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이 한국에서 설계한 ‘제3의 길’

AI주권 시대, 마크롱이 제안한 ‘지능 동맹’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3일 한국을 국빈 방문, 청와대에서 열린 방한 환영 오찬에서 건배후 이재명 대통령과 손을 맞잡으며 포옹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3일 한국을 국빈 방문, 청와대에서 열린 방한 환영 오찬에서 건배후 이재명 대통령과 손을 맞잡으며 포옹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 지능 주권 중심의 외교 마크롱의 방한은 단순 의례를 넘어 미·중 패권 갈등 속에서 AI·양자 기술 등 ‘국가 지능 총량(GDI)’을 확보하기 위한 실리적 기술 동맹 선언임.
  • 글로벌 전략적 파트너십 프랑스의 기초과학과 한국의 ‘풀스택 AI’ 역량을 결합하여, 양국이 강대국에 의존하지 않는 ‘초국가적 지능 시스템’과 전략적 자율성을 구축하기로 함.
  • 지능 운영 국가로의 도약 한국은 이제 단순 부품 공급 국가를 넘어 글로벌 규범과 미래 산업 질서를 설계하는 ‘지능 운영 국가’로 도약해야 한다는 과제를 부여받음.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이번 방한(4월 2일부터 4월 3일까지 1박 2일간)은 단순한 외교 이벤트가 아니었다. 형식은 국빈 방문이었으나 본질은 인공지능(AI)과 양자 컴퓨터로 대변되는 ‘지능 주권’을 선점하기 위한 정교한 산업 정책 선언이었다.

한·프 수교 140주년이라는 외교적 수사 이면에서, 양국 관계를 22년 만에 ‘글로벌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하고, AI·반도체·양자 기술 분야의 구체적 협력 체계를 구축한 것이 그 증거다.

주목할 점은 마크롱이 일본을 먼저 방문한 뒤 한국에 온 일정 구성이다. 일본에서는 국방·우주·원자력 등 전통적 안보 협력을 재확인했으나, 한국에서는 삼성전자·현대차·네이버 경영진과의 릴레이 회동을 통해 미래 산업의 실질적 파트너십을 본격화했다.

오늘날 국제 협력의 무게추가 ‘명분’에서 ‘실리적 기술 가치’로 이동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국력의 새로운 척도, GDI

과거의 국력이 국내총생산(GDP)으로 대변되는 물적 총량이었다면, 이제는 ‘국가 지능 총량(GDI: Gross Domestic Intelligence)’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한 국가가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보유하고, 이를 얼마나 고도화된 알고리즘으로 처리하며, 실질적인 산업 인프라와 거버넌스로 구현해내느냐가 국력의 잣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 속에서 프랑스의 선택은 냉정하고 전략적이었다. 미국 중심의 거대 플랫폼 질서와 중국의 국가 주도 모델 사이에서, 유럽식 ‘기술 주권’을 실현할 최적의 파트너로 한국을 지목한 것이다. 마크롱은 연세대 강연에서 그 의도를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우리는 중국의 지배에 의존하고 싶지 않고, 미국의 예측 불가능성에도 과도하게 노출되고 싶지 않다. 그런 면에서 한국과 프랑스가 협력할 공간이 있다.”

이 발언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미·중 양극 체제 속에서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려는 프랑스의 지정학적 포석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초국가적 지능 시스템’의 탄생

이번 협력의 골격은 ‘제3차 한-프랑스 경제계 미래대화’에서 구체화되었다. 양국 기업인·정부 인사 300여 명이 참석한 이 포럼에서, 바이오테크·탈탄소·딥테크(AI·양자) 3대 미래 산업을 축으로 12건의 양해각서(MOU)가 체결되었다. 선언적 구호가 아니라 실행 계획이 가동된 것이다.

그 핵심에 AI와 양자 기술이 놓여 있다. 미스트랄 AI(Mistral AI)의 아르튀르 멘슈 CEO는 방한 첫날, 삼성전자 화성캠퍼스를 직접 찾아 전영현 DS 부문장과 메모리 반도체 협력을 논의했다. 미스트랄 AI가 파리 인근에 건설 중인 데이터센터에 삼성의 고성능 메모리가 탑재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양자 기술 분야에서는 파스칼(Pasqal)과 콴델라(Quandela)의 프랑스 기초과학 역량이, 한국양자산업협회와 큐노바컴퓨팅 등 한국의 상용화 역량과 만나는 구조가 제시되었다.

여기에 BNP 파리바 등 유럽 금융 자본과 에어리퀴드·사노피 같은 산업 자본이 결합했다는 사실은, 이 동맹이 수십조 원 단위의 자금 흐름을 수반하는 ‘작동하는 시스템’임을 방증한다.

기초과학과 제조 기술, 알고리즘과 연산 인프라, 자본과 산업이 국경을 넘어 결합하는 이 지점에서, 개별 국가를 넘어선 하나의 ‘초국가적 지능 시스템’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부품 국가’를 넘어 ‘지능 운영 국가’로

이제 질문은 우리에게로 향한다. 마크롱이 던진 이 거대한 판을 일회성 외교 성과로 소비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 전략의 변곡점’으로 삼을 것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이 더 이상 ‘잘 만드는 나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네이버가 자체 개발한 거대언어모델(LLM)과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인프라를 독자 기술로 연결하는 ‘풀스택 AI’ 역량을 마크롱에게 직접 피력했듯이, 한국은 이미 반도체라는 핵심 부품 공급을 넘어 알고리즘 설계와 서비스 운영까지 아우르는 역량을 축적하고 있다.(편집자주- 풀스택 AI, Full-Stack AI는 반도체 칩부터 최종 사용자 서비스까지 AI가 작동하는 모든 계층(Layer)을 수직적으로 통합하여 직접 구축하는 역량)

문제는 이 역량이 국가 차원의 전략으로 통합되지 못하고 개별 기업의 성과에 머물러 있다는 데 있다.

물론 이번 협력에 긴장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자력 분야에서 한국과 프랑스는 체코 원전 수주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바 있으며, 엘리제궁(프랑스 대통령실) 스스로도 “해결되지 않은 갈등 요인이 있다면 이를 해소할 수 있도록 모든 주제를 다룰 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AI와 양자 기술이라는 새로운 영역에서 상호 보완적 협력의 판을 짠 것은, 양국이 경쟁과 협력을 분리할 줄 아는 전략적 성숙을 보여준 것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방한 중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제3차 한-프랑스 경제계 미래대화(Korea-France Business Dialogue for our Future)'에 참석, 한국과 프랑스 재계 인사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방한 중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제3차 한-프랑스 경제계 미래대화(Korea-France Business Dialogue for our Future)’에 참석, 한국과 프랑스 재계 인사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산업 동맹을 넘어 ‘규범 동맹’으로

동시에 이번 협력을 산업적 차원을 넘어 ‘규범 동맹’으로 확장해야 한다.

AI 윤리, 데이터 표준, 알고리즘 투명성 등 글로벌 거버넌스 경쟁에서 유럽과의 연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의 규범적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강력한 전략적 자산이 될 것이다.

마크롱 방한과 때를 같이하여 논의된 호르무즈 해협 안전 항행 문제는, 기술 협력이 에너지 안보와 지정학적 연대로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마크롱의 이번 방한은 한국을 단순히 전략적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라기보다 한국을 시험대 위에 올린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지능의 하청업체’에 머물 것인지, 미래 질서를 공동 설계하는 ‘지능 운영 국가’로 도약할 것인지, 그 해답은 이제 우리의 전략적 선택에 달려 있다.

글쓴이

박재욱 신라대학교 교수

이 글은 박재욱 신라대 교수가 페이스북에 쓰신 글로, 필자의 승낙을 받아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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