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시대, 진보는 의미없다...보수도

[조선규의 Special Report] 진보와 보수를 넘어, AI 시대의 정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하면서 의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이재명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하면서 의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 낡은 프레임의 종말 한국 정치를 지탱해 온 ‘진보와 보수’라는 이념적 구분은 복잡해진 현대 사회와 시민의 삶을 설명하는 힘을 잃었다.
  • 합리와 혐오의 갈림길 이제 정치는 사실과 근거를 존중하는 ‘공적 이성(합리)’이냐, 특정 집단을 악마화해 국정을 소모시키는 ‘정치적 기술(혐오)’이냐의 싸움이다.
  • AI 시대의 숙제 알고리즘이 분노를 먹고 자라는 시대일수록, 진영의 승리가 아닌 ‘문제 해결 역량’과 ‘공적 책임’으로 정치의 가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
  • 우리에게 던질 핵심 질문 “당신은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혐오를 동력으로 삼지 않고도 시민을 설득할 수 있습니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냐, 보수냐로 나눌 수 없게 된 사회

정치를 이해하는 언어는 시대와 함께 늙어갑니다. 한 시대를 정확히 설명하던 개념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현실을 놓치기 시작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그러한 설명의 중심에 있었던 말이 바로 “진보”와 “보수”였습니다.

이 두 단어는 단순한 정치적 취향을 넘어,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역사적 경험, 1987년 체제 이후의 정당 경쟁, 지역주의의 기억, 세대별 삶의 조건과 가치관까지 함께 품고 있었습니다. 한때 이 구분은 분명 유효했습니다. 시민들은 복지와 성장, 안보와 대북관, 국가의 역할과 시장의 자율성, 개혁과 안정의 문제를 이 틀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과연 그러한 언어가 과거만큼 살아 있는가를 묻는다면, 이제는 다른 답을 준비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구분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여전히 그것은 정치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데 쓰이고, 몇몇 정책 영역에서는 일정한 차이를 설명하는 기능도 합니다.

다만 오늘의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핵심 동학을 설명하는 중심 축으로서는, 그 유효성이 눈에 띄게 약해졌습니다. 현실이 훨씬 복잡해졌기 때문입니다. 시민의 삶은 다층적인 이해관계 위에서 움직이고, 정치적 판단은 이념의 간판보다 성과와 태도, 운영 능력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비교적 단순한 도식이 가능했습니다. 진보는 분배와 평등을, 보수는 성장과 질서를 중시한다는 설명이 일정 부분 통했습니다. 진보는 가치와 개혁의 언어를, 보수는 안정과 효율의 언어를 대표한다는 인식도 오랫동안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그 구도를 점점 더 무력하게 만듭니다. 성장은 더 이상 보수만의 전유물이 아니고, 분배 역시 진보만의 고유한 문법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시장과 국가도 단순히 대립하는 두 축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규제를 줄이는 것이 언제나 경제를 살리는 것은 아니며, 국가 개입을 확대하는 것이 언제나 비효율로 귀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의 경제는 훨씬 더 정교한 조건 속에서 작동합니다.

실제로 기업은 단지 세율만 보고 움직이지 않습니다. 법인세 인하가 기업 활동에 일정한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기업 가치 상승이나 투자 확대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기업은 시장의 공정성, 정책의 예측 가능성, 법치의 일관성, 인재의 질, 기술 혁신 역량, 소비 여력, 대외 신인도, 국제 공급망의 안정성 같은 복합적인 조건을 함께 고려합니다.

시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는 복지 확대에 찬성하면서도 조세 부담 확대에는 신중할 수 있고, 어떤 이는 시장경제를 지지하면서도 대기업 특혜에는 비판적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안보에서는 보수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노동과 돌봄의 문제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공공 개입을 원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시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나드는 복합적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치만 여전히 과거의 선명한 간판에 기대어 시민을 분류하려 한다면, 그것은 사회를 설명하기보다 사회를 단순화하는 일에 가까워질 것입니다.

구글 제미나이가 생성한 이미지.
구글 제미나이가 생성한 이미지.

감정의 확산 구조가 달라진 AI 시대

이 변화는 단지 정책 환경의 변화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보의 생산과 유통, 소비의 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른바 ‘AI 시대’란 단순히 기술이 고도화된 시대가 아니라, 여론이 형성되고 감정이 확산되는 구조가 완전히 바뀐 시대를 뜻합니다.

과거에는 정당, 신문, 방송, 대학, 시민단체 같은 비교적 안정된 중개기관이 공론장을 형성했습니다. 물론 그 시대에도 왜곡과 편향은 존재했지만, 정보는 일정한 검증과 숙성의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튜브, 숏폼, 온라인 커뮤니티, 알고리즘 추천 시스템, 생성형 AI 기반 콘텐츠가 정치적 인식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 환경에서는 느리고 복합적인 설명보다 빠르고 자극적인 메시지가 훨씬 강한 파급력을 가집니다. 사실보다 감정이 먼저 도달하고, 분석보다 분노가 더 빨리 확산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늘의 정치 지형을 다시 읽기 위한 새로운 기준이 필요해집니다. 저는 이제 중요한 구분이 진보와 보수라기보다, 합리와 혐오 사이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또한 자의적으로 사용될 위험이 있는 말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입장을 합리라고 주장할 수 있고, 반대편을 혐오의 정치라고 비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 구분은 도덕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표어가 아니라, 공적 판단의 기준으로 엄격하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란 단지 말투가 차분한 태도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사실과 근거를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맞추어 사실을 선택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합리는 존중을, 혐오는 적대감을

복잡한 사회 문제를 단순한 적개심의 언어로 환원하지 않는 태도이며, 정책의 비용과 효과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또한 반대편 시민을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설득하고 경쟁해야 할 정치적 상대방으로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혐오’는 단지 거친 표현이나 일시적 분노를 뜻하지 않습니다. 혐오는 정치의 방식입니다. 그것은 사회적 불안을 해결 가능한 문제로 다루기보다,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감으로 전환시키는 기술입니다.

경제적 어려움, 공동체의 불신, 미래에 대한 막막함, 문화적 불안 같은 복합적 감정을 하나의 손쉬운 적에게 투사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어떤 때는 외국인이 그 대상이 되고, 어떤 때는 특정 지역이나 세대, 성별, 이념 집단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혐오의 정치는 복잡한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함으로써 잠시 사람들을 결집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를 운영하는 능력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혐오로는 예산을 설계할 수 없고, 혐오로는 산업 전략을 세울 수 없으며, 혐오로는 저출생, 고령화, 지역 소멸, 교육 격차, 기술 전환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혐오는 국정을 운영하지 못합니다. 다만 국정을 소모시킬 뿐입니다.

AI 시대는 이러한 혐오의 정치를 더욱 쉽게 증폭시키는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알고리즘은 이용자의 체류 시간을 늘리는 콘텐츠를 선호하고, 사람들은 대체로 분노와 불안, 충격을 유발하는 메시지에 더 오래 머뭅니다. 여기에 생성형 AI 기술이 결합하면, 사실처럼 보이지만 왜곡된 정보, 그럴듯한 조작 이미지, 맥락이 생략된 짧은 문장들이 훨씬 빠르고 대량으로 생산될 수 있습니다.

결국 오늘의 정치는 단지 정책 차이만으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누가 더 빠르게 감정을 자극하는가, 누가 더 능숙하게 적을 만들어 내는가, 누가 더 효과적으로 불안을 조직하는가가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와 보수라는 오래된 구도에만 기대는 것은 현실의 위기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금의 위기는 단순한 이념 대립의 위기가 아니라, 공론장의 질서와 민주적 판단 능력의 위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더 정확히 현실을 진단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정치는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무엇보다 평가 기준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스스로를 진보라 부르는지, 누가 자신을 보수라 칭하는지를 먼저 묻기보다, 누가 더 정확하게 현실을 진단하는지 물어야 합니다. 누가 더 큰 목소리로 지지층을 열광시키는가보다, 누가 더 복잡한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의 경로를 설계할 수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누가 더 강하게 분노를 표출하는가보다, 누가 더 책임있게 권력을 사용할 것인가를 따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제 정치는 이념의 상징보다 통치의 역량, 진영의 충성보다 공적 책임, 선동의 기술보다 문제 해결의 능력으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이 기준은 어느 한 진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도 스스로의 도덕적 정당성에 과도하게 취하면 얼마든지 배타적이 될 수 있습니다.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도 책임 윤리와 제도 존중, 정책의 일관성을 갖출 때 충분히 공적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라 태도이며, 간판이 아니라 운영 방식입니다.

개혁을 말하면서도 반대 의견을 악마화할 수 있고, 안정을 말하면서도 사회적 불안을 정치적으로 악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어느 편으로 규정하든, 사실을 존중하고 제도를 아끼며 갈등을 관리하려는 세력은 보다 합리적인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핵심 질문은 “당신은 진보입니까, 보수입니까”가 아니라 “당신은 혐오를 동력으로 삼지 않고도 시민을 설득할 수 있습니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과거와는 전혀 다른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저성장과 양극화, 청년 세대의 박탈감, 주거 불안, 수도권 집중과 지역 소멸, 연금과 돌봄의 위기, 기후 전환, 미중 패권 경쟁, 공급망 재편, 그리고 AI가 초래할 노동 질서의 변화까지 어느 것 하나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정치는 더 이상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과거의 기억만으로 운영될 수 없습니다. 물론 그 역사적 경험은 여전히 중요하며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과거의 전선만 반복한다고 해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시민이 실제로 겪는 불안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삶의 조건은 더 세분화되었으며, 사회적 갈등은 더 복합적으로 교차하고 있습니다. 정치는 마침내 과거의 정체성 경쟁에서 벗어나 미래의 문제 해결 경쟁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결국 진보와 보수라는 언어는 완전히 폐기될 필요는 없더라도, 더 이상 유일한 판단 기준으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 그 언어가 현실을 설명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면, 우리는 더 적합한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합리와 혐오의 구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적 이성’으로 사회의 신뢰를 세우는 정치

여기서 합리란 차가운 계산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속 가능하게 운영하기 위한 ‘공적 이성’입니다. 혐오란 단순한 감정의 과잉이 아니라 공동체를 소모시키는 정치의 습성입니다. 앞으로 한국 정치가 지향해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시민의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정치가 아니라 시민의 불안을 해결하는 정치, 분노를 조직하는 정치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 진영의 승리를 좇는 정치가 아니라 사회의 신뢰를 지키는 정치여야 합니다.

AI 시대는 인간에게 이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훨씬 더 많은 혼란과 피로도 함께 안겨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더욱 필요한 것은 빠른 판단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이며, 강한 확신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설명이고, 편 가르기가 아니라 공적 책임입니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선다는 말의 진짜 의미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념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이념의 간판만으로는 더 이상 사회를 이끌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단순합니다.

누가 어느 편인가가 아니라, 누가 더 책임 있고, 더 합리적이며, 더 혐오에 기대지 않는가. 한국 정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넘어야 할 문턱은 바로 그 질문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쓴이

조선규 칼럼니스트

조선규는 35여 년간 교육과 기업 경영, 그리고 지역 사회 발전의 현장에서 사람과 함께 성장해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해 변화를 만들고, 기업을 통해 길을 열었으며, 현재는 사회 곳곳의 다양한 문제를 함께 풀어가며 더 따뜻하고 공정한 미래를 그려가고 있다.

댓글

    함께 읽을 글

    칼럼 전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