 덮어 버리는 해준의 태도에서 서래는 ‘사랑’을 읽는다. 서래는 붕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는다. ‘무너지고 깨어짐’이라는 설명은 그러므로 서래가 받아들이는 사랑의 정의이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자신이 무너지고 깨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의 절정은 해준의 사랑의 고백에 대한 서래의 고백에 해당한다. 그런데 사실 서래가 해준에게 자신의 사랑을 직접 고백하는 장면은 없다. ‘붕괴’가 서래가 파악한 사랑의 정의라면 이제 그녀의 고백은 자신의 붕괴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서래는 자신을 모래사장에 파묻기 위해서 삽 대신 파란색 양동이를 사용한다. 이 양동이는 그녀가 죽은 까마귀를 묻어줄 때 사용했던 것이다. 까마귀에게 “친절한 형사의 마음을 선물”로 달라고 했던 서래는 이제 자신을 묻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해준에게 선물처럼 전하고자 한다. 까마귀의 자리에 자신을 놓은 것이다.

그런데 까마귀 장면이후, 관객들은 스크린 위에서 몇 차례 반복하여 등장하는 까마귀 깃털로 만든 펜을 기억한다. 결국 서래는 자신을 묻으면서 스스로 사랑 고백의 말이 되고자 한 것이다. 서래는 스스로 까마귀 깃털로 만든 펜으로 쓰여진 사랑 고백의 편지가 되고자 한다. 스스로를 “아무도 찾지 못하게 바다 깊숙이 던져”버리면서 서래는 해준의 사랑 고백에 화답한다. 사라진 몸이 하나의 글이 된다. 그것은 쓰여졌지만 말해지지 않은 고백, 전달되지 않는 편지, 그리고 해석할 수 없는 기호이다. 그것을 박찬욱은 ‘미결’이라 부른다.

감독이 굳이 말하지 않으면서도 힘주어 보여주는 이미지가 또 있다. 서래가 확인했던 ‘붕괴’라는 단어의 뜻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첫 번째 뜻인 ‘무너지고 깨어짐’ 아래에, 영화에서는 보여주지 않았던 두 번째 뜻이 있다.

붕괴
1. 무너지고 깨어짐.
2. 불안정한 소립자가 스스로 분열하여 다른 종류의 소립자로 바뀌는 일. 또는 불안정한 원자핵이 방사선을 방출하거나 스스로 핵분열을 일으켜 다른 종류의 원자핵으로 바뀌는 일.

영화 '헤어질 결심' 후반부, 바닷가를 찾은 서래(탕웨이 분).
영화 '헤어질 결심' 후반부, 바닷가를 찾은 서래(탕웨이 분).

붕괴의 두번째 뜻은

<헤어질 결심>의 배경인 가상의 도시 ‘이포’에는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배경으로 원자력발전소를 가정한 것은 단지 그곳이 정안의 직장이거나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다룬 드라마 때문에 몰려드는 중국 관광객을 위해 서래가 관광 가이드를 하기 위해서라는 상황적 설정 때문만이 아니다.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포원자력발전소로 향하는 이정표를 보여주고, 또 두 개의 탑을 가진 원자력발전소를 화면 가득 보여준다. 붕괴는 무너지는 것을 의미하지만, 핵분열에 의해 에너지가 생성되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래의 붕괴는 단지 자신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 해준이 다시 자존감을 회복하고 형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서래의 붕괴는 핵에너지처럼 엄청난 사랑의 에너지를 형성한다. 서래가 파내어 쌓인 모래탑이 파도에 씻겨 다 무너지고, 그 위에 해준이 선다. 그리고 서래의 전화기로 자신이 한 말을 거듭 들으면서 그것이 사랑의 고백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는 절규하며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이제껏 ‘물에 잉크가 퍼지듯’ 그들의 사랑을 조금씩 함께 느끼던 관객들은 서래가 만들어낸 엄청난 사랑의 에너지가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오는’것을 느낀다. 허공 속에 파도 소리만큼 아득히 마치 교향곡처럼 서래의 사랑의 고백의 소리가 들린다.
마침내.

※ 조만수 충북대학교 교수. 불문학자인 조만수는 연극에 관한 글을 쓰거나 연극을 만드는 일을 한다. 남산예술센터 극장드라마터그, 국립극단 희곡우체국장 등을 역임하였고, <오슬로>, <과부들>, <햇빛샤워>, <갈매기>, <전명출평전>,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서교동에서 죽다>,  <밑바닥에서>, <단테의 신곡> 등 40여편의 연극에서 드라마투르기를 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