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2018년 남북한 대화국면의 아쉬움 ‘이중의 구속’ 당한 南, 미 방해에 굴복 내년은 통일의 마지막 골든타임 北을 국가로 인정...비핵화 요구 말고 “우리가 피스메이커” 용기 가져야
‘이중의 구속’에 걸려든 날
2018년, 찬란한 해였다. 남북한이 당장 환상적인 일을 낼 것 같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한 달 간격으로 두 번 만났다. 4월 27일 판문점 회담과 도보다리 대화에 이어 5월 26일 김위원장이 덜커덕 판문각으로 내려와 문 대통령을 맞아 뜨겁게 포옹했다. 그리고 그들은 9월 중순 평양에서 또 만났다. 능라도 경기장 연설이 있었고 백두산 천지 동반 등반도 있었다.
그 해 가을에 ‘한미 워킹그룹’(Working Group)이 출범한다.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한국 외무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이 만나 한미 워킹그룹을 구성하기로 합의한다. 한마디로 남북한의 대화와 협력의 흐름을 통제한다는 것이 워킹그룹의 탄생 목적이었다. 미국이 요구했고 한국은 무조건 수용했다. 남북한 정상이 분단과 상호파괴의 고통을 극복하고 화해와 협력을 논하고 있는 시점에 우리 스스로 그러한 염원을 막아서고 있었던 셈이다.

이중의 구속(double bind)이다. 서로 배치되는 메시지가 동시에 발현하는 상황이다. 진보정권이라는 문재인 대통령 시절이었다. 나중에는 코로나19 상황에서 워킹그룹이 제동을 걸어 우리의 타미플루 대북 지원이 무산되기도 했다. 요는 미국으로서는 남북한의 교류가 움트는 기운만 보이면 싹을 싹둑 잘라내려 했고,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그러한 시도를 막아낼 생각은커녕 적극적으로 부역했다는 점이다. 미친 거였다.
실재하고 다급한 위험에 처한 상황이 있다. 예컨대 전투기 출격을 자주 나갈수록 적의 포탄에 격추될 확률이 커지는 상황이다. 출격을 피하는 방법에 ‘내가 미쳤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있다. 미쳤다면 출격을 못나간다. 그런데 내가 미친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순간 나는 미친 것이 아님이 들통이 난다. 그런데 계속되는 출격에 응한다는 것은 미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출구는? 없다. 영어로는 ‘캐치-22’(Catch-22, 조지프 헬러가 1961년에 발표한 풍자소설의 제목. 빠져나갈 수 없는 논리적 함정을 뜻한다-편집자주)라고 한다. ‘이중의 구속’이다.
빰 때리며 사랑한다 말하면?
뺨을 때리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면 상대방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라는 언어와 뺨을 때리는 행위가 양립불가하기 때문이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는 호랑이의 말을 믿으면 바로 잡아먹힌다. 호랑이의 식습관과 떡은 양립불가하기 때문이다. 뺨을 맞은 자나 호랑이 말을 믿은 자나 다 캐치-22에 걸렸고 이중의 구속에 빠졌다. 그들은 때린 놈한테 따지든가 호랑이를 쏘거나 하는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정신분열증에 걸리거나 호랑이한테 먹힌다.
이러한 이중의 구속은 남북대치의 역사과정 속에서 늘 지속되었던 일이다. 간혹 있었던 평화의 제스처와 함께 말이다. 7·4, 6·15, 10·4 남북공동선언의 아름다운 정신과 민족적 희망을 생각해 보라. 하지만 그런 선언과 동시에 한미연합사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뺨을 때리면서 대화하자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었다.
2018년 9·19 평양공동선언 때는 달랐다.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 한미 연합훈련이 대거 축소됐다. 2019년에는 3대 연합훈련이라 불리는 키리졸브, 독수리, 을지 프리덤 가디언(UFG)이 전부 유예되거나 실제 병력이 움직이지 않는 지휘소훈련으로 축소 시행됐다. 북한이 “북침 전쟁연습”이라며 가장 격하게 반발해오던 한미 해병대의 쌍룡훈련도 중단됐다.
그러나 2019년 2월 하노이 회담의 결렬과 함께 이 모든 평화의 언어들도 스러졌다. 남북한 대화는 전멸했다. 북한은 한국을 적대국으로 규정했다. 우리를 겨냥한 것은 아닐지라도 매년 약 10여개의 핵탄두를 만들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지금 30세 이하 한국인 청년들의 과반이 통일을 반대한다.
통일의 ‘마지막 골든타임’
바꾸어야 한다. 평화적인 공존의 체제라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협력과 궁극적인 통일은 민족적 중흥의 결정적 동력임을 다시금 새겨야 할 때다. 비록 10월 말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가 실망스러운 것이기는 했어도 APEC 정상회의는 전반적으로 성공했다. 이제 그 성공의 에너지를 남북관계 복원으로 이어갈 필요가 있다. 인류문명 파괴자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남북한 “피스메이커” 역할 수행에 적극적이다. 시진핑 주석은 한국과 북한의 대화 재개를 위해 나서겠다는 의사도 표명했다. 이 대통령은 “페이스메이커”로서의 역할을 능동적인 차원에서 행사할 필요가 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 평화의 과정이다. 내년 4월 트럼프가 중국에 간다고 한다. 지금부터 미중 정상이 중국에서 회동하는 시기까지가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골든타임’일는지 모른다.
몇 가지 고질적인 장애요소가 있다. 핵심은 사회 전반적으로 자주적 문제의식이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한반도 문제의 주체라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남북한 간 모든 합의서의 첫 줄에 “우리끼리”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고 적시하지 않았는가. 국민의힘 등 극우세력들은 북한에 저자세 굴욕을 자초한다면서 정권 깎아내리기에 골몰할 것이다. 무시할 일이다. 아무 도움이 안 된다.
또 다른 큰 장애물이 있다. 정부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소위 ‘동맹파’ 인사들이다. 그들은 “우리가 절대로 미국보다 한 발 앞서서 나아가면 안 된다”고 외친다. 미국은 하늘이요 우리 국익 앞에 미국의 이익이 위치해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그런 의식 하에 한미 워킹그룹이 작동되었다. 그로인해 2018년의 찬란한 기회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런 어리석은 경험을 되풀이할 텐가.
우리가 반 발 앞서야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신동방정책’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동독을 주권국가로 인정해 대화 기반을 마련했고, 미국과 소련보다 늘 ‘반 발짝’ 앞서 대화의 환경을 만들었다. 우리는 현 남북관계의 경색을 돌파할 특별한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더 이상 실기하기 전에 말이다. 북한과의 소통을 위해 현명하고 지혜로운 인사를 대북 특사로 보내는 것도 생각할 일이다. 그런데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말만으로는 안 된다.
동맹파들이 계속 읊고 있는 구호가 E·N·D(교류, 정상화, 비핵화)다. 그러나 비슷한 말놀이를 하자면 북한의 비핵화를 입 밖에 내는 순간 대화는 죽어버린다. DDD다. Denuclearization is out, Dialogue Dies! 또 교류는 시작도 못하고 바로 끝난다. EEE다. Exchanges END before Embarkation! 우리는 E·N·D가 아니라 R·U·N이 필요하다. 존중과 이해와 정상화(Respect, Understanding, Normalization)다.
먼저 우리는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조선)임을 인정해야 한다. 한반도에는 분명히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 조선은 한국의 일부가 아니다. 또 우리는 조선을 핵보유국으로 존중해야 한다. 왜냐면 조선은 핵보유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비핵화를 거론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멈추어야 한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떡(비핵화) 하나 주면 안 잡아먹는다(적대행위 중지)는 미국과 한국의 말이 씨알이 안 먹힌다.
2025년 12월 5일에 공개된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NSS: National Security Strategy) 보고서에 북한 언급이 전혀 없다. 왜? 무관심일까? 아니다. 유연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다. 북한을 명시적으로 ‘위협’으로 규정하거나 ‘비핵화’를 강조하는 문구를 제외함으로써 향후 북한과의 대화 및 협상 국면에서 미국의 입지를 유연하게 가져가려는 의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트럼프는 최소한 두 번 이상 북한을 ‘일종의 핵보유국’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대화를 하자면서 호랑이의 거짓이나 뇌까리고 군사훈련으로 상대의 뺨을 갈기는 행위는 중단하는 것이 앞뒤가 맞는 언행이다. 그래야 이중의 구속이 풀리고, 그래야만 상대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말 따로 행동 따로 노는 언행불일치를 중단해야 한다. 게다가 어지간한 말 가지고는 안 된다. 경주 APEC 계기에 트럼프가 얼마나 구애에 가까운 언행을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은은 일언반구의 대꾸도 없지 않았는가.
평화의 주인은 우리여야
먼저 9·19 남북 군사합의 선제적 조기 복원을 완료해야 한다. 지난 8·15 경축사에서 이재명 대통령이 언급한 사항이다. 나아가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 한미연합사 및 한미일 군사훈련 축소 계획을 마련해 발표하는 일이다. 아울러 전작권 회수를 내년 안으로 완료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전작권 회수 후에는 군사훈련을 전면 중단한다는 선언도 추진할 일이다. 12월 7일 열린 정부 6개월 성과 보고 기자간담회에서 위성락 안보실장은 “한미연합훈련 (조정)을 카드로 직접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지만 재고해야 한다.
동맹파들과 성조기파들은 펄쩍 뛸 것이다. ‘미국의 허락’ 없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하냐는 얘기렷다. 아니다.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과정의 주인이다. 피스메이커다. 페이스메이커가 아니다. 빌리 브란트의 정신이다. ‘미국의 허락’이라는 관념자체를 지워야 한다. 자주권을 찾아야 한다. 이것만이 남북 대화와 평화의 길이다.
국힘이나 극우의 입장에서 군사훈련도 중단하고 비핵화 전제도 포기하는 것은 캐치-22에 걸린 미친 생각이다. 미치지 않았다면 조선과 대화할 수 없다. 절대 그렇지 않다. 캐치-22를 벗어나는 방법도 있다. 제3자가 나를 정상이라고 판정하면 된다. 국민이다. 진짜 미친 것은, 이중의 구속으로 가득한 언행으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절대 안 된다. 우리는 이중의 구속을 깨고 자주와 통일의 길로 들어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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