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친구들이여
[박민설의 촌철심쿵]
<세상 친구들이여>
만날 사람은 언젠가 만난다고 했던가?
바람 부는 세상
마침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다면
그를 친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혹은 동지라고 해도 좋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한날한시에 죽을 것을 믿는 친구.
이 별과 저 별 사이처럼
우리은하와 안드로메다처럼
서로의 사이에 대양이 흐르고
어쩌면 하나의 우주가 존재하는 사이
그렇게 선선한 간격을 두고
떳떳하게 함께 나아가는 사이.
여기 질문이 하나 있다.
출근길 지하철 선로에 아이가 떨어졌다면
마침 바로 옆에서 그를 목격했다면
서슴없이 뛰어들 수 있겠는가?
어떠한 계산도 없이 몸부터 날릴 수 있겠는가?
저기 열차가 달려오고 있다.
아이를 못 구할 수도 있다.
아이는 구하고 저는 죽을 수도 있다.
둘 다 죽을 수도 둘 다 살 수도 있다.
묻노니,
훌쩍 뛰어내릴 수 있는가?
머리 굴리지 않고 즉시 아이 향해 달려 나갈 수 있는가?
지금 당황하여 머릿속 복잡할 당신도
막상 닥치면 뛰어내릴 수 있다.
몸이 먼저 반응할 수 있다.
선로 향해, 아이 향해 온 생 날릴 수 있다.
산산이 부서질 수 있다.
느닷없이 이런 장면 상상한다면
머릿속이 아득해질 것이다.
뇌는 까마득하게 정지되고 숨은 콱 막힐 것이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내 새끼 지키는 일이라면 누구나 몸 날릴 것이다.
삶은 연습이 필요한 장르!
오늘의 연습이 내일의 실전이다.
지금의 실패가 미지의 성공이다.
이 순간 우리가 하는 사유가 ‘저 너머’로 가는 우주선이다.
사는 일이란 마술사의 손 너머를 보는 일
눈앞 손놀림에 현혹되지 않고 사건의 배후를 본다면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실재가 우리 온몸 휩싸고 돈다.
트루먼*의 가짜 스튜디오에 거대한 균열 일어난다.
‘지금 여기’는 ‘저 너머’와 다르지 않다.
우리 가끔 생각한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이거야말로 궁극의 힌트.
‘지금 아는 것’은 ‘순간’에 이미 적립되었다.
실패가 차곡차곡 쌓이면 자기만의 서사가 된다.
연습 거듭될수록 실전조차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구름 위를 산책하듯 사뿐사뿐 걸을 수 있다.
우리 생은 연습이 아니지만
순간은 온통 리허설 타임.
부담 없이 한 발 툭 내디뎌 볼 수 있다.
한 번 두 번 반복하다 보면 크고 높은 일도 대수롭지 않다.
막상 해 보면 별것 아니다.
선로 위에 떨어진 아이 구하는 일
내 아이뿐 아니라 인류 그 자체의 부모 되는 일
생의 파도가 덮쳐도, 별안간 상어가 큰 아가리를 벌려도
기절하지 않고 정신 똑바로 차리는 일
내 한목숨 던질 수 있다면 저 아이는 내 친구다.
세상은 친구다.
단 한 번 얼굴 본 적 없는 그대도,
미지의 후대도 다 친구다.
그러므로 당당하게 외칠 수 있다.
“세상 친구들이여!”
말해볼 수 있다.
“그대는 내 편이 아닐지라도 나는 그대 편이다.
흑인도, 소수자도, 장애인도, 에이즈 환자도,
죽음 뚫고 세계 떠도는 난민도,
세상 모든 아이도,
여성도”
한날한시에 죽지는 않겠지만
한날한시에 죽을 것을 믿는 친구여.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
그대여.
*영화 트루먼 쇼(The Truman Show, 1988)의 주인공. 가짜로 점철된 세계, 자기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를 깨뜨리고 한 발 나아간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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