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의 무덤’ 아프간...탈레반도 묻힐 수 있다
백승훈 아프간 문제 전문가 기고 아프간, 공산정권 이어 친미정권 모두 실패 “탈레반, 이슬람 이념 내세우면 또다른 패배자 될 것”
[백승훈 한국외대 중동연구소 전임연구원] 불필요했던 정의로운 전쟁
2001년 9월 26일, 미국 중앙정보부 ‘돌사탕’(Jawbreaker)팀이 반 탈레반 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됐다. 이어 10월 7일 미 B-52의 공습으로 시작된 작전명 ‘항구적 자유 작전(Operation Enduring Freedom, OEF)’ 아프가니스탄 전투는 3명의 미군 사상자 만을 남기고 두달 만에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정의로운 전쟁’으로 명명된 이 전쟁의 전투과정은 신속했고 탈레반에 대한 조치는 단호했다.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인 2001년 11월 탈레반 지도부는 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의 수장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 1대 대통령이 된 하미드 카르자위와 만났다.
바넷 루빈(Barnnet Rubin) 당시 UN 아프가니스탄 특별 사무총장 보좌관의 전언에 따르면 탈레반 지도자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는 탈레반에 대한 사면권만 보장해준다면 조건 없는 항복 및 모든 국내 정치 참여 포기를 약속했다. 오사마 빈라덴 신병 인도만을 거부했다. 9·11 테러와 관련해 알카에다와 정보를 공유하거나 협력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었던 탈레반으로서는 많은 것을 포기하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협상 타결을 원했던 하미드 카르자위와는 달리 미국 부시 행정부는 거절했다. 도날드 H. 럼스펠트 미 국방부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은 탈레반의 항복 협상에 관심 없다”라 공식선언했다. 이는 딕 체니 부통령이 “우리는 악과 대화 하지 않습니다. 무너뜨릴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와 9·11 사태 이후 구성된 테러와의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도덕적 우위를 확보한 미국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탈레반과의 협상 결렬 이후 20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지금까지 80만명의 미군을 투입, 총 8370억 달러 (976조 3천억원)의 군비를 지불했다. 사망자는 2352명, 부상자2만666명을 남겼다. 미국 의회 아프간재건특별감사관실(Special Inspector General for Afghanistan Reconstruction, SIGAR)은 전후 복구 비용까지 합치면 총 2조 2600억 달러(약 2600조원)의 미국 재정이 아프가니스탄에 투입되었을 것으로 추산한다.
2021년 8월 17일 탈레반 공동 창설자이자 리더인 압둘 가니 바라다르가 칸다하르 공항을 통해 20년 만에 아프가니스탄에 귀국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 장면은 2003년 5월 2일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에 S-3B 해군 대잠(對潛)전투기로 착륙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로 이어진 전쟁의 종언을 선언했던 부시 대통령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압둘 가니 바라다르는 2001년 미영 연합군과 탈레반의 전투에서 패해 파키스탄으로 도주했다가 2010년 체포돼 파키스탄 감옥에 투옥됐고, 그후 2020년 탈레반과 미국의 인질 협상 때 석방돼 카타르 도하에 거주 중이었다.
‘제국의 이익’ 챙기려다 실패한 전쟁들
아프가니스탄은 흔히 ‘제국의 무덤‘이라 불리운다. 근대 이후로만 봐도 대영 제국, 소련 그리고 미국까지 세계의 패권국 모두 아프가니스탄에서 원하던 정치적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퇴각했다.
영국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은 제국주의에 기반한 영-소 양국의 ‘그레이트 게임 (The Great Game)’ 하에 이루어졌다. 과도한 제국주의 경쟁은 영국의 식민철도전략과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한 러시아의 세력팽창전략으로 충돌해 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한 중앙아시아의 역내 경쟁과 갈등으로 확대됐다. 실제 양국 국익을 깎아먹는 과도한 경쟁 구도 속에서 아프가니스탄은 1차, 2차 영국 아프간 전쟁을 거쳐 현재 파키스탄(당시에는 영국령 인도제국)과 나뉘어져 아프가니스탄이 되었다.
역사적 모순은 러시아와의 경쟁구도 속에서 대영제국이 아프가니스탄 완충국가(buffer state)화를 위해 그은 ‘두란드 선(Durand Line)’내에 탈레반의 주 근거지였던 연방직할 부족 지역(Federally Administered Tribal Areas, FATA)이 형성됐다는 사실이다. 즉,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에 바탕으로 한 영국의 중앙아시아 개입은 그 과정에서 탈레반의 핵심 근거지인 FATA 지역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한편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은 1978년 맺어진 소련-아프가니스탄 우호 협정에 따라 이뤄졌다. 1978년 4월 중동성향의 다우드 칸 정권은 1973년 다우드 칸의 쿠데타를 도왔던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eople’s Democratic Party of Afghanistan, PDPA)의 무함마드 타라키가 다시 쿠데타를 시도하면서 붕괴됐다. 지지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성공한 쿠데타를 유지하고 정권의 안정화를 꾀하려던 타라키는 소련과 우호협정을 맺게 된다. 애초에 공산계열 정당인 인민민주당의 쿠데타를 소련이 후원했다고 주장도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소련 개입에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소련 개입의 주된 배경에는 타라키가 임명한 하피줄라 아민 총리와의 권력 다툼과 미국 개입 가능성이 있었다. 타라키 공산 정권은 국가의 현대화를 위해 여성 평등, 토지 개혁을 실현했고 고리대금업을 없앴다.
다소 급진적인 공산정권의 사회개혁 프로그램은 당시 부족국가 성향이 강한 아프가니스탄 산간 지역에는 반발을 샀다. 공산정권의 프로그램이 자신들의 문화를 침해 한다 여겼고 갈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78년까지는 그 갈등이 폭력 사태나 대규모 정권 퇴진운동으로 불거지진 않았다.
오히려 집권당인 PDPA당내 계파 갈등이 더 큰 문제였는데 당내 과격파인 민중파와 기치파가 나뉘어 벌어진 정치투쟁에서 과격파인 타라키 대통령이 온건파인 기치파 하피줄라 아민 총리에게 암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권을 잡은 아민은 소련의 개입을 억제하기 위해 파키스탄 그리고 더 나아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당시 냉전체제하에 소련에게는 용납할수 없는 행위였다. 결국 소련은 1978년 우호협정을 명분으로 친소련파의 재집권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진격했고 그것이 아프간-소련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렇지만 아프간-소련 전쟁은 전혀 다른 전개로 진행됐다. 아프가니스탄 집권 세력내 권력 다툼은 소련의 개입이후 외세에 저항하는 독립운동으로 변했다. 이후 10년이 지나면서 범이슬람주의 세력들이 개입하고 이슬람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하는 무자히딘 전사들이 전면에 나서 반소련 독립 투쟁이 되었다.
결국 소련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던 아민 정권을 제압하려는 소련의 시도는 소련-아프간 전쟁으로 확전됐고, 범이슬람주의의 지하디스트 세력들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했던 소련의 개입 역시 실패로 끝났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개입 역시 제국의 실패라기보다 이념, 이데올로기의 실패였다. 9·11 사태 이전까지 미국의 부시행정부는 철저히 이전 클린턴 행정부의 ‘확대관여정책(engagement and enlargement)’을 비판했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대선 캠페인 동안 철저히 국익의 관점에서 외부에 사용하는 재정지출을 줄이고 자국민을 위해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 본토가 적의 공격을 당하자, ‘찬란한 고립주의’에서 가치와 이념에 기반한 개입 정책으로 급선회한다. 자크 데리다가 공격의 대상이 모호하다 비판한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민주주의 확산’을 통한 영구 평화 구축이다.
미국의 ‘민주주의 확산’은 ‘확대 대중동구상(Greater Middle East Initiative)’으로 구체화 됐지만, 이는 오히려 이슬람주의 세력의 의회 정치로의 진출, 아랍의 봄 이후 전개된 극단 폭력주의의 득세, 그리고 탈레반의 재도래를 야기하게 된다.
“탈레반, 이슬람주의로는 또다른 패배자 될 것”
2021년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재집권 사태는 ‘제2의 베트남’, ‘제국의 무덤’,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승리’, ‘미국 패권주의 몰락’ 등 다양한 시각으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이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방향으로 이 사태를 규정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다.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벌어진 제국의 비극은 제국주의,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는 정파간, 부족간, 국가간 이익 극대화를 위해 각축한 끝에 빚어진 결과물이다. ”
이데아라 내세운 제국건설 안에, 인민들의 평등 사회 구축 안에, 시민들의 민주주의 사회 건설 안에 아프가니스탄은 없었다. 그리고 그 후과를 아프가니스탄인들이 감내하고 있는 상황이다.
아프가니스탄을 “XX의 무덤”이라 굳이 규정한다면 “이념의 무덤”이라는 표현이 더 적확할 것이다. 이는 탈레반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이슬람주의에 천착해 또다시 과거 탈레반의 모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려 한다면 그들도 승자가 아닌 패배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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