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국가의 법치
[전우용의 역사에서 읽는 지혜] 법을 제 맘대로 다루는 사람들 ‘공정과 정의’의 잣대마저 허물어
‘불쇼’에 탄성을 질렀던 사람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서울 변두리에도 여기저기에 공터가 있었다. 평시에는 아이들의 놀이터였지만, 가끔은 떠돌이 약장수패가 공연장으로 사용하거나 곡마단이 대형 천막을 치기도 했다. 그런 날은 온 동네 축제일이었다. 무료든 유료든 동네 사람 대다수가 공터로 몰려가 공연을 구경했다. 공연에서 빠지지 않은 게 세칭 ‘불쇼’였다. 웃통 벗은 남자가 불 붙은 몽둥이를 빙빙 돌리기도 하고 입안에 넣었다가 빼기도 했다. 특히 용가리처럼 입으로 불을 뿜는 묘기를 부릴 때면, 좌중에 탄성이 일었다. 자기 아이가 혹시라도 불에 데일까봐 등 뒤로 자리를 옮기게 하는 부모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늘 가까운 곳에 불을 두고 살면서도 그를 두려워한다. 불을 사용함으로써 ‘인간’이 됐지만, 그래도 동물 일반의 속성은 남아 있는 셈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불을 만지기는커녕 불 가까이에 가는 것도 조심한다. 불에 데이면 고통이 오래 가고 지워지지 않는 흉터가 남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을 자기 입에 넣었다가 내뿜기까지 하는 사람을 보면 경탄할 수밖에 없다.
법도 불과 비슷하다. 국가를 형성한 이래 사람들은 늘 법 안에서, 또는 법 곁에서 살았다. 법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때도 있었으나, 일부러 가까이 할 이유는 없었다. 법은 가급적 멀리 하는 편이 나았다. 자칫 법에 걸리면 가벼워도 매를 맞았고 심하면 목숨을 잃었다. 일단 법에 걸리면 그로 인한 사회적 낙인은 평생 지워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행동 반경은 법이 정하는 선보다 좁은 범위로 제한되었다. 법에 걸릴 행위뿐 아니라 법에 걸릴 우려가 있는 행위도 하지 않는 것이 보통 사람의 불문율이었다. 사람들이 법 조항들을 세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지킬 수 있는 건, 이런 불문율 덕이다.
‘법쇼’를 펼치는 윤석열 정부
물론 법을 잘 아는 사람들, 법을 무기로 쓸 수 있는 사람들은 예외다. 법을 제 맘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은 법을 무기 삼아 남을 협박할 수도, 법을 이용해 사익을 챙길 수도 있다. 죄 없는 자를 죄인으로 만들고 죄 지은 자를 ‘선량한 사람’으로 둔갑시킬 수도 있다. 그들은 법이 정한 선을 수시로 넘나들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럴 수 있는 것을 자기의 당연한 권리라고 여긴다. 남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은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이 특별한 능력이다. 보통사람보다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잘 어기는 것이 법을 능란하게 다루는 사람들의 능력이다. 법을 사욕 실현의 도구로 쓰는 자들이 많았기에, 옛 사람들은 ‘인간의 법’ 위에 ‘신의 뜻’이나 ‘하늘의 도리’가 있다는 믿음으로 억울한 일상을 견뎌야 했다.
검사 출신 대통령이 검사 출신 인사 다수를 요직에 기용했다. ‘검찰 편중 인사’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법치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표한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 법과 원칙에 따른 ‘공정과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 적격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두 달간 윤석열 정부가 한 일과 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 법을 제 맘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공정과 정의’는 보통사람들이 바라는 ‘공정과 정의’와는 매우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박근혜 정권 때 임명된 기관장들에게 사퇴를 강요했다는 이유로 전 정권 인사들을 수사하면서 문재인 정권 때 임명된 기관장들에게 사퇴를 강요하는 것이 ‘공정’인가? 자녀 입시 준비와 관련해 비리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한 가족을 도륙하고서도 비슷하거나 더 심한 의혹이 있는 사람을 거리낌 없이 장관에 임명하는 것이 ‘정의’인가? 친분이 있는 민간인을 대통령 전용기에 태워 외국 순방에 동행시키는 것이 ‘법과 원칙’에 맞는 일인가? 대통령 부부 또는 그 측근과 사적 친분이 있는 사람의 가족을 대통령실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것이 ‘상식’에 부합하는가?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불과 몇 달 전까지 문재인 정부를 공격할 때 내세웠던 ‘법과 원칙’을 자기들의 행위에는 적용하지 않는다. ‘법과 원칙’에 대한 이 정권 담당자들의 감각은 보통사람들의 감각과 매우 다르다. 그들은 ‘법과 원칙’을 제 맘대로 휘었다 폈다 늘렸다 줄였다 하는 일에 능숙하다. 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외교, 안보, 남북 관계에까지 ‘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법이 그들의 무기이며 법으로 죄를 만드는 것이 그들의 특기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으로 온갖 묘기와 마술을 부릴 수 있다. 물론 그들이 보통사람들에게 묘기와 마술이 뒤섞인 ‘법쇼’를 보여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공정과 정의’에서 동떨어진 ‘빚투 보상’
며칠 전 금융위원장은 금융 취약층의 부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125조 원+α 규모의 ‘채무부담 경감 프로그램’을 시행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국민 1인당 250만 원, 4인 가족 기준 가구당 1천 만원에 상당하는 엄청난 액수다. 이 조치가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부동산 투기와 코인 투기를 안 한 사람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는 비판이 일자 윤 대통령은 “영끌과 빚투는 한국 사회가 몰았기 때문이니 국가가 안아야”한다고 주장했다. 세상에 투기로 인한 손실을 국가가 보상해 줘야 한다니.
투기로 얻은 이익은 개인의 것이고 투기로 인한 손실은 공공의 것인가? ‘이익의 사유화와 손실의 공공화’라는 철학을 이보다 선명하게 표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일관되게 ‘최저임금이 너무 많다’는 주장을 펴왔다.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젊은이 절대다수는 ‘영끌’이나 ‘빚투’와 무관하다. 최저임금 받으며 일하는 사람에게 거액을 빌려주는 은행은 없다. ‘빚투’와 최저임금에 대한 윤 대통령의 주장은 투기를 권장하고 노동을 천시하는 시대사조를 충실히 대변한 것일 수도 있다.
125조 원이면 125만 명에게 1억 원씩, 250만 명에게 5천 만원씩의 혜택을 줄 수 있다. 구체적이고 상세한 안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이 프로그램이 실제로 시행된다면 구제 대상자 선정 단계에서부터 ‘공정성’ 논란이 일 게 뻔하다. 이 막대한 돈 중 일부가 부정하거나 ‘온당하지 않게’ 지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원금이든 이자든 최대한도로 탕감받게 해주겠다고 대상자들에게 접근하는 법 기술자들이 나오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부채 탕감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대립, 야바위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금융기관들의 부채 탕감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금융위원회가 나서야 할 것이다. 검찰이 수사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일을 주관할 사람들이 모두 검사 출신이거나 검사다. 이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이들의 ‘공정과 정의’와 보통사람의 ‘공정과 정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가 생길지, 궁금하고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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